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가전·IT 박람회 CES 2025가 올해도 어김없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습니다. 매년 전 세계 거대 정보통신 기업들의 올 한해 내놓을 신제품과 기술 트렌드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인만큼 전 세계 기업가들과 투자자, 학계 등에서도 총출동하는 행사이기도 합니다.
특히 올해는 8년만에 젠슨 황 엔비디아 회장이 기조연설에 나서며 더욱 눈길을 끌었는데요. 현장에는 무려 1만여명의 사람들이 몰리며 젠슨 황과 엔비디아에 대한 높은 관심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CES가 개최된 미국의 대표적 도박도시 ‘라스베이거스’의 기원을 살펴보려 합니다. 그리고 도박과 환락으로 인해 ‘Sin City’라는 별명이 붙은 라스베이거스에 100년 동안 프로스포츠팀이 없었던 이유도 알려 드립니다.
눈덮힌 사막의 아이러니, 네바다 주
라스 베이거스는 미국 서부 네바다주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도시 인구 64만명에 광역단위 생활인구만 225만 명으로 네바다주 인구의 70% 이상이 이곳 라스베이거스에 몰려있습니다.
스페인어로 ‘눈으로 덮인, 눈이 내린’을 뜻하는 ‘nevada’가 주의 이름으로 정해졌는데요. 이 곳은 원래 스페인인들이 지배했던 멕시코의 땅이었기 때문인데요. 미국 서부권역에는 이렇게 멕시코와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이름이 많습니다. 로스엔젤레스 역시 스페인어에서 기원한 도시명이죠.
그런데 왜 사막이 가득한 네바다에 흰눈이 덮였단 이름이 붙은 걸까요. 네바다주의 면적은 대한민국보다도 큽니다. 넓은 면적만큼 지역별 기후도 천차만별인데요. 상당 부분이 사막이나 산으로 구성된 네바다주에도 남북으로 640km 가량 길게 뻗은 시에라네바다 산맥 일부가 포함돼 있습니다.
이곳에는 눈도 제법 많이 내리고 스키장도 있습니다. 스페인어로 산맥을 뜻하는 ‘Sierra’와 네바다와 결합한 시에라네바다라는 단어 자체가 눈덮인 산맥이란 뜻이 있습니다. 또 실제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에도 미국과 이름이 같은 ‘시에라네바다산맥’이 유명합니다.
즉 사막도시 네바다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하얀 눈이 덮인 산맥에서 따온 셈입니다.
스페인에서 시작된 라스베이거스의 역사
라스베이거스 역시 스페인어에서 따온 듯한 느낌이 한가득 담겼는데요. 역시 맞습니다. 베이거스는 ‘목초지(Meadows)를 뜻하는 스페인어 ’베가스(vegas)‘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입니다. 라스베이거스를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The Meadows‘가 됩니다. 스페인어에서 복수단어 앞에 쓰는 정관사가 두 종류가 있는데요. 남성에는 los를, 여성에는 las를 붙입니다. 로스 엔젤레스와 라스베이거스는 각각 남성과 여성에게 붙이는 스페인 정관사가 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유럽인들이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기 전 사막기후의 대초원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인 모아파족의 파이우트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 곳 라스베이거스는 주변 사막을 통틀어 유일하게 오아시스가 존재했던 곳으로 그로 인해 인디언들도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파이우트 부족은 바구니 같은 것들을 잘 만드는 손재주 좋은 인디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1829년 스페인 탐험가 안토니오 아르미호의 현지 길잡이 라파엘 리베라는 이 곳 라스베이거스에 유럽인 최초로 도착합니다. 다만 발견만 했을 뿐 사막 한복판의 라스베이거스 지역은 오랜 기간 그저 인디언들이 거주하는 버려진 땅 취급받았습니다.
