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도박 기획자의 참회 “제가 싼 똥, 제가 치워야죠”

이미지 기자 2025. 1. 1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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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청소년 도박과 싸우는 조호연 도박없는학교장

딜러가 빨간 카드, 검은 카드를 테이블 위에 깐다. 동그란 칩을 클릭하니 베팅이 된다. 어느 순간 ‘이기셨습니다’라는 자막과 함께 화려한 팝업 창이 뜨고 음악이 나온다. 유튜브 라이브로 진행되는 온라인 도박판. “올인, 올인” “얘들아 이거 재밌다”는 댓글이 달린다.

경찰이 지난해 10월까지 13개월 동안 사이버 도박 특별 단속을 펼쳐 검거한 청소년은 4715명. 전체의 47.3%에 달한다. 사이버 도박으로 입건된 사람 중 최연소는 9세. 청소년들은 ‘바카라’라는 카드 게임을 주로 했다. 도박 총액은 37억원, 1인당 평균 78만원이다. 16세 청소년이 최고 1억9000만원의 판돈을 걸고 도박한 사례도 적발됐다. 아홉 부처가 참여하는 범정부 대응팀을 만들고 청소년 도박 근절 캠페인을 펼치고 있지만, 온라인 도박으로 검거된 청소년은 전년에 비해 28배나 늘었다.

비영리 단체 ‘도박없는학교’를 이끄는 조호연 교장은 온라인 도박 사이트 기획자 출신이다. 먹고살려고 만든 온라인 도박 시장이 커지며 학생들까지 피해를 보자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조호연(51) 도박없는학교 교장은 청소년 온라인 도박 근절을 위해 불법 온라인 도박에 사용되는 계좌를 고발해 왔다. 지난 2년간 대포 통장에 쓰인 계좌 1600개, 가상 계좌 40만개를 고발해 없앴다. 학생들의 도박 예방 또는 치유에 골몰하는 정부 정책 방향과는 사뭇 다른 접근법이다.

지난 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한 고깃집 지하 공간에서 그를 만났다. 불판 테이블이 쌓여 있었고, 벽에는 ‘불법 도박 구조’ ‘불법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근절’ 같은 문구가 보였다. 생업까지 던지고 이 일에 뛰어들었다는 조호연 교장은 자신의 활동을 “내가 싼 똥을 내가 치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간 도박

–도박없는학교는 뭘 하는 곳인가요.

“청소년을 도박에 빠뜨리는 온라인 도박 사이트를 없애고, 그들의 계좌를 폭파시키는 일을 하는 비영리단체예요. 최근에는 불법 OTT 사이트를 폐쇄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거기서 도박 영상과 웹툰을 보고, 온라인 도박 사이트에 손을 대거든요.”

경찰서에 불법 온라인 도박 사이트와 대포 통장 명의자, 불법 거래 통장을 묵인한 은행을 고발하고 찍은 사진. /조호연 제공

–정부는 도박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

“청소년 도박 예방·근절 교육은 효과가 미미해요. 당장 그만둬야 할 짓입니다. 잘 몰랐던 애들마저 도박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위험한 일이고요.”

청소년 도박이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는데 예방 캠페인이 헛수고라고?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학생들이 불량 식품에 관심 갖는 건 당연한데 먹지 말라고만 하면 안 먹나요? 불량 식품 파는 사람들을 때려잡아야죠. 정부는 핵심 문제에는 손을 놓고, 변두리에서 보여주기식 캠페인만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정말 불법 도박 조직을 운영하나요?

“일진으로 불리는 학생들이 주변 친구들에게 도박을 전파하고, 도박 자금을 빌려주는 총판 노릇을 합니다. 매주 2배로 늘어나는 원금을 갚지 못한 아이들에게 원금 상환을 빌미로 도박 사이트를 홍보하게 만들거나 다른 친구를 끌어오게 하죠.”

–일부 불량 학생의 일탈 아닙니까.

“모범생이든 왕따든 가리지 않습니다. 주로 일진들이 총판 역할을 하죠. 돈을 펑펑 쓰며 대장 노릇 하는 맛에 주변 학생들을 도박의 늪으로 끌고 갑니다. 10대 학생 계좌에 약 2억원이 있는 것도 확인했어요.”

조 교장은 청소년 교육 자격증 소유자도, 청소년 활동 경력이 있는 사회활동가도 아니다. 그가 청소년 도박 근절 활동에 나선 계기는 단순했다. 친구가 “아들이 도박에 빠져 소년원에 가게 됐다”며 “내 아들 좀 만나보라”고 부탁한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려고 아들과 대화를 시도하면 몸싸움이 일어날 정도로 갈등만 심화된다고 했다. 그는 “주변 친구들을 모아 오면 삼촌이 맛있는 걸 사주겠다”며 친구 아들 무리를 불러 모았다.

◇아차, 내 잘못이구나

어린 학생들인데 도박비를 벌기 위해 물건 훔치고, 불법 도박하다 걸려 이미 전과가 있었다. 어쩌다 도박에 빠졌는지 묻다 보니 기가 막혔다. 학교 안에 불법 온라인 도박 조직이 있었다. “그때 ‘아차,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2022년, 도박없는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아차 싶었다니요?

