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의 뮤즈, 현실에선 성공한 사업가였다[영감 한 스푼]
클림트는 의뢰로 사교계 여성을 그리는가 하면, 상징에 빗댄 여자들의 누드를 그리고, 작업실에서는 이런 누드화의 모델을 선 여자들의 적나라한 포즈를 그렸습니다.
생전 클림트는 “나라는 사람은 흥미로울 구석이 하나도 없다”며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림을 봐달라”며 사생활을 숨기려 했죠.
그러나 수많은 여인을 그림으로 남긴 데다, 세상을 떠난 뒤 ‘숨겨둔 자식’들 10여 명이 유산을 요구하며 나타나 ‘클림트의 여인들’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 이야깃거리입니다.
오늘은 그 중 평생 클림트와 함께했던 여인이자 ‘키스’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뮤즈, 에밀리 플뢰게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바람둥이’ 클림트 눈 감아준 헌신적 여자?
클림트가 29세 젊은 화가일 때, 17세인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을 그렸는데, 가족이나 주변 사람을 모델로 흔히 그림을 그렸던 시기입니다.
이후 클림트 형제들은 중요한 그림 커미션을 따내며, 그림 사업을 확장합니다. 플뢰게 자매 역시 ‘슈베스턴 플뢰게(플뢰게 자매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패션 디자인을 시작해, 두 가문이 사업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다 에른스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클림트가 조카의 후견인이 되면서 에밀리 플뢰게와 구스타프 클림트는 가까워집니다.
두 사람은 빈의 사교 행사에 자주 함께했고, 사람들은 플뢰게를 ‘클림트 부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클림트가 죽을 때까지 둘은 결혼하지 않았고, 같이 살지도 않았습니다. 클림트는 어머니와 여동생, 누나들이 함께 살며 뒷바라지했고, 플뢰게도 언니, 동생 및 가족과 함께 살았죠.
이 때문에 예전의 클림트 전기에서는 플뢰게와 클림트가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했다’거나, 플뢰게가 ‘바람둥이 클림트’를 눈 감아준 헌신적 여자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미술사학자들은 가부장적 시각에서 벗어나 플뢰게의 삶을 돌아보고 있는데요. 클림트의 모델, 뮤즈라는 렌즈를 버리고 플뢰게의 삶을 보면 그녀 자체로도 성공한 사업가이자 시대를 앞서갔던 디자이너였음이 드러납니다.
‘슈베스턴 플뢰게’ 전성기엔 직원 80명
플뢰게가 입고 있는 옷은 당시에는 호불호가 갈리는, 낯선 스타일이었습니다. 허리가 조이지도 않고 패턴도 여성적 드레스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특히 영국에서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신체를 과도하게 억압하는 옷을 바꾸자는 페미니즘 운동에서 시작한 ‘개혁 드레스’(Reform Dress)의 영향도 보입니다.
이런 옷을 좋아하는 건 지성인과 아방가르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었죠. 플뢰게 자매들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1904년 빈에 패션 상점 ‘슈베스턴 플뢰게’를 열고 이런 옷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슈베스턴 플뢰게에 가면 비엔나 공방 스타일 인테리어에 콜로먼 모저가 디자인한 가구가 놓여 있고, 또 각종 실험적인 공예품들이 비매용 장식품으로 진열되며 세련된 취향과 감도를 자랑했습니다. 유럽의 도버 스트릿 마켓 같은 ‘편집샵’의 초기 형태를 보여줬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감각의 파트너’ 클림트를 사랑하다
실제로 클림트는 자신에게 초상을 의뢰하는 부유한 중산층 고객을 플뢰게에 소개하며 도움을 주었고, 디자인에 관해서는 서로 의견을 공유하고 직접 옷을 함께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두 사람은 매년 여름 함께 휴가를 떠났는데, 이곳에서 플뢰게가 새롭게 디자인한 옷을 입고 홍보용 사진을 찍을 때, 대부분은 클림트가 찍어줬습니다.
“파리에 와보니 이곳 사람들은 더 과감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누구도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 않아. 당신이 파리를 무척 좋아했을 것 같아.”
그러다가 플뢰게가 시장 조사를 위해 해외로 떠나면 클림트는 “미디(에밀리의 애칭), 왜 그렇게 빈을 빨리 떠났어? 파리에 그렇게 급하게 가야만 했던거야?”하고 묻거나, 자신이 빈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는 “내 귀여운 미드리첸, 미데사, 미디(에밀리의 애칭들)에게 돌아갈 생각을 하니 너무 기뻐. 그녀가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올까? 어쨌든 돌아가면 만나게 될 테니까”하고 애정 표현을 했습니다.
클림트가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에밀리를 불러줘’였고, 유산 절반을 그녀에게 남겼다고 하죠. 이 유산 대부분은 미완성 작품, 그림, 드로잉이었는데 플뢰게는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작품과 소장품을 팔지 않고 자택에 ‘클림트의 방’을 만들어 보관했다고 전해집니다.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뉴스레터 구독 신청
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경호처장 전격사퇴… ‘尹체포’ 허 찔린 경찰
- “尹은 공수처가, 경호처 직원은 경찰이”… 2차 체포영장 집행 앞두고 역할 분담
- “평화적 계엄” “고립된 약자”… ‘피해자 尹’ 전환 프로파간다 본격화
- 고령층 넘어 MZ까지 극우 유튜버에 ‘솔깃’
- 적의 적은 동지? 안철수에 ‘러브콜’ 보낸 이준석
- 트럼프, 취임 앞두고 ‘중범죄자’ 딱지 달았다… ‘성추문 입막음’ 유죄 판결
- “美 ‘크립토 대통령’이 온다”… 비트코인, 뭉칫돈 줄유입에 들썩
- 사랑받던 진보 정치인의 몰락… 먹고사는 문제가 최우선이다[딥다이브]
- 아기 낳으면 ‘억소리’… 출산 장려 나선 기업인들 통 큰 지원
- 재판부, 이종섭 지시 받아적은 ‘해병대 부사령관 메모’ 근거로 부당명령 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