“K-과학 꽃피우려면 연구 인프라 해외 개방… 국제 커뮤니티 주도를”[M 인터뷰]
아시아 첫 핵자기공명분광기 등
첨단 연구장비 600여개 갖추고
연구자 돕는 분석과학 전문기관
장비지원 넘어 분석기술도 개발
신진 연구자 중심 ‘유닛’ 조성
도전하기 좋은 환경 만들어줘
정부 주도 R&D 시스템 한계
연구 주체에 세부관리 맡기고
산학연 역할 명확히 구분해야
대전=박수진 기자 sujininvan@munhwa.com, 정리=구혁 기자
지난해 8월 23일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 충북 오창센터는 평소와 달리 떠들썩했다. KBSI가 아시아 최초로 도입한 200억 원대 최첨단 1.2기가헤르츠(㎓) 핵자기공명분광기(NMR·Nuclear Magnetic Resonance) 실물을 직접 보기 위해 저명 단백질 연구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NMR은 우리가 건강검진 때 쓰는 자기공명영상(MRI)과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연구장비다. 자기장 속에 놓인 원자핵이 특정 주파수 전자기파와 공명하는 현상을 이용해 분자의 작은 구조와 화학 성분 변화 등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단백질 특성 분석에 유리해 신약을 개발하는 과학자들의 관심이 크다. KBSI에는 이 같은 고가의 하이엔드 장비부터 범용장비까지 600여 점의 연구장비가 구축돼 있다. 지난해 12월 17일 대전 대덕연구단지 KBSI 본원에서 만난 양성광(65) KBSI 원장은 “우리 과학이 ‘K-컬처’와 같이 ‘K-과학’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연구인프라를 해외에 개방해 우리 과학자들이 글로벌 연구 커뮤니티를 주도하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며 “우수 인재를 파격 채용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연구원은 산학연 협력체계 속에서 기업이 진짜 필요로 하는 난제 해결 연구에 주력해 산업화로 연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KBSI를 한 마디로 소개한다면.
“병원에 비유해보자면 ‘첨단의료장비·장비별 전문기사·영상의학과 전문의를 확보한 진단전문병원’인 셈이다. 정부 출연연구기관 중 유일하게 연구시설 장비를 기반으로 연구자들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고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분석과학 전문기관이다. 연구·분석지원·장비개발 파트가 협업하고 있다. 현대 연구는 누가 더 첨단 연구시설 장비를 갖고 있는가가 연구의 수월성을 좌우한다. 연구시설 장비가 중요한 이유다. 특히 장비운영 지원뿐만이 아니라 분석기술이 함께 개발돼야 최고의 성과를 창출할 수 있다. 역대 노벨상만 봐도 분석과학 분야에서 20여 차례나 수상했다. KBSI는 600여 점의 첨단 연구시설 장비를 바탕으로 분석연구를 지원하면서 바이오·소재·지구환경 분야 국내외 공동연구를 선도하고 있다. 또 이를 산업화로 연결하며 과학적·산업적 난제 해결을 뒷받침하고 있다.”
―최근 성과는.
“‘공초점(共焦點) 열반사 현미경’ 개발을 들 수 있다. 300㎚까지 열 분포를 측정할 수 있는 장비다. 반도체 분야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게 열 분포도 측정이다. 요즘 많이 다뤄지는 고대역폭메모리(HBM)의 경우 접점부에서 열이 발생하면 결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산업계에선 열 분포도 측정하는 걸 굉장히 어려워한다. 삼성 등 국내 굴지기업이 우리와 공동연구를 추진하자고 먼저 연락해 오기도 했다. 기업에서 개발한 반도체 소자는 우리가 시험을 해보고 싶어도 영업 기밀 사항이라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기업들이 직접 직원을 보내 우리와 같이 시험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또 평가한 기술을 사내로 이전한 뒤 장비개발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취임 후 역점추진 분야는.