발견 후 20여년이 흐른 1855년, 모르몬교로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신도 30여명은 선교를 목적으로 이 곳 라스베이거스의 파이우트족 부족과 접촉합니다. 이는 유럽인들의 첫 정착 시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인디언들의 고집은 완강했고 독실한 신자들은 정복 대신 후퇴를 택하며 라스베이거스 지역은 다시 인디언들이 거주하는 평온한 목초지로 머무릅니다. 19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라스베이거스 거주민은 공식적으로 22명으로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골든 러시 붐으로 탄생한 ‘Sin City’
그러던 20세기 초반, 골든 러시 붐은 네바다 지역으로 확산하며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금광과 은광이 연이어 발견된 것인데요. 1903년 네바다주 골드필드 지역에 금광이 발견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막 속 진주를 찾기 위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이어 1904년 토노파 지역에도 은광이 발견되자 동부에 머무르던 유럽계 미국인들은 네바다에도 철도를 깔고 유일하게 물을 구할 수 있던 이곳 라스베이거스에 기차역을 만듭니다. 기차역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며 이 곳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하는데요.
술을 팔 수 있는 지역 ’블록 16‘을 중심으로 술집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매춘과 도박이 성행하기 시작합니다. 라스베이거스의 별명 ’Sin city‘는 지역 언론 라스베이거스 선 뉴스페이퍼가 불법이 만연하던 라스베이거스를 범죄 도시로 칭하면서 유래했습니다.
도박 합법화와 후버댐 승부수 둔 베이거스
하지만 급격하게 팽창한 지역 경제는 금방 문제를 일으켰고 대공황이 터지면서 지역 경제가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승부수가 1931년 던져집니다. 바로 도박 합법화와 후버댐의 건설이었습니다.
대공황 극복을 위한 초대형 인프라 공사 중 하나였던 후버 댐은 1931년 건설을 시작해 1936년까지 건축이 진행됐습니다. 원래 이름은 인근 볼더 시티의 이름을 딴 볼더 댐이었으나 건설을 추진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이름을 따 후버 댐이라 불립니다.
애리조나주부터 네바다주에 걸쳐져 지어진 후버 댐은 높이 221m, 길이 411m의 초대형 댐입니다. 사막 지역인 서부지역에 중요한 상수원으로 쓰이게 됐을 뿐 아니라 건설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동원돼 라스베이거스 활성화에 큰 힘이 됐습니다.
6년간 매일 5000여명의 노동자가 투입된 후버댐 공사 덕에 라스베이거스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머물며 술집과 사창가 등 상권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합니다. 또한 이와 동시에 1931년에 이 곳 라스베이거스 지역에 카지노를 합법화하면서 환락이 넘쳐나는 유흥의 도시로 발전하는데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마피아 히트맨, 연인을 위한 카지노 호텔을 짓다
이러한 변혁기를 거친 라스베이거스가 초대형 카지노 시티로 변모하는 데는 당연하게도 카지노를 둘러싼 마피아들의 역할이 컸는데요. 금주법 시대 악명높던 청부살인업자 벤저민 벅시 시겔은 1945년 처음 방문한 라스 베이거스에 매료돼 카지노 호텔을 짓기로 합니다.
총 600만 달러의 거금이 투자된 해당 호텔의 이름은 바로 플라밍고 호텔. 1946년 개장한 플라밍고 호텔은 벤저민 시겔의 연인 버지니아 힐의 애칭이기도 합니다. 플라밍고 호텔 안에는 진짜 플라밍고가 있다고 합니다. 벤저민 벅시는 호텔 개장 이듬해인 1947년 조직원들간의 갈등 끝에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라스베이거스 남작이라 불린 억만장자 사나이
본격적인 카지노호텔이 지어지기 시작했지만 지금처럼 화려한 도시로 발전한 데는 또 한 명의 억만장자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바로 가장 미국적인 억만장자라 불리는 하워드 휴스가 그 주인공입니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주연을 맡은 영화 ’애비에이터‘가 바로 하워드 휴스의 이야기인데요.
사업가 하워드 휴스는 1966년 기존에 살고 있던 캘리포니아를 떠나 네바다의 라스베이거스로 거주지를 옮깁니다. 이후 딱 4년간 이 곳 라스베이거스에 머물던 그는 이 곳에서 여러 곳의 호텔을 인수하며 영향력을 크게 행사했는데요. 당시만 해도 어중이떠중이 도박꾼들과 매춘업이 성행하던 그저 그런 도박도시였던 라스베이거스는 하워드 휴스가 자신이 머무르는 도시인만큼 고급스러워야 한다며 대거 돈을 투자하고 이 곳을 발전시키며 미국 최대의 도박 도시로 변모하게 됩니다.
