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이 남자 위해 세금 더 내겠다”···미스터리한 납세행렬의 이유[히코노미]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5. 1. 11.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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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노미-12] “세금은 우리가 잘한 것에 대한 벌금이다(A tax is a fine for doing well).”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명언(?)’입니다. 월급날이 되면 이 격언을 떠올립니다. 이 땅의 근로자라면 한 달에 한 번쯤은 누구나 반국가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평소에는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정부가 소득세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빼어가기 때문입니다. 유리 지갑 월급쟁이들의 마음속에는 작지만 옹골찬 분노가 들끓습니다. “이렇게나 많이 떼어가다니.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특히 요즘같이 정치가 모멸감만 주는 상황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무슨 세금을 또 내란 말이냐.” 세금을 향한 분노는 언제나 정치적 위기를 불렀다. 사진은 영국의 과세에 저항하면서 일어난 미국인의 보스턴 티파티 사건.
이 시대 직장인들의 소분(小忿·작은 분한마음)과는 달리, 소득세의 시작은 열정적 애국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국가를 위해 너도나도 내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국민적 염원이 소득세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떠받친 것이었습니다. 이 자금은 결국 한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해낸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유럽을 위기에서 구해낸 19세기 초 영국의 이야기입니다.

이때 나라를 이끈 남자가 영국 총리이자 재무장관이었던 윌리엄 피트였습니다. 국왕 조지 3세는 정신병으로 미쳐있었고, 아들이자 섭정인 조지 4세는 술과 섹스에 빠져있던 상황. 최고 지도자들의 형편없는 통치 속에서, 결혼도 안 한 채 국가의 명운을 바로 잡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 때의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 어쩐지 남의 나라 상황으로만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국정은 언제나 돈과 연관돼 있는 법이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영국의 재정을 탁월하게 관리한 총리 윌리엄 피트.
‘위대한 평민’ 피트 가문
윌리엄 피트는 유력 정치 가문의 아들이었습니다. 동명의 아버지 대(大) 윌리엄 피트 역시 영국의 총리를 지냈습니다. 왕의 개인적 사익보다는 언제나 국가의 이익을 위했던 인물. 그래서 언제나 왕 앞에서 당당했던 위인. 평민 출신이면서 출세를 위해서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윌리엄 피트를 영국인들은 이렇게 불렀습니다. “위대한 평민(The Great Commoner).” (후에 채텀 백작 작위를 받으면서 무색해진 별명입니다만)
“아들아, 정치는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일이란다.” 아버지 대(大·The elder)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를 지냈던 인물이다. 아들이자 후대 총리인 윌리엄 피트와 구분을 위해 대(大)를 붙인다. 아들 윌리엄 피트의 이름에는 소(小) 혹은 젊은(The younger)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피트는 아버지의 정치적 결단력과 배포를 그대로 닮은 인물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총명함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케임브리지 펨브로크 대학에 입학해 라틴어·그리스어·수학·철학·역사에서 타고난 재능을 보였지요. 영특함 속에서도 더 빛나는 그의 진짜 재능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윌리엄 피트의 주변은 언제나 사람으로 넘쳐납니다.

정치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일이었고, 윌리엄 피트는 여기에 탁월함이 있었습니다. 순발력을 겸비한 재치, 지식으로 무장한 화술이 사람들을 끌어당겨서였습니다. 후에 정치인이자 노예무역 폐지를 이끈 그의 동지 윌리엄 윌버포스는 적었습니다. “(윌리엄 피트의)익살스런 재치는 누구든 즐겁게 하면서도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피트도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정치인을 꿈꿨습니다. 1781년 1월 그가 마침내 하원에 입성합니다. 첫 의회 연설에서 어찌나 달변을 토해댔는지. 기라성같은 정치인조차 윌리엄 피트라는 이름을 각인합니다. 그의 나이 고작 22살이었을 때였습니다.