“2023년 5월 취임사에서 ‘공격형 미드필더’가 되자고 강조했다. 우리 연구원의 정체성과 임무에 대해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어서였다. 인프라를 바탕으로 분석연구를 지원하는 데서 시작했지만 이제 분석과학 기반 연구·개발(R&D)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업무 영역이 확대되면서 기관이 체계적으로 한 번에 움직여야 하는데 각자도생처럼 장비 하나씩 끼고 연구하며 기관 전체로 시너지를 내는 게 다소 미흡해 보였다. 이에 우수한 연구 인프라를 기반으로 신진 연구자가 마음껏 도전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노화된 시스템 혁신을 추진했다. 합이 맞는 사람들끼리 ‘연구유닛’을 조직해 장비를 중심으로 연구와 분석지원을 동일 그룹에서 수행하도록 개편한 게 그 예다.”
―R&D 예산 삭감·복구 논란에 대한 평가는.
“뭐든 켜켜이 쌓이다 보면 먼지가 생기게 마련이고 털어 내야 될 때가 있다. 정부 R&D는 1982년 특정연구개발사업에 180억 원을 투입하며 출발했는데 2023년 29조6000억 원으로 1644배로 늘었다. 연구과제 수는 38개 부처에 걸쳐 7만6052개나 된다. 물론 지난해 예산이 줄어 힘든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예산이 줄어든 만큼 필요 없는 걸 걷어내고 혁신하는 계기가 됐다. 연구 규모가 늘고 글로벌 연구환경도 크게 변했으니 관리방식도 변해야 하는데 여전히 정부가 모든 것을 직접 챙기는 정부 주도형으로 지원·관리되고 있는 점은 다소 아쉽다. 대기업 R&D의 경우 이미 2000년대 초 삼성전자 한 곳의 투자가 정부 R&D를 추월했을 정도로 역량이 우수하다. 하지만 허리를 받쳐주는 중소·중견기업은 여전히 부족하다. 대학·연구소에서 창출된 지식이 기업 현장으로 이전·확산되는 혁신생태계와 국가 R&D 시스템이 충분히 구축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 이제 세세한 관리는 기관과 연구 주체에게 맡기고 정부는 국가혁신시스템이라는 전체의 틀 속에서 출연연·대학·산업계의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해 지원토록 국가 R&D 시스템을 혁신해야 한다.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고사할 수밖에 없다.”
―R&D 시스템 혁신을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면.
“산학연이 경쟁하기보다 서로 연계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예산을 지원하고 R&D 사업을 구성해야 한다. 대학의 경우 기초 원천성이 높은 연구를 장기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단 중소·중견기업 관련 과제는 산업계가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성숙도 높은 과제를 중점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 전략산업 분야는 출연연이나 대학이 하고 싶어 하는 연구보다는 대기업이 구조상 하지 못하는 연구를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초격차기술을 유지하기 위한 연구나 기업의 난제를 해결하는 연구,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원천연구 등이 예다. 또 단순히 산학연 컨소시엄 구성으로 산업계의 의견을 반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대기업과 비밀유지계약 체결 하에 그 기업의 진짜 난제를 해결하는 연구, 미래 먹거리 창출 아이디어를 제품화하는 연구를 하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우수한 연구성과를 내려면 우수한 연구인력이 필요하다. 획일적 연구원 채용 절차에서 벗어나 우수 인재를 파격 채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구 인프라도 국내 우선 지원에서 벗어나 해외로 개방해야 한다. 우리 연구자가 세계 최고의 연구그룹과 어울리고 글로벌 연구 커뮤니티를 주도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이것도 결국 경쟁력이다. 요새 ‘K-팝’ ‘K-컬처’라고 하는데 과학도 K-과학이 될 수 있다.”
―R&D 혁신을 위한 KBSI 노력은.
