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이 남자 위해 세금 더 내겠다”···미스터리한 납세행렬의 이유[히코노미]
[히코노미-12] “세금은 우리가 잘한 것에 대한 벌금이다(A tax is a fine for doing well).”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명언(?)’입니다. 월급날이 되면 이 격언을 떠올립니다. 이 땅의 근로자라면 한 달에 한 번쯤은 누구나 반국가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평소에는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정부가 소득세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빼어가기 때문입니다. 유리 지갑 월급쟁이들의 마음속에는 작지만 옹골찬 분노가 들끓습니다. “이렇게나 많이 떼어가다니.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특히 요즘같이 정치가 모멸감만 주는 상황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때 나라를 이끈 남자가 영국 총리이자 재무장관이었던 윌리엄 피트였습니다. 국왕 조지 3세는 정신병으로 미쳐있었고, 아들이자 섭정인 조지 4세는 술과 섹스에 빠져있던 상황. 최고 지도자들의 형편없는 통치 속에서, 결혼도 안 한 채 국가의 명운을 바로 잡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 때의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 어쩐지 남의 나라 상황으로만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정치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일이었고, 윌리엄 피트는 여기에 탁월함이 있었습니다. 순발력을 겸비한 재치, 지식으로 무장한 화술이 사람들을 끌어당겨서였습니다. 후에 정치인이자 노예무역 폐지를 이끈 그의 동지 윌리엄 윌버포스는 적었습니다. “(윌리엄 피트의)익살스런 재치는 누구든 즐겁게 하면서도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피트도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정치인을 꿈꿨습니다. 1781년 1월 그가 마침내 하원에 입성합니다. 첫 의회 연설에서 어찌나 달변을 토해댔는지. 기라성같은 정치인조차 윌리엄 피트라는 이름을 각인합니다. 그의 나이 고작 22살이었을 때였습니다.
우려도 이해가 안되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녹록지 않은 환경이 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으로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를 완전히 잃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오랜 전쟁 탓에 국가 부채는 거대한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피트가 재임할 당시 국가 부채는 2억 4300만 파운드. 전쟁 전 대비 두배나 늘어난 수치였습니다. 국가 예산 3분의 1 수준인 800만 파운드가 이자를 갚는 데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미국을 잃었지만 피트의 지도로 영국은 다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캐나다·호주와 같은 제2의 식민지를 건설하면서였습니다. 식물학자 조셉 뱅크스가 호주를, 조지 밴쿠버가 이끄는 해군 원정대가 캐나다에서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식민지의 피와 땀을 먹으면서 제국으로 자라납니다.
세계의 작동엔진은 질서보다는 대혼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터지면서 부르봉 왕가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시민들이 군주의 목을 잘라 버린 대변혁.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이념이 나라를 새로 세웁니다. 프랑스 공화국이었습니다.
유럽의 모든 왕조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혁명의 파고가 자신들의 궁전을 휩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가 군사를 집결해 프랑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섭정(왕의 대리인) 후보자로 물망에 오른 왕세자인 아들 조지 4세 역시 술과 여자에 빠진 혼군에 가까웠습니다. 윌리엄 피트의 어깨가 무거워진 상황.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랑스 혁명군이 1793년 영국에 선전포고를 단행합니다. “경제적·재정적 안정”을 우선하던 피트에게도 더 이상의 선택권은 없었습니다. 영국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습니다.
윌리엄 피트는 채찍을 든 지도자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혁명 정신에 감화된 글쟁이들을 억압했기 때문입니다. 정치 이론가 토마스 페인이 ‘인권’(Rights of Man)을 발간하자 그를 재판에 넘긴 것도 윌리엄 피트 정부였습니다. “정부가 국민의 자연권을 보호하지 않을 때, 대중적 정치 혁명이 허용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옹호하는 저작이었지요. 현재의 관점에서는 폭력과 억압 행위로 비치지만, 국가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당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많지 않았습니다.
윌리엄 피트는 자유를 억압하는 지도자였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불가피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습니다(오늘날 누군가와는 달리).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윌리엄 피트의 시대를 두고 ‘공포 통치’와 ‘대중적 보수주의 운동’으로 해석이 갈립니다.