윌리엄 피트가 수학한 케임브리지 펨브로크 컬리지. [사진출처=R Boed]
20대 혜성처럼 등장한 정치인 윌리엄 피트
재무장관에 이어 총리까지. 그가 정치에 입문한 지 고작 2년 만에 얻어낸 타이틀이었습니다. 국왕 조지 3세가 제임스 폭스-프레더릭 노스 연합 정부를 해산한 뒤였습니다. 두 사람이 왕권을 제약하고 의회 권력을 더욱 확장하려 하자 조지3세가 먼저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지요. 국왕이 내세운 건 고작 24세의 윌리엄 피트였습니다.
“초..총리요? 제...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20대의 윌리엄 피트.
아직 설익은 정치 신인을 내세워 국왕의 권력을 확장할 속셈이었습니다. 1784년 역대 최연소 총리 윌리엄 피트 체제가 출범합니다. 시민 사회의 조롱도 극에 달했습니다. 풍자극 롤리어드(The Rolliad)는 이렇게 비꼬았습니다. “브리타니아는 한 학생의 보살핌에 맡겨진 왕국이다.”

우려도 이해가 안되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녹록지 않은 환경이 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으로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를 완전히 잃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오랜 전쟁 탓에 국가 부채는 거대한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피트가 재임할 당시 국가 부채는 2억 4300만 파운드. 전쟁 전 대비 두배나 늘어난 수치였습니다. 국가 예산 3분의 1 수준인 800만 파운드가 이자를 갚는 데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EPL 대신 NBA를 보겠소.” 미국 독립전쟁 중 요크타운 포위전을 묘사한 그림.
재무에 주력한 윌리엄 피트
재무 전문가로서 피트가 조세 제도 개편부터 나선 이유였습니다. 다양한 세목을 만들고, 차·와인·주류와 같은 관세는 낮췄습니다. 관세가 높을수록 밀수가 늘어나는 걸 잘 알아서였습니다. 오히려 무역 관련 세금을 낮춤으로써 상인들이 정직하게 돈을 내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었습니다.
“무역을 해야 K팝을 들을 수 있단 말이오.” 윌리엄 피트가 재건한 상무위원회 1808년 그림.
피트가 취임한 후 관세가 200만 파운드가 증가한 배경이었습니다. 마침 미국과의 전쟁도 끝나면서 신대륙과의 무역이 다시 활발해지기도 했습니다. 살림꾼 피트의 체제 아래서 빚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1793년이면 빚은 1억 7000만파운드로 감소합니다. 10년만에 빚을 30%나 줄인 것이었지요.

미국을 잃었지만 피트의 지도로 영국은 다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캐나다·호주와 같은 제2의 식민지를 건설하면서였습니다. 식물학자 조셉 뱅크스가 호주를, 조지 밴쿠버가 이끄는 해군 원정대가 캐나다에서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식민지의 피와 땀을 먹으면서 제국으로 자라납니다.

“어디서 아웃백 빵 냄새가 나는군.” 호주를 찾은 제임스 쿡.
군주제의 몰락과 영국의 위기
‘혼돈의 18세기’.

세계의 작동엔진은 질서보다는 대혼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터지면서 부르봉 왕가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시민들이 군주의 목을 잘라 버린 대변혁.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이념이 나라를 새로 세웁니다. 프랑스 공화국이었습니다.

유럽의 모든 왕조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혁명의 파고가 자신들의 궁전을 휩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가 군사를 집결해 프랑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군주제는 거부한다. ” 1792년 8월 튀일리 궁의 습격.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나라의 중심이 되어야 할 조지3세는 심각한 정신병을 앓습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수 시간 동안 뱉어대더니 기절해 버립니다. 제국을 통치하긴커녕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은 상태였지요.

섭정(왕의 대리인) 후보자로 물망에 오른 왕세자인 아들 조지 4세 역시 술과 여자에 빠진 혼군에 가까웠습니다. 윌리엄 피트의 어깨가 무거워진 상황.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랑스 혁명군이 1793년 영국에 선전포고를 단행합니다. “경제적·재정적 안정”을 우선하던 피트에게도 더 이상의 선택권은 없었습니다. 영국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막대한 재정 적자를 초래할 것입니다. ” 의회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관해 발표하는 윌리엄 피트.
억압자가 된 윌리엄 피트
“선동가들을 모두 잡아들인다.”

