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맛있도록… 새콤달콤 ‘절임의 미학’[이우석의 푸드로지]
유럽은 초절임 동아시아는 염장
채소·고기 저장법이 조리법으로
무·양파·깻잎 등 여러가지 재료
소금·식초·간장 등에 담가 두고
반찬이나 고명으로 다양한 활용
中, 3000년전에도 오이 절여먹어
깍두기도 장아찌 범주 안에 포함

인류 역사상 저장법이 그대로 조리법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고기를 저장하려다 햄과 소시지 등 염장고기가 됐다. 젓갈이나 김치도 비슷하다. 알게 모르게 우리가 매일같이 먹고 있는 장아찌 역시 그런 경우다. 채소를 절여 보관하려다 보니 오히려 생채보다 맛이 좋은 메뉴가 됐다.
장아찌의 장은 ‘저장하다’는 뜻의 장(藏)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채소나 고기를 장(醬)으로 담가 오랫동안 두고 먹는 음식이다. 결국 젓갈이란 뜻. 마지막에 붙는 찌는 절인 채소를 이르는 디히(菹)에서 나왔다. 조선 성종 때(1481년) 편찬한 중역서 두시언해(杜時諺解)에 따르면 디히는 저(菹)를 우리식으로 읽은 것이며 묵은지, 오이지, 섞박지 등에서 쓰는 ‘지’의 옛말이다.
중국 시경(詩經)에 ‘오이(瓜)를 깎아 저(菹)를 만든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시경은 무려 기원전 9∼7세기에 편찬된 중국 최초의 시 모음집이다. 지금보다 약 3000년 전이다. 이후에도 여씨춘추, 설문해자 등 고문헌에 줄곧 저가 등장한다. 장아찌가 이처럼 일찌감치 기록되어 있음은 아주 옛날부터 계절 변화 등의 이유로 채소 절임을 상식했다는 얘기다.
뭐 중국에서만 채소를 절여 먹었겠냐마는 아무튼 중국의 채소 절임은 이처럼 단단히 고문헌에 박제되어 있다. 장아찌와 유사한 음식, 아니 그 지역에서 발달한 장아찌는 세계적으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독일과 동유럽에서 즐겨 먹는 절임 양배추 사워크라우트(sauerkraut)와 유럽 전역에서 상식하는 올리브와 오이 등 피클(pickles) 종류부터 튀르키예의 투루슈, 중국의 자차이(搾菜), 일본 쓰케모노(漬物), 베트남의 주안, 인도네시아의 아차르 등이 대표적 절임 채소(장아찌) 종류다.

이를 식문화권으로 분석하자면 크게 3종류다. 초절임, 염장, 복합 문화권으로 나뉘는데 우리와 동아시아는 염장 문화권이다. 피클로 대변되는 유럽은 초절임, 동남아시아는 식초와 소금을 함께 쓰는 복합문화권에 속한다.
정창원(正倉院) 문서, 연희식(延喜食) 등 일본의 옛 문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일찌감치 김치를 비롯한 염장 채소, 즉 장아찌를 먹었다고 한다. 나라 시대(7세기경)에 작성된 정창원 문서에는 ‘(요즘 김치와 비슷한) 수수보리저(須須保里菹)를 만들어 일본에 보냈다’고 쓰여 있다. 또한 연희식에는 오이, 느릅나무 껍질, 대나무 잎 등을 술지게미와 장류, 소금 등에 절여 장아찌를 만들었다는 구체적 기록이 등장한다.
고려시대에도 이규보가 집필한 동국이상국집의 가포육영(家圃六詠)이라는 시에 과(오이)와 청(순무)을 지염하여 동지에 먹을 반찬으로 만든 외장아찌(瓜菹)와 무장아찌(菁菹)가 나온다. 고려 성종 때인 983년 제사 방식을 기록한 예지(禮志)에는 다양한 젓갈과 장아찌(菹)를 상에 차린다고 했다. 이때 차린 장아찌는 미나리와 죽순, 순무, 부추 등이었다. 고기나 생선 등 다른 음식 종류는 문헌에 자주 나오지 않는 데 비해 유독 장아찌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장아찌가 일상식에서 중요한 음식이었다는 방증이다.
