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뺨치는 ‘동남아 월드컵’ 열기에 한국 감독 희비쌍곡선
4강 탈락 신태용은 월드컵 예선 선전에도 인니 사령탑에서 경질
(시사저널=서호정 축구칼럼니스트)
동남아시아는 세계의 경제·문화·정치·종교 영역에서 거대한 잠재력을 지닌 지역이다.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이라는 준국가 국제기구를 형성한 11개국 총인구만 약 6억9000만 명. 규모의 힘으로 따지면 유럽연합을 능가하는 수준이다. 인구 1억 이상의 국가만 해도 3개국(인도네시아 약 2억9000만 명, 필리핀 약 1억1000만 명, 베트남 약 1억 명)이다. 스포츠에서도 이들은 지역 맹주에 오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 종합스포츠대회인 동남아시안(SEA)게임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진짜 열중하는 무대는 따로 있다. 2년 단위로 열리는 축구대회인 미쓰비시일렉트릭컵(이하 미쓰비시컵)이다.
동남아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축구에서 최강자를 놓고 펼치는 이 대회는 속칭 '동남아 월드컵'으로 불린다. 최근 동남아 지역에 불어닥친 한국 감독 영입 열풍도 결국 이 대회에서 비롯됐다. 2018년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을 동남아 정상에 올리며 '박항서 매직'은 절정에 달했다. 2020년에는 신태용 감독이 인도네시아를 결승까지 이끌며 롱런의 발판을 마련했다. 2022년에는 말레이시아의 김판곤 감독까지 합세해 국내 지도자가 이끄는 세 나라가 4강에 진출하면서 한국 감독의 주가는 절정에 달했다.

동남아 지역의 숙적 태국 꺾어 베트남 국민 더 열광
이번 대회에는 김상식 감독과 하혁준 감독이 새로 뛰어들었다. 약체 라오스를 맡은 하 감독은 단기간에 조직력을 끌어올려 강호 인도네시아와 비기는 등 인상적인 선전을 펼쳤다. 이번 대회 진정한 주인공은 박항서 감독에 이어 베트남을 이끈 김상식 감독이다. 김 감독은 조별리그와 준결승을 무패(5승1무)로 통과하며 결승에 올랐다.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베트남의 숙명적 라이벌인 태국. 그러나 라이벌이라는 표현은 베트남만의 생각이었다. 역대 전적에서 베트남은 태국을 상대로 3승17패8무라는 압도적 열세에 시달렸다. 특히 홈에서는 1998년 이후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었다. 김상식 감독은 베트남의 이 지독한 태국 콤플렉스를 끝냈다. 홈에서 열린 결승 1차전에서 2대1로 승리했고, 원정에서도 3대2로 재역전승을 거뒀다.
7승1무의 무패 우승, 거기다 천적 태국을 완벽히 제압하고 거둔 우승에 베트남은 환호했다. 하루 후인 1월6일 태국에서 돌아온 베트남 선수단과 김상식 감독은 총리 관저로 초청됐다. 이미 결승 1차전 승리 후 그라운드로 내려와 선수단을 직접 격려하며 기뻐한 팜민찐 총리는 베트남 국민의 자존심을 살려준 김 감독에게 1급 노동훈장을 수여했다. 각계에서 쏟아진 대표팀 포상금은 총액이 10억원을 훌쩍 넘어섰다.
김 감독은 지난해 5월 베트남의 새 사령탑에 올랐다. 2022년 미쓰비시컵 준우승을 마지막으로 베트남 감독직에서 명예롭게 물러난 박항서 감독의 후임은 프랑스 출신의 필립 트루시에 감독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일본을 16강으로 이끌며 큰 화제를 모았던 트루시에 감독은 베트남에 기술 축구를 심겠다는 포부로 지휘봉을 잡았지만 항저우아시안게임 조별리그 탈락, 카타르아시안컵 조별리그 탈락, 월드컵 2차 예선 탈락 등 심각한 부진을 반복하며 1년 만에 경질됐다.