윌리엄 피트는 채찍을 든 지도자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혁명 정신에 감화된 글쟁이들을 억압했기 때문입니다. 정치 이론가 토마스 페인이 ‘인권’(Rights of Man)을 발간하자 그를 재판에 넘긴 것도 윌리엄 피트 정부였습니다. “정부가 국민의 자연권을 보호하지 않을 때, 대중적 정치 혁명이 허용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옹호하는 저작이었지요. 현재의 관점에서는 폭력과 억압 행위로 비치지만, 국가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당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많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시민의 권리를 지켜줄 의무가 있는 것이오.” 토마스 페인.
선전·선동에 대한 억압적 법률이 잇따라 제정된 것도 그의 주도로 이뤄졌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노스앵거 애비’에는 곳곳에 배치된 정부 끄나풀들이 어떻게 시민의 급진주의적 생각을 억압하는지 묘사되어 있을 정도였지요.

윌리엄 피트는 자유를 억압하는 지도자였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불가피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습니다(오늘날 누군가와는 달리).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윌리엄 피트의 시대를 두고 ‘공포 통치’와 ‘대중적 보수주의 운동’으로 해석이 갈립니다.

억압적 통치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중적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윌리엄 피트만이 국가를 안정화할 인물이었다는 걸 대중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민 여러분, 전쟁 앞에서 중요한 건 질서와 단합입니다.‘
나폴레옹 전쟁의 위기를 구한 건 한 세금이었다
“시민 여러분, 조국을 위해 세금을 내주십시오.”

전쟁은 가장 값비싼 정치행위입니다. 미국독립전쟁 이후 안정화되던 재정 상황도 악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장기화하고 있어서였습니다. 유력 금융 가문에서 돈을 조달하고(이때 영국정부에 돈을 댄 가문이 그 유명한 로스차일드였습니다), 세목을 늘리고 세금을 인상했지만 한계는 분명합니다.

“PSG가 맨시티보다 강하다네.” 이탈리아 베니스 인근 리볼리 전투에서 나폴레옹.
재정전문가 윌리엄 피트는 번쩍이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소득세’ 도입이었습니다. 영국에 사는 시민들과 거주민 모두에 부과하는 돈이었습니다. 연 소득 60파운드 이상 되는 모든 이들에게 부과하는 ‘큰 그물’과도 같은 세금.

우려도 적지 않습니다. 영국인들이 누구입니까. 비상식적인 납세를 요구하는 존 왕에게 맞서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마그나 카르타’(대헌장)까지 쟁취한 이들이 아닙니까. 피트 정부가 대국민적 반발을 우려했지만, 그들의 애국심은 생각보다 숭고했습니다. 소득세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냈었기 때문입니다.

1215년 마그나 카르타. 왕이 자의적으로 세금을 거둘 수 없음을 명시했다.
광장에는 애국의 물결과 함께 소득세를 내려는 시민들이 넘쳐났습니다. 1799년 처음 소득세가 도입된 후 몇 년이 지나자 납세자 수는 세 배 이상 늘어납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고 영국과의 일전을 앞둔 때였습니다.

소득세를 기반으로 영국 해군은 1만 5000명(1793년)에서 13만 3000명(1801년)으로 늘어납니다. 산업혁명으로 탄탄한 기반을 갖춘 영국의 민간기업들도 국가를 위해 헌신합니다. 프랑스는 강한 군대를 갖추고 있었지만, 영국은 그보다 더 강력한 시민이 있었습니다. 튼튼한 조세 시스템 역시 대영제국을 지키는 강력한 대포였습니다. 나폴레옹이 경제적 제재인 ‘대륙봉쇄령’으로도 영국을 무너뜨리지 못한 배경입니다.

“자, 이제 EPL 대신 리그앙이나 분데스리가를 보시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으로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베를린에 입성하는 나폴레옹. 1806년.
튼튼한 재정이 승리의 기반으로
“대영제국의 승리입니다.”