“우리도 최근 첨단 연구시설 장비를 활용해 기초과학의 성과를 산업화하거나 산업계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 및 산업체와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 일례로, 충북대와 미래에너지소재 공동연구소 설립으로 2차전지 기술 산업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우리 연구원이 충북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충북대 교수가 연구소에서 연구도 하는 방식이다. 특히 충북대가 있는 오창에 ‘에코프로’나 ‘LG에너지솔루션’ 같은 좋은 기업이 많은 것도 장점이다. 기업의 난제를 우리와 충북대에 주면 파트너십을 통해 같이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연구장비 산업의 글로벌 진출 확대에도 시동을 걸었다. 연구장비와 연계성이 높고 시장 규모가 큰 반도체·2차전지 등 전략산업 분야 난제 해결을 위한 계측 및 검사장비 진출로 시장을 넓혀갈 방침이다.”
―임기 동안 목표는.
“딱 반 바퀴 왔다. 성과를 내야 하니 좀 초조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사실 기초과학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노벨상이 나오기까지는 굉장한 시간의 축적이 필요하다. 역량은 상당히 올라가고 있지만 국민이 보기에 아직 성이 안 찰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정부 공고 과제 지원할 게 아니라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정부와 기획해서 예산까지 따내는 적극적인 협력을 추진할 방침이다. 지금 정부와 함께 우리가 개발을 추진하는 것 중 하나가 초전도자석이다. 상온이 아니라 고온초전도만 돼도 저온초전도보다 부피가 줄면서 ‘하이퍼루프’나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쓸 데가 굉장히 많아진다. 호남지역에서 생산되는 태양광 전력 역시 고온초전도 자석을 활용한 고압선을 통하면 손쉽게 전송할 수 있다. 이처럼 산업계 현장에서 꼭 필요로 하지만 부처도, 기업도 안 하는 ‘빈 공간’을 채우려 한다.”
“태양보다 1조배 밝은 빛으로 미세구조 관찰… ‘방사광 가속기’ 올 상반기 착공”
양성광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 원장은 충북 오창에 지어질 ‘다목적 방사광가속기’에 대해 “2025년 상반기 착공할 예정”이라며 “올해 해외 선진가속기 연구소 경력자 등 세계 수준의 우수인력도 유치하겠다”고 밝혔다. 방사광가속기는 태양 빛의 1조 배 이상 밝은 빛을 활용해 물질 내부 미세구조와 현상을 관찰하는 연구장비다.
양 원장은 방사광가속기 구축에 대해 “워낙 긴 시간이 걸리는 사업”이라며 “2022년 시작해서 2027년에 끝나는 계획이었지만 시기가 늦춰져 올 상반기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후인 지난해 12월 31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다목적 방사광가속기 기반시설 공사 입찰 공고를 시작하며 주관 건설사 선정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그는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제시한 기본 개념을 상세하게 설계에 반영하고 구체적 공사 기간 적용 및 총사업비 관리 등 행정절차를 밟는 데에도 시간이 소요됐다”며 “특히 전 세계적으로 요즘 가속기가 굉장히 많이 건설되고 있다 보니 장비 공급이 늦어지면서 지연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양 원장은 “건설 기간보단 성능 좋은 빔을 생산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구축 경험을 갖춘 가속기 전문가들을 많이 참여시키고 구축사업단 및 유관기관들과 협력해 최고 성능의 방사광가속기를 차질 없이 구축하도록 노력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공동연구기관으로 장치구축을 담당하는 포항가속기연구소(PAL)와 사업주체 간 책임과 역할을 명확히 하고 상호 협력을 약속하는 업무협약서(MOU)도 지난해 체결했다”고 설명했다.
양 원장은 “우리나라는 그동안 다양한 분야의 연구시설 장비 구축 측면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뤄 국가 연구·개발(R&D) 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면서도 “다만 장비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 장비운영 전문 인력을 확보하고 운영교육을 지원하는 한편, 구축금액의 10% 수준인 유지보수비용도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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