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직면’ 애경그룹, 고객에 대한 사랑과 존경 놓치다 [권상집의 논전(論戰)]
지주사엔 CSR 임원 부재…사명에 담긴 ‘애경(愛敬)’ 가치 회복해야
(시사저널=권상집 한성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기업의 위기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재무적 성과의 부진이다. 매출액이 하락하고 영업이익이 줄어든다는 의미는 시장에서 회사의 제품과 서비스 경쟁력이 약화됐다는 시그널이다. 그러나 이는 단기적 위험이다. 재무적 부진은 탁월한 최고경영자(CEO)의 역량이나 연구개발 노력, 신제품 출시 등으로 극복 가능하다. 2010년 들어 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위기는 브랜드 가치와 신뢰도 하락이다. ESG 등 경영 트렌드가 부각된 이유다.
제주항공 참사 여파로 애경그룹은 현재 난처한 상황에 몰려 있다. 항공 참사 직후 제주항공 모회사이자 애경그룹 지주사인 AK홀딩스를 비롯해 애경산업 등 그룹 주력 계열사 주가는 일제히 하락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세대 불문하고 애경그룹 제품과 서비스가 무엇인지 거론하며 불매운동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생활용품과 화장품 유통이라는 AK홀딩스와 애경산업의 주력 사업을 고려할 때 창사 이래 최대 위기다.
사명에 담긴 '고객에 대한 사랑과 존경'
애경그룹의 기원은 채몽인 창업주가 1945년 세운 '대륭양행'이라는 무역업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애경그룹은 애경사를 인수해 '애경유지공업'을 세운 1954년을 그룹의 설립연도로 간주한다. 애경그룹은 지난해 창사 70주년을 맞았다. 애경(愛敬)이라는 사명이 상징하듯이 애경그룹은 고객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최고 가치로 내세운다. 생활용품, 뷰티사업 등을 운영하는 애경에 고객만족은 가장 중요한 목표다.
2018년 서울 홍대입구 인근 부지에 새롭게 올린 애경그룹 통합사옥, 애경타워(AK Tower)는 젊은 사람들로 늘 붐빈다. 홍대와 연남동의 랜드마크로 불리는 애경타워는 다양한 쇼핑몰 등이 모여 있어 젊은 세대의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도 인기 장소 중 하나다. CJ가 생활문화 기업을 내세워 영화, 드라마, K팝, 쇼핑으로 영역을 확장했다면 애경은 생활문화를 모토로 생활용품, 뷰티, 항공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생활문화사업은 모든 사업 영역이 고객과의 접점을 형성하기에 다른 사업보다 고객의 입소문과 평판이 절대적이다. 반도체 역량이 조금 하락해도 삼성전자에 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지만 생활문화 기업의 신뢰도가 흔들리면 그룹 전체로 위기가 확산된다. 항공 참사 이전에도 소비자들은 가습기 살균제 사고로 애경그룹을 기억한다.
애경그룹은 2019년 아시아나항공이 인수합병(M&A) 매물로 나왔을 때 항공산업 경험이 있는 유일한 투자자라는 점을 내세우며 인수 의지를 피력했다. 당시 애경그룹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항공업은 자본력이 충분하다고 경영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항공 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인수자가 항공사를 인수하면 시행착오, 의사결정 지연 등의 혼선이 발생한다."
그러나 부족한 자산 규모와 자본금 등에서 열세를 보인 애경그룹은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끝내 실패했다. 이듬해인 2020년엔 이스타항공 인수를 추진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항공 산업 자체가 불황에 빠지며 인수 작업이 난항을 거듭하자 그해 7월 포기를 선언했다. 당시 애경그룹은 항공 사업의 경우, 자본력보다 세심한 고객관리와 안전에 대한 노하우가 있어야 하는데 인수전은 자본력만을 우선시한다며 아쉬워했다.
효율성·재무적 가치에 집중하다 놓친 인간성
항공 참사 사고 당일, 고(故) 채몽인 창업주의 장남인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은 직접 현장을 찾아 고개를 숙였고 희생자 장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룹을 이끄는 오너의 의지와 달리 애경그룹의 모 계열사는 사고 발생 후 이틀 만에 타운홀미팅을 열고 생일자 이벤트와 경품 뽑기를 진행했다. 지상파 방송사가 연말 수상식을 취소하고 국내 기업과 대학에서 연말 행사를 속속 취소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룹 전체적으로 사회적 책임의 방향성과 역할이 부재함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다.
애경그룹 지주사인 AK홀딩스의 분기 보고서를 살펴보면, 사회적 책임(CSR)을 전담하는 임원이 보이지 않는다. 주력 계열사인 애경산업엔 ESG 위원이 있지만 모두 사외이사이기에 기업 내부에서 사회적 책임을 솔선수범하는 데 현실적 한계가 존재한다. 가습기 살균제 사고, 항공 참사 이면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이다.
실적 역시 부진하다. 애경그룹의 핵심 계열사는 애경케미칼, 애경산업, 제주항공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석유화학의 업황 부진과 경쟁력 하락으로 애경케미칼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하락세를 걷고 있다. 애경산업 역시 중국 시장의 수요 부진으로 수출이 감소하는 등 부진에 빠져 있다. 백화점 부문 계열사인 AK플라자는 지난 4년간 적자만 키웠다. 지난해 기준 주요 계열사의 영업이익을 모두 합쳐도 제주항공의 영업이익(1698억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룹 내에서 가장 높은 매출과 가장 많은 이익을 기록한 제주항공이 리스크에 빠졌다는 건 애경그룹이 지향하는 가치를 원점에서 재점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애경 계열의 브랜드와 제품이 무엇인지 열거하며 불매 대상으로 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고, 그 강도는 점점 더 세지고 있다. 치약, 색조 브랜드 제품 등 소비자 접점에 있는 모든 제품이 위기 상황이다.
애경그룹 홈페이지에는 애경이 걸어온 70년의 역사를 CEO가 언급하며 사명처럼 고객에 대한 사랑과 존경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소비자, 고객 더 나아가 대중이 애경그룹의 사랑과 존경을 정말 느꼈을지는 의문이다. 애경그룹이 얘기했듯이 항공업뿐 아니라 생활용품 사업은 자본력이 경쟁력인 사업 영역이 아니다. 해당 사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애경이 말한 대로 시행착오와 혼선만 발생한다.
효율성과 재무적 가치에 집중한 나머지 반드시 지켜야 할 인간성과 사회적 가치를 놓쳤다. 애경그룹은 말 그대로 애경(愛敬)이란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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