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도 즐겨 마셨다”...적군 총사령관 이름을 이 병에 새긴 이유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5. 1. 11.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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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산 샤또 딸보를 연인과 함께 마시면서 쉬고 싶다”

한국에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말 입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의 사상 첫 16강을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이 호텔까지 쫓아와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한 말이죠. 당시 신드롬이었던 히딩크 감독의 한 마디 덕분에 샤또 딸보(Chateau Talbot)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물론 네덜란드인인 히딩크 감독은 우리보다 와인에 친숙했을 테지만, 하필 수많은 와인 중 왜 프랑스 보르도(Bourdeaux)의 샤또 딸보를 콕 찝어 말한 것일까요? 오늘은 히딩크 감독의 한 마디로, 우리나라 국민 와인이 된 샤또 딸보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대한항공 일등석에서 제공된 와인
히딩크 감독은 와인에 꽤 관심이 많은 애호가라고 합니다. 1990년대부터 PSV에인트호번과 레알 마드리드, 첼시, 발렌시아, 레알 베티스 등 유럽 유수의 클럽에서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필수불가결하게 와인을 접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소주가 직장인의 소울 드링크듯이, 유럽에서는 와인이 그 역할을 했기 때문이죠.

특히 히딩크 감독과 샤또 딸보 간 연관 고리가 대한항공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옵니다. 히딩크 감독은 우리나라 국가대표팀 감독 재임 시절 고국을 오가는 항공편을 제공 받았습니다. 고국인 네덜란드 뿐만 아니라, 해외 선수들의 기량을 평가하고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서도 바쁘게 한국과 유럽을 오갔는데요. 이때마다 축구 국가대표팀 공식 스폰서인 대한항공 일등석을 제공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대한항공 일등석에서 고객에게 제공됐던 레드 와인 중 하나가 샤또 딸보였습니다. 와인에 대한 관심도 있고, 매번 즐기다보니 자연스레 샤또 딸보가 친숙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설명입니다. 샤또 딸보 와이너리의 오너인 쟝 폴 비뇽은 과거 매경과 인터뷰에서 “대한항공이 샤또 딸보를 퍼스트 클래스에서 제공해 많이 알려졌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대한항공은 일찌감치 1980년대부터 일등석 승객을 대상으로 샤또 딸보를 서비스했습니다. 덕분에 정재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와인이었습니다. 샤또 딸보 와이너리 홈페이지에서는 프랑스의 다른 와이너리와 달리 한국어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한국과의 인연이 각별하다는 반증인 셈입니다. 그런데 샤또 딸보라는 이름은 어떻게 유래한 것일까요?

샤또 딸보 와이너리 전경. [사진 출처=샤또 딸보 홈페이지]
적장인 영국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와이너리
샤또 딸보는 프랑스 보르도 생줄리엥(Saint-Julien) 지역에 위치한 역사적이고 명망 높은 와이너리입니다. 메독(Medoc)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와인을 생산하는 곳 중 하나로,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적 유산과 깊이 얽힌 전통을 자랑합니다.

우선 이름이 특이하죠. 딸보, 영어로는 탤벗 입니다. 존 탤벗 경(Sir John Talbot)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탤벗 경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337~1453)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영국 귀족이자 장군입니다. 당시 보르도 지역을 포함한 기옌느(Guyenne)의 영국인 총독으로 활동했습니다.

프랑스 보르도 지역은 당시 프랑스 나머지 국토의 세금을 전부 합친 것보다 많은 세금이 징수되는 금싸라기 땅이었는데요. 이 때문에 매번 기회만 있으면 영국과 프랑스의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재밌는 것은, 탤벗 경은 프랑스군에 맞서 보르도 땅을 사수한 영국군의 총사령관이라는 점입니다. 점령군인 셈인데, 어쩌다 프랑스인들은 탤벗 경을 기리게 됐을까요.

탤벗 경은 비록 영국인이었지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정을 바탕으로 적은 병력과 자원으로도 효율적으로 보르도 지역을 방어해냈지만,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투에 임하다 전사합니다. 프랑스인들은 비록 적장이었지만, 그의 선정과 충성심, 능력 등을 높게 샀던 것 입니다.

실제로 지금 생산되는 샤또 딸보의 라벨에는 ‘Ancien Domaine du Connetable Talbot Gouverneur de la Province de Guyenne 1400-1453’ 이라 쓰여져 있습니다. ‘1400년에서 1453년까지 기옌의 영주였던 Talbot 딸보 총사령관의 옛 영지’라는 의미입니다.

존 탤벗 경. [사진출처=샤또 딸보 홈페이지]
수십년 숙성이 가능한 강건한 구조감
샤또 딸보 와이너리의 현대적인 성공은 1917년에 꼬르디에(Cordier) 가문이 이 부지를 인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소유 아래, 포도밭은 명성을 확장하며 1855년 보르도 등급(1855 Bordeaux Classification)에서 4등급 크뤼(Quatrieme Cru)로 평가 받습니다. 이후로 쭉 샤또 딸보는 보르도 와인의 일관된 품질과 우아함의 상징이 됐습니다.

특히 1917년을 계기로 와인 양조 기술이 현대화되고 부지가 재정비되면서 샤또 딸보는 보르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와이너리로 자리 잡게 됩니다. 현재 샤또 딸보는 생줄리앵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인 110헥타르(㏊)의 포도밭을 소유한 초거대 와이너리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와이너리에서 생산되는 와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플래그십 와인인 샤또 딸보입니다. 블랙커런트, 삼나무, 향신료의 풍미가 돋보입니다. 특히 수십 년간 숙성이 가능한 강건한 구조감이 돋보이는 와인이죠. 이보다 캐쥬얼한 와인으로 꼬네따블 드 딸보(Connetable de Talbot)도 있습니다. 부드러운 탄닌과 생생한 과일 풍미로 생산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도 즐기기 좋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샤또 딸보 와이너리에서는 까이유 블랑(Caillou Blanc)이라는 화이트 와인도 만듭니다. 보기 드문 보르도 블랑(보르도에서 만드는 화이트 와인)인데요.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과 세미용(Semillon)으로 만들어져 밝은 산미와 복합적인 아로마를 자랑합니다.

샤또 딸보. [사진출처=샤또 딸보 홈페이지]
특별한 순간, 새로운 도전의 순간에 어울리는 와인
2002년 당시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감독으로 추앙받지만, 월드컵 직후 감독직에서 스스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홀연히 한국을 떠나죠. 물론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한국과 인연을 이어가지만, 감독직에 오르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히딩크 감독 본인은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2002년의 성공은 특별한 순간으로 남겨두고 싶다”고 언급했습니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던 시간”으로 표현했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풀이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에 담겼던 구절, ‘떠나야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가 생각나는 행보 입니다.

히딩크 감독이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우리 국민에게 아낌 없는 찬사와 사랑을 받는 것은, 어쩌면 그가 떠남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절한 때 홀연히 떠남으로써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겼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특별한 순간에, 또는 아쉬운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설 때, 강건하고 단단한 샤또 딸보 한 잔과 함께 해보시길 추천합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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