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왕과 봉황

한겨레21 2025. 1. 1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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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질어질하다.

문민정부 이후 여러 대통령이 제왕적 이미지를 벗고자 봉황 휘장을 바꾸려 했지만, 시도에 그쳤다.

"봉황은 고귀하고 품위 있는 상상 속 길조로 덕치와 태평성대를 상징한다. 이 상서로운 새가 대통령실 청사를 감싸는 모습은 안정과 조화를 통한 대한민국의 자유 평화를 기원하는 것으로, 국민 뜻을 받들고 헌신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하겠다는 굳건한 다짐을 담아냈다." 계엄왕이 봉황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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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의 풍경동물]풍경동물34_20250107

어질어질하다. 안갯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설마가, 사실이었다. ‘그럴 리가!’는 곧 ‘그럴 수가!’가 되었다.

2024년 12월3일 밤을 엄습한 계엄 사태는 6시간 만에 해제됐지만, 내란의 (여진이 아니라) 본진이 한 달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럴 줄도 몰랐지만, 이렇게 버틸 줄은 더욱 몰랐다. 치밀었던 분노가 쌓이는 건지 부스러지는 건지, 현기증이 되어 머리를 짓누른다. 우리 역사에서 해괴한 우두머리가 어디 윤석열뿐이겠는가만, 이 수괴는 정말이지 망측하다. 수괴(首魁)를 넘어 괴수(怪獸)가 되어가고 있다.

헌법을 짓밟은 ‘손바닥 왕’의 탄생과 성장, 몰락을 되짚는 방법과 열쇳말은 수두룩할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 안에서 ‘술’과 ‘주술’을 뺄 것인가. 왕은 술로 부족했는지, 주술에도 만취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청와대를 버리고 느닷없이 용산으로 떠날 때는 “국민께 청와대를 돌려드린다”고 말했다. “거기 들어가면 죽는다” “용산에 왕의 기운이 서렸다”는 예지력 선생과 흰 수염 스승, 돼지도살 법사의 술법에 대해선 말이 없었다. 대통령실 직원을 뽑는 데 사주가 동원되고, 선생의 예지몽에 국가원수 순방 일정이 허우적댔다.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뛴 걸까. 계엄 사태의 숨은 기획자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은 아예 점집을 차리고 내란주술을 벌였다 한다.

예측 불허의 정치판에 몸담으면서 점괘와 풍수에 의존한 이가 적지 않다지만, 이런 사례가 있는가. 해군의장대에 근무했던 노은결 소령은 “대통령실 1층 천장의 그림을 보는 순간, 주술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여사가 주문했다고 알려진 봉황도였다.

봉황은 일찍이 왕을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겨져 조선시대 왕실에서 애용됐다. 경복궁과 창덕궁 안에도 봉황이 그려져 있다. 고로 봉황도를 주술그림이라 단정하는 건 억울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연일까, 필연일까. 쿠데타와 계엄령으로 권력을 찬탈한 일그러진 대통령들이 봉황을 사랑했다는 사실. 박정희는 1967년 ‘대통령 표장에 관한 공고’를 통해 봉황 두 마리와 무궁화가 그려진 휘장을 대통령 상징으로 결정했다. 집무실과 비행기, 자동차를 비롯해 서류와 찻잔에도 봉황을 도배했다. 전두환은 1985년 청와대 앞 분수대를 웅장하게 조성하면서 꼭대기에 봉황을 세웠다. 문민정부 이후 여러 대통령이 제왕적 이미지를 벗고자 봉황 휘장을 바꾸려 했지만, 시도에 그쳤다.

구중궁궐을 벗어나 청와대를 국민 품으로 돌려준다던 윤씨 정부는 2022년 용산시대를 열면서 대통령실 휘장을 공개했는데, 봉황이 그려져 있었다.(뭐, 왕을 상징하는 거니까.) 설명이 슬프다.

“봉황은 고귀하고 품위 있는 상상 속 길조로 덕치와 태평성대를 상징한다. 이 상서로운 새가 대통령실 청사를 감싸는 모습은 안정과 조화를 통한 대한민국의 자유 평화를 기원하는 것으로, 국민 뜻을 받들고 헌신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하겠다는 굳건한 다짐을 담아냈다.” 계엄왕이 봉황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닌가.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덕치와 태평성대를 상징한다는 네가 계엄왕의 분수대 위에서 얼마나 곤욕을 치렀을지 가슴이 아프구나. 전두환은 그 아래 ‘국가원수의 상징’이라 적어두었지. 우린 네가 거기서 모욕당하는 줄도 모르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보게 되었어. 머리 위에 하얀 까치 똥이 흐르더구나, 명색이 봉황인데. 2024년의 마지막 날, 청와대 앞 분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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