조선에 들어서는 매우 다양한 재료로 장아찌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오이와 가지, 동아, 박, 배추, 부추, 무 등이 구체적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고추가 유입된 이후에는 발효 과정을 거친 지금의 김치와 매우 유사한 음식들이 등장한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7월령에 나오는 대목이 바로 우리 식생활에서 장아찌의 지위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채소 과일 흔할 적에 저축을 많이 하소. 박·호박고지 켜고 외, 가지 짜게 절여 겨울에 먹어보소. 귀물이 아니 될까.”

시간이 흐른 후, 현대의 한국인들도 늘 장아찌를 먹고 있다. 여전히 우리 식생활의 주역이다. 가만 생각해 보라. 장아찌가 최근 들었던 밥상에 없었는지를. 나물과 장아찌가 가득한 백반이라면 물론이며 짜장면을 먹었대도 단무지를, 치킨을 시켰다면 치킨무를, 피자를 먹은 이는 피클과 할라피뇨를 함께 곁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중양식을 막론하고 장아찌가 빠지기 어렵다.
끝에 ‘지’자가 붙는 것이 모두 장아찌다. 깻잎지, 콩잎지, 오이지, 박고지, 단무지 등인데 이 외에도 아주 종류가 많다. 묵은지와 섞박지 역시 광의적으로 장아찌 범주에는 들지만, 특별한 발효 과정을 거친 것은 따로 김치류로 보는 경향이다.
소금이나 간장, 된장, 고추장 등에 박아넣고 절이는 장아찌는 집마다 다른 맛을 지닌다. 그래서 장아찌만 잘해도 그리 특별한 것 없는 백반집이 맛집으로 소문난다. 장아찌의 역할은 밥 먹기에 좋은 반찬 용도다. 흔히 ‘밥도둑’의 별칭을 가진 다른 음식들(젓갈, 간장게장, 간고등어)처럼 장아찌 역시 염도가 높다. 그래서 짠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장 자주 접하는 장아찌는 단무지다. 일본에서 전해진 것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식생활에 단단히 자릴 잡았다. 단무지는 다쿠앙즈케(澤庵漬け)를 이르던 ‘다꽝’을 우리말로 순화하며 생겨난 이름이다. ‘달달한 무장아찌’란 뜻이다. 원래 일본 에도 막부시대의 승려 다쿠앙 소호(澤庵宗彭)가 전투식량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단무지는 한·일 양국에서 각각 진화 발달하며 현대에도 인기 부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양국의 식문화 차이로 일본에서 다쿠앙은 따로 사 먹어야 하는 부식이지만 한국에서 단무지는 그냥 밑반찬으로 내주는 경우가 많다. 활용도는 단무지가 단연 높다. 분식집과 중국집(특히 만두집), 심지어 경양식집에서도 단무지를 기본 반찬으로 삼는다. 김밥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주재료이기도 하고 우동이나 국수의 고명으로 올리기도 한다. 단무지 자체를 산적에 끼워 구워내는 때도 있다. 한식당에선 단무지를 사다가 고춧가루에 버무려 새로운 장아찌로 만들기도 한다. 신기한 것은 일본에서 전래해 한국화된 음식인데 한국의 중국음식점에서 단무지를 가장 많이 소비한다는 점. 일제강점기 청요리집에서 한국인의 밑반찬 문화에 대응하기 위해 김치 대신 단무지를 사다 썼던 것이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는 설이 있다.
단무지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깍두기도 장아찌의 범주에 든다. 김치라기보다는 고춧가루를 넣은 무장아찌에 가깝다. 새콤달콤한 치킨무는 단무지보다는 깍두기에서 나온 음식이다. 거의 유일한 서울 음식인 설렁탕과 궁합이 맞는 깍두기 역시 서울(한양)에서 탄생한 음식이다. 원래 궁에서 먹던 음식으로 정조의 딸 숙선옹주가 처음 만들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각독기’(刻毒氣)라는 한자 음차로 표기했는데 ‘깍둑썰기’나 ‘깍둑깍둑’은 원래 있던 말이 아니라 깍두기 모양을 본떠 생겨난 단어라고 한다.