결국 베트남은 한국인 감독과 궁합이 잘 맞는다는 정서가 커졌고, 한국 지도자 물색에 나섰다. 때마침 전북 현대 감독에서 물러나 1년여의 야인 생활을 하던 김상식 감독에게 기회가 왔다. 세대 교체에 실패하며 흔들리던 베트남을 빠르게 정비한 김 감독은 자신의 운명을 건 미쓰비시컵을 앞두고 한국으로 전지훈련을 왔다. 과거 박항서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서 강한 체력훈련과 수준 높은 연습경기로 팀의 퍼포먼스를 올리는 선택을 한 것. 준비된 베트남은 3일 단위로 경기를 치르는 죽음의 일정 속에서도 안정된 모습을 보이며 우승에 성공했다.
대회 우승 후 김 감독은 "베트남에는 여전히 박항서 감독님의 업적이 크다. 큰 도움이 되는 격려와 조언을 해주셨다. 박 감독님을 능가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묵묵히 내 길을 걸으며 누가 되지 않으려고 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신태용, 동남아 특유의 국가 간 자존심에 희생양 돼
반면 박항서 감독 이후 동남아 지역 한국 감독 열풍의 중심에 있던 신태용 감독은 미쓰비시컵 이후 전격 경질되며 김상식 감독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2020년 인도네시아 성인 대표팀과 23세 이하 대표팀을 총괄하는 사령탑에 오른 신 감독은 5년 만에 동행을 끝냈다. 인도네시아축구협회는 상호 합의하에 계약을 해지했다고 발표했지만 실상은 일방적인 해고에 의한 경질이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신태용 감독의 입지는 탄탄했다. 월드컵 3차 예선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2대0 승리를 거두며 C조 3위로 뛰어오른 인도네시아는 남은 4경기 결과에 따라 2026년 북중미 월드컵 본선 진출도 가능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미쓰비시컵의 부진이 신 감독의 발목을 잡았다.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 뛰는 혼혈 귀화 선수를 대거 기용하며 월드컵 예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인도네시아는 이번 미쓰비시컵에선 주력 선수들을 다 부를 수 없었다. A매치는 인정하지만 FIFA가 차출을 보장하는 대회가 아니다 보니 한창 시즌 중인 유럽파를 소집하기 어려웠다. 신태용 감독은 23세 이하 대표팀 선수들을 중심으로 A대표팀을 꾸려 나갔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미쓰비시컵 조별리그에서 미얀마를 상대로 1대0 승리를 했을 뿐 인도네시아·필리핀에는 모두 패했다. 라오스와도 3대3 무승부에 그치며 여론은 조금씩 동요했다.
결국 4강에도 오르지 못하고 탈락하자 인도네시아 일부 언론은 신 감독 경질설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에릭 토히르 인도네시아 축구협회장은 억만장자인 동시에 국영기업부 장관을 역임 중인 정치인이다. 그는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신 감독을 경질하고 유럽의 유명 지도자를 선임하는 쪽으로 대표팀 운영 방향을 급선회했다.
1월6일 오전 인도네시아축구협회로부터 경질을 통보받은 신태용 감독은 몇 시간 만에 해지 합의서에 사인하며 사임했다. 이런 결정 후 인도네시아 국민 여론은 "성급한 결정" "정치적 판단으로 훌륭한 감독을 보냈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대표팀 선수 다수도 신 감독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글과 사진을 개인 SNS 계정에 올렸다. 월드컵 3차 예선 잔여 일정이 중요한 인도네시아는 현재 네덜란드 출신 슈퍼스타였던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감독 선임을 앞두고 있다.
신 감독의 경질은 축구에 대한 뜨거운 열기의 이면에 있는 동남아 축구의 성급함도 보여줬다. 월드컵 예선이나 올림픽 예선에 비하면 미쓰비시컵은 비중이 떨어지는 '우물 안 개구리' 싸움이지만, 동남아 지역 특유의 국가 간 자존심이 걸린 승부에서의 실패를 명분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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