1805년 제독 호레이쇼 넬슨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나폴레옹 군에게 패배를 안겼습니다. 넬슨의 목숨과 바꾼 승리였습니다. 넬슨은 갑판 위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이듬해 또 다른 거인이 눈을 감았습니다. 총리 윌리엄 피트였습니다. 고작 46세의 나이. 소화성 궤양이 그를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아내도, 아이도 없었습니다. 그가 마음에 둔 건 오직 조국의 재정과 미래였습니다.

“나는 죽었으나 길이 기억될 것이다.” 영국 런던 길드홀에 있는 윌리엄 피트 기념상. 건너편에는 그의 아버지 상도 세워져 있다. [사진출처=Stephencdickson]
동시대 귀족 길버트 엘리엇은 평했습니다. “그는 흔들리는 세계를 떠받치는 거인 ‘아틀라스’였다.” 24살 ‘학생’으로 조롱받던 꼬마 총리는 어느덧 영국을 지킨 거인이 되어 있던 셈입니다.

거인의 죽음 후 9년 뒤, 1815년. 영국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연합군이 대규모 승리를 거뒀습니다. 워털루 전투였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의 끝을 의미했습니다. 영국인들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남자의 이름을. 윌리엄 피트였습니다.

호레이쇼 넬슨·아서 웰즐리와 같은 걸출한 장군들 뒤에는 주판을 두들기며 씨름한 영웅 윌리엄 피트가 있었습니다. 영국 의회는 승전을 기념하면서 ‘소득세’의 폐지를 공식화합니다. 피트를 추모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습니다.

“대영제국 만세, EPL 만세.” 1815년 워털루 전투는 팍스 브리태니카(영국에 의한 평화)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소득세, 현대 국가의 거대한 엔진이 되다
1842년 재정 위기 속에서 영국 의회는 소득세를 재도입합니다. 폐지론이 불붙었지만 1853년 크림전쟁이 일어나면서 소득세는 영구히 안착합니다. 소득세만큼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아서였습니다.

당시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소득세는 ‘국가 재정의 거대한 엔진’”이라고 시민을 설득했습니다. 영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세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과장된 이야기도 아니겠지요.

“나폴레옹에게 이길 수 있었던 건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일한 시민들의 공입니다. ”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세워진 윌리엄 피트 동상. [사진출처=Ad Meskens]
오늘날에도 소득세는 국가를 움직이는 거대한 엔진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선진국에서 소득세가 총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0%에 달합니다. 윌리엄 피트의 유산이 결코 영국만의 것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눈부시게 맑은 겨울날, 광화문 광장을 걸으며 생각합니다. 자고 있는 가족을 뒤로하고 새벽같이 일터에 나간 가장이 흘린 땀의 가치를, 혼란한 정치 속에서도 묵묵히 일터를 지킨 사람들의 노고를, 폐허에서 일궈낸 아름다운 도시의 기반을 닦은 모든 시민의 숭고함을. 200년 전 영국이나, 지금의 대한민국이나, 언제나 나라를 지탱한 건 가족을 건사하겠다는 평범한 시민들이었습니다.

위대한 총리이자 재무장관 윌리엄 피트.
<네줄요약>

ㅇ18세기 후반 대영제국은 미국독립과 프랑스혁명전쟁으로 정치적, 재무적 대위기를 맞았다.

ㅇ이 때 혜성처럼 등장한 정치인이 20대 윌리엄 피트였다.

ㅇ재무 전문가인 그는 소득세를 처음으로 도입해 영국을 정치적으로 재정적으로 안정화했다.

ㅇ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도입한 ‘국가 재정의 엔진’ 소득세가 꼽힌다.

<참고문헌>

ㅇ페트릭 칼 오브라이언, 나폴레옹 전쟁에 대항한 영국의 세금제도 1793-1815, 런던정치경제대학교, 2007년

ㅇ마이클 킨·조엘 슬램로드, 세금의 흑역사, 세종서적,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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