아무튼 장아찌에는 무를 많이 썼다. 겨울 전에 구덩이를 파고 무를 가득 보관하다 겨우내 두고두고 썼다. 섞박지 역시 무를 저장하던 장아찌에서 약간의 발효를 거쳐 진화한 것이다. 장아찌에는 채소뿐만 아니라 가끔 생소한 재료가 들어가기도 한다. 영국에는 삶은 달걀을 절인 피클(Pickled Egg)도 있다. 달걀장조림과 재료는 비슷하지만, 식초에 절였기 때문에 시큼한 맛을 낸다. 피클 하면 올리브, 양배추, 오이를 떠올리지만 이처럼 다양한 것이 많다. 새콤한 피클 국물을 음료처럼 마시기도 하고 과일을 쓸 때도 있다. 참외로도 만들고 수박 껍데기로도 장아찌를 담는다. 요즘은 감과 토마토를 쓰는 곳도 있다.
앞서 농가월령가의 내용처럼 계절과 상관없이 채소를 맛볼 수 있는 장아찌는 그야말로 겨울의 귀물(貴物)이다. 여름과 가을을 가져다 장아찌로 담는다. 종류별로 장만한 장아찌가 그득한 찬장만 들여다봐도 든든하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먹을까
◇ 퓨전포차 = 이름만 놓고 보면 그저 흔한 술집처럼 여기겠지만 정작은 계절 별미와 손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요릿집이다. 처음부터 내주는 찌개와 밑반찬만 봐도 주인아주머니의 내공이 느껴진다. 커다란 무짠지(무김치)를 통째로 내는데 이게 참 별미다. 직접 해주는 솥밥을 먹을 때도 다양한 장아찌가 따라 나온다.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2-1.
◇ 진대감 = 이른바 ‘강남삼합’으로 소문난 차돌박이 삼합 메뉴가 유명한 집이다. 장흥 삼합이 표고버섯과 키조개 관자의 궁합이 딱이라면 이 집은 살짝 구워내 탄성 깃든 졸깃한 차돌박이 소고기를 다양한 명이나물, 갓, 곤드레, 고들빼기 등 장아찌와 함께 즐기기에 좋다. 회식 장소로 워낙 유명한 곳이라 서울 곳곳에 분점이 있다. 서울 강남구 학동로38길 38.
◇ 금목서 회관 = 어디 고깃집 상차림이 이토록 호사스러울까. 광양불고기로 유명한 집이지만 사실 숨겨진 보물은 식탁에 쫙 깔리는 다양한 장아찌들이다. 역시 광양 특산물인 매실 장아찌가 기본으로 계절에 맞춰 토마토 장아찌 등 새로운 맛을 제때제때 선보인다. 광양시 광양읍 읍성길 199.
◇ 온센 = 일본식 튀김인 덴푸라를 밥 위에 올려내는 덴동집이다. 개점과 동시에 많은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단무지를 유자와 함께 담아 향긋하고 아삭한 맛을 낸다. 새콤달달한 맛이 덮밥을 한술 뜨기에 앞서 벌써부터 식욕을 자극한다. 서울 중구 세종대로 136.
◇ 팔미분식 = 부산 서면의 밤낮을 오랜 시간 지켜온 집이다. 다양한 분식을 파는데 특히 충무김밥이 본향 통영의 것 못지않다. 살짝 익혀내 아삭한 섞박지가 슴슴한 김밥과 잘도 어우러진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영업하니 언제라도 들러서 배를 채울 수 있는 집. 부산 부산진구 중앙대로691번길 55.
◇ 중앙분식 = 영주시에서 쫄면으로 유명한 집이다. 향긋한 간장 쫄면이 맛있는데 여기에 직접 담은 단무지가 한몫한다.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 크게 자른 망고 과육처럼 생겼다. 단무지 특유의 향과 식감이 그리 세지 않아 쫄면의 탱글탱글한 면발과 딱 들어맞는 궁합을 자랑한다. 경북 영주시 중앙로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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