하워드 휴스의 별명이기도 한 ’Baron Las Vegas‘, 라스베이거스 남작도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이후 1990년대 스티브 윈, 셸던 아델슨, 도널드 트럼프 등 내로라하는 사업가들이 이 곳 라스베이거스에 카지노 호텔을 지으며 지금의 라스베이거스를 완성하게 됩니다.
미국 최대 환락도시에 스포츠팀이 없는 이유
불모지나 다름없던 사막땅에서 미국에서 가장 화려한 도박도시가 된 라스베이거스는 낮보다 밤이 더 빛나는 곳인데요. 생활인구가 200만이 넘는 초대형 메가시티에 미국 4대 스포츠 프로 스포츠팀은 2017년까지 없었습니다.
실제 2017년 기준 라스베이거스는 4대 프로 스포츠팀이 없는 도시 중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로 분류되기도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도박도시 라스베이거스의 딜레마입니다.
스포츠 도박이 합법화된 라스베이거스는 도시 특성상 자칫 프로스포츠의 공정성이 깨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큽니다. 승부 조작이 이뤄질 수 있는 가능성이 큰 만큼 각 스포츠 단체서도 라스베이거스에 연고 팀을 내어주기가 껄끄러운 것입니다.
또한 경기를 위해 지역을 찾는 운동선수들이 자칫 도박 중독에 빠지거나 한다면 더 큰 손실이 불가피하다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100년만의 첫 프로스포츠팀의 탄생
그로 인해 100년 이상 프로스포츠 팀이 존재하지 않던 라스베이거스에 첫 4대 스포츠 프로 스포츠팀이 2017년 창단하게 됩니다. 바로 내셔널하키리그(NHL) 아이스하키팀 ’베이거스 골든나이츠‘가 그 주인공입니다. 2016년 NHL은 31번째 신규팀 창단을 준비합니다. 후보는 라스베이거스, 퀘벡, 시애틀 등이었는데요. 투단주 투표 결과 결국 라스베이거스가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이 팀을 만든 사업가 윌리엄 폴리는 적극적인 어필을 통해 라스베이거스 연고지 구단을 창단하는 데 성공합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주요 후원자 중에 한명인 폴리는 웨스트포인트라 불리는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입니다. 그는 팀을 창단하며 이름으로 미 육군의 대표적인 군부대인 블랙 나이츠를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협회의 반대로 무산됐고 결국 금광 개발로 시작된 라스베이거스의 역사를 기려 골든 나이츠라는 팀명을 정하게 됩니다. 또한 라스베이거스 골든 나이츠라는 팀명이 너무 길어 라스를 빼버리고 베이거스 골든 나이츠라고 최종적으로 팀이름을 정합니다.
위기돌파 DNA 가진 라스베이거스의 저력
시작이 어려웠을 뿐 이후 오클랜드 연고의 NFL 팀 오클랜드 레이더스가 라스베이거스로 연고지를 옮겨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가 됐습니다. 그리고 오는 2028년부터는 MLB 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라스베이거스로 연고지를 이전해 4대 프로스포츠 중 NBA를 제외한 3개 종목의 팀을 보유하게 됩니다.
이는 라스베이거스가 이전과 달리 마카오에 카지노 세계 1위 자리를 빼앗긴 데다 지속해서 침체가 이어지고 있는 것을 타개하기 위한 나름의 고육지책으로도 평가받습니다. 또한 베이거스 골든 나이츠 창단 후 우려했던 문제들이 크게 발생하지 않으며 라스베이거스도 충분히 매력적인 스포츠 시장이란 판단이 더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황무지 사막에서 꽃핀 카지노의 도시, 라스베이거스. 고비가 올때마다 새로운 발상의 전환으로 도시를 발전시킨 라스베이거스의 DNA는 매년 초 혁신의 최전선인 CES에서 다시 한번 빛나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