억압적 통치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중적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윌리엄 피트만이 국가를 안정화할 인물이었다는 걸 대중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가장 값비싼 정치행위입니다. 미국독립전쟁 이후 안정화되던 재정 상황도 악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장기화하고 있어서였습니다. 유력 금융 가문에서 돈을 조달하고(이때 영국정부에 돈을 댄 가문이 그 유명한 로스차일드였습니다), 세목을 늘리고 세금을 인상했지만 한계는 분명합니다.
우려도 적지 않습니다. 영국인들이 누구입니까. 비상식적인 납세를 요구하는 존 왕에게 맞서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마그나 카르타’(대헌장)까지 쟁취한 이들이 아닙니까. 피트 정부가 대국민적 반발을 우려했지만, 그들의 애국심은 생각보다 숭고했습니다. 소득세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냈었기 때문입니다.
소득세를 기반으로 영국 해군은 1만 5000명(1793년)에서 13만 3000명(1801년)으로 늘어납니다. 산업혁명으로 탄탄한 기반을 갖춘 영국의 민간기업들도 국가를 위해 헌신합니다. 프랑스는 강한 군대를 갖추고 있었지만, 영국은 그보다 더 강력한 시민이 있었습니다. 튼튼한 조세 시스템 역시 대영제국을 지키는 강력한 대포였습니다. 나폴레옹이 경제적 제재인 ‘대륙봉쇄령’으로도 영국을 무너뜨리지 못한 배경입니다.
1805년 제독 호레이쇼 넬슨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나폴레옹 군에게 패배를 안겼습니다. 넬슨의 목숨과 바꾼 승리였습니다. 넬슨은 갑판 위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이듬해 또 다른 거인이 눈을 감았습니다. 총리 윌리엄 피트였습니다. 고작 46세의 나이. 소화성 궤양이 그를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아내도, 아이도 없었습니다. 그가 마음에 둔 건 오직 조국의 재정과 미래였습니다.
거인의 죽음 후 9년 뒤, 1815년. 영국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연합군이 대규모 승리를 거뒀습니다. 워털루 전투였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의 끝을 의미했습니다. 영국인들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남자의 이름을. 윌리엄 피트였습니다.
호레이쇼 넬슨·아서 웰즐리와 같은 걸출한 장군들 뒤에는 주판을 두들기며 씨름한 영웅 윌리엄 피트가 있었습니다. 영국 의회는 승전을 기념하면서 ‘소득세’의 폐지를 공식화합니다. 피트를 추모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습니다.
당시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소득세는 ‘국가 재정의 거대한 엔진’”이라고 시민을 설득했습니다. 영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세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과장된 이야기도 아니겠지요.
눈부시게 맑은 겨울날, 광화문 광장을 걸으며 생각합니다. 자고 있는 가족을 뒤로하고 새벽같이 일터에 나간 가장이 흘린 땀의 가치를, 혼란한 정치 속에서도 묵묵히 일터를 지킨 사람들의 노고를, 폐허에서 일궈낸 아름다운 도시의 기반을 닦은 모든 시민의 숭고함을. 200년 전 영국이나, 지금의 대한민국이나, 언제나 나라를 지탱한 건 가족을 건사하겠다는 평범한 시민들이었습니다.
ㅇ18세기 후반 대영제국은 미국독립과 프랑스혁명전쟁으로 정치적, 재무적 대위기를 맞았다.
ㅇ이 때 혜성처럼 등장한 정치인이 20대 윌리엄 피트였다.
ㅇ재무 전문가인 그는 소득세를 처음으로 도입해 영국을 정치적으로 재정적으로 안정화했다.
ㅇ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도입한 ‘국가 재정의 엔진’ 소득세가 꼽힌다.
<참고문헌>
ㅇ페트릭 칼 오브라이언, 나폴레옹 전쟁에 대항한 영국의 세금제도 1793-1815, 런던정치경제대학교, 2007년
ㅇ마이클 킨·조엘 슬램로드, 세금의 흑역사, 세종서적,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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