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년간 젊은 여성 3만명이 감금당한 이유 [.txt]

한겨레 2025. 1. 1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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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의 ‘H열 15번’
‘이처럼 사소한 것들’ 실화 바탕 아일랜드 소설 영화화
수녀원의 비밀에 도전하는 작은 인간
소설과 다른 길 거쳐 획득한 자긍심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배급사 제공

1922년부터 1996년까지, 아일랜드 막달레나 수녀원에서는 적게는 1만명, 정당하게 추산하자면 3만명에 이르는 젊은 여성들이 감금당한 채 강제노역을 하며 학대당했다. ‘타락하고 방탕한 여자들을 교화한다’는 미명하에서였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수록된 ‘덧붙이는 말’을 보면 수녀원은 전국적으로 세탁소를 운영했다. 관련 자료가 은폐되거나 사라져서 정확한 피해자 수를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2021년에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이었던 18개 시설에서만 9천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 시설은 가톨릭교회가 아일랜드 정부로부터 은밀하게 자금을 지원받던 곳이었다.

오랜 시간 보호와 교화의 이름으로 종교와 국가에 의해 자행된 여성 폭력을 고발하는 이 소설은, 그러나 고통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진 않는다. 그보다는 그 고통에 뿌리내린 채 인간의 선량한 마음을 꽃피워 보여준다. 덕분에 우리는 한 사람의 어린 시절 기억과 만나고, 타인을 보살피는 품성에 젖어들며, 몸을 짓누르는 권위의 무게를 떨쳐내고 취약한 존재를 향해 손을 뻗는 선량한 의지를 보게 된다. 키건이 펼쳐내는 마음의 풍경은 겨울밤 화톳불에 구워낸 밤과도 같다.

한국 여기저기에서도 ‘2024년 올해의 책’으로 꼽힌 이 작품이 킬리언 머피 제작, 주연의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역시 작은 것들을 향한 연민과 경계를 선뜻 넘어서는 존재의 얽힘이 머피의 신체를 통해 선연하게 구현된 수작이다. 뛰어난 문장가가 말로 그려낸 것을 침묵으로 연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러나 머피가 이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얼마나 온전하게 완수해내는지, 직접 스크린에서 확인하시면 좋겠다. 그의 연기는 물감을 여러겹 덧댄 뒤에야 완성되는 유화처럼 묵직하고 조밀하다.

배경은 1985년 겨울, 아일랜드의 작은 도시. 대처와 손을 잡은 찰스 호히 정권 아래 사람들의 생활은 실업과 부채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석탄상인 빌 펄롱(킬리언 머피)은 사소한 일들을 묵묵히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가장이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배급사 제공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일상에 ‘쩍’ 균열이 벌어진다. 석탄을 배달하러 간 지역 수녀원에서 한 소녀가 부모의 손에 이끌려 강제 수용되는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그와 함께 옛 기억이 닥쳐온다. 미혼모였던 어머니, 아비 없는 자식이라 손가락질당했던 자신, 그런 모자를 거두어주었던 미시즈 윌슨에 대한 기억들. 곧이어 수녀원의 또 다른 소녀가 다가와 “제발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일마저 일어난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 진실 앞에서 빌의 마음은 혼란으로 요동치지만, 그렇다고 그 요청에 선뜻 응할 수도 없다. 작은 지역사회에서 수녀원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건 사회적 사형선고를 자처하는 일이나 다름없는 탓이다. 주변에서도 그냥 모른 척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빌은 사람을 살게 하는 건 결국 ‘사소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키건은 원작에서 “예배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일” 같은 것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이라고 썼다. 빌은 다섯 딸이 그런 대수롭지 않지만 선의가 없다면 하기 쉽지 않은 일들을 해내는 걸 보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낀다. 그게 삶이라는 걸 이해하는 것이다.

빌이 알코올 의존자 아버지와 살면서 힘겨워하는 소년이나 배고픔에 떨며 길에서 고양이 밥을 주워 먹는 아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선의의 네트워크로부터 벗어나 있는 이들, 그래서 ‘하찮은 존재’(small things)로 여겨지는 이들에게 절실한 것 역시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이기 때문이다.

소녀들과의 대면으로 빌은 이런 지혜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건 타락한 여자로 낙인찍혔던 어머니와 사생아라 불린 자신을 보듬어준 미시즈 윌슨의 일상적인 호의로부터였다.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 빌을 “가르치고 격려했던 방법”, 그리고 “말이나 행동으로 하지 않은 그 사소한 것들”. 그런 것들이 뭉쳐서 지금의 빌이 되었다.

그는 그저 고통이라고 생각했던 과거로부터 사소한 것들의 역능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리고 스스로가 작은 선의가 되기로 결심한다. 고민을 멈추고 수녀원 소녀 세라의 손을 잡아 그곳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작은 것들의 만남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빈한한 세계를 향한 위대한 봉기다.

영화는 원작과 꽤 다른 길을 간다. 담담하고 단정한 원작에 비해 영화 속 빌은 한층 더 우울하고 신경증적으로 보인다. 원작의 팬이라면 아쉬울 수 있는 선택이다. 하지만 영화의 끝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영화가 창조적인 방식으로 원작의 시공간을 연장하는 순간과 만나게 된다. 멀고 먼 길을 걸어 세라와 함께 집에 도착한 빌은 언제나처럼 손을 정성 들여 씻은 뒤 세라를 자신의 가족에게로 이끈다. 그리고 마침내, 타인의 손을 잡음으로써 삶의 의미를 깨달은 작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자긍심이 그의 얼굴에 떠오른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더불어.

영화평론가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배급사 제공
손희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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