“제가 젊을 때 온라인 도박 사이트의 기획자였습니다. 컴퓨터학과 학생들을 모아 게임을 만들어 납품하고, 중국에 거주하며 서버 임대와 IP 판매까지 담당했지요. 먹고살기 급급해 제가 만든 온라인 도박 시장에 지금은 청소년까지 빠져들고, 심지어 목숨을 끊는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튼주말]-조호연 도박없는 학교 원장-임화승 영상미디어기자[아무튼주말 게재전 사용금지]

젊은 시절 그는 도박장에 게임기를 납품하는 세일즈맨이었다. 수도권 지역에서 인기가 시들해진 게임기를 지방 게임장에 내다 팔며 돈을 벌었다. 2004년부터 사행성 도박 게임 ‘바다이야기’가 전국을 강타하자 투자를 받아 비슷한 형태의 게임기를 제작했다. 하지만 ‘바다이야기’로 재산을 탕진해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정부가 2006년 법안을 만들어 사행성 게임 규제에 나섰다. 투자받은 돈 수십억 원을 잃을 상황이 되자 마음이 급해진 그는 규제가 미치지 못하는 온라인 시장에 도박 사이트를 개설했다. “도박 시장 구조를 잘 아는 당사자라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제가 싼 똥, 제가 치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청소년들까지 도박에 빠졌나요?

“온라인 도박 사이트들이 처음엔 불법 마케팅 업체를 통해 홍보를 했어요. 그런데 중학생들은 손이 빠르잖아요. ‘여기저기 링크 좀 뿌려주면 현금화할 수 있는 포인트를 줄게’ 하면 싼값에 홍보가 돼요. 그렇게 받은 포인트로 도박을 하는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더 많은 포인트를 얻기 위해 주변 친구를 가입시키기 시작한 거죠. 도박 사이트가 급증하면서 이런 마케팅 방식이 급물살을 탔습니다.”

–청소년은 쉽게 도박에 중독됩니까.

“성인들도 도박 중독이 있잖아요. 학생들 실제 사례를 보면 2~3개월 하다가 금방 싫증 내는 경우가 많아요. 처음 돈 딸 때나 재밌지, 잃기 시작하면 재미없거든요. 그 과정에서 학생 총판에게 돈을 빌리고, 빚 독촉이 학교 폭력으로 변질되고, 피해자가 다시 주변 친구들을 도박에 끌어들이는 악순환 구조가 문제인 겁니다.”

그는 현재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김모군 이야기를 꺼냈다. 작년 초, 김군은 온라인 도박을 하기 위해 같은 반 친구에게 돈을 빌렸다. 돈을 따서 갚을 계획이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일주일에 50%씩 붙는 이자 때문에 빚은 금방 500만원을 넘어섰다. 돈을 빌려준 친구는 얼굴을 바꿔 김군의 아버지가 교사로 근무하는 학교를 찾아가겠다고 협박했다. 전학하고도 계속되는 빚 독촉에 시달리던 김군은 자해를 8차례나 시도했다.

그래픽=이진영

–도박에 빠진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주변에 빌린 돈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라면 부모가 돈을 갚아주고, 총판 같은 학생들과 분리해 줘야 해요. 엄마가 뒷목 잡고 쓰러지고, 아버지가 두들겨 패면 더 엇나갑니다. 자기 때문에 가정이 망가졌다는 죄책감이 들게 하거나, 부모가 쉽게 해결해 준다는 신호를 주면 절대 안 되고요. 부모가 갚아준 도박 빚은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직접 벌충하게 해야 책임감을 느낍니다.”

–교장님은 도박에 빠진 적 없나요?

“술 좋아하는 사람이 술집 사장 하면 안 되듯이, 도박하는 사람이 도박 사이트 운영하면 사업 자금을 건드리게 되고 결국 망합니다. 재미도 못 느꼈고요.”

[아무튼주말]-조호연 도박없는 학교 원장-임화승 영상미디어기자[아무튼주말 게재전 사용금지]

◇더 재밌는 세상으로 나오길

작년 여름까지 복권방을 운영했다는 그는 도박없는학교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뜻을 함께하는 법무법인과 학부모들의 후원금으로 운영한다. 학부모 200여 명이 불법 계좌 적발에 동참하고 있다. 학생들의 제보도 받는다.

–온라인 도박 시장을 아예 없애겠다는 건가요?

“규모 200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온라인 도박 시장이 커진 건 도박을 합법화하지 않은 정부 탓도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자기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성인들은 합법적으로 도박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관리하는 게 나아요. 하지만 청소년들이 도박에 빠지는 건 막아야죠. 청소년을 가입시킨 사이트는 폭파하고, 계좌를 중지시켜 수입을 못 찾게 만들면 ‘청소년은 받으면 안 되겠구나’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최근에 온라인 도박 사이트 가입 절차가 복잡해졌어요. 성인 인증을 하라는 요구가 많아진 게 저희 활동의 결과예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운영 중인 도박 사이트는 2500여 개. 청소년이 피해를 봤다는 도박 사이트와 계좌가 발견되면 조 교장이 은행권에 신고해 해당 계좌를 동결하거나 경찰에 고발해 사이트를 비활성화한다. 올해 목표는 대규모 불법 OTT 사이트를 폐쇄하는 것이다. “교육부 차원에서 학교에서 도박하다 걸린 아이들에게 받은 정보를 전달만 해줘도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 같아요.”

–최종 목표가 있다면.

“지역마다 학원 협회가 있는데, 동참해주는 학원이 있다면 도박에 중독된 학생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강의를 제공하도록 제휴를 맺을 예정입니다. 샌드백도 치고, 피아노도 배우게요. 나중엔 도박 문제를 겪는 학생들을 모은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 하는 도박보다 재밌는 게 많다는 걸 알려줘야죠.”

[아무튼주말]-조호연 도박없는 학교 원장-임화승 영상미디어기자[아무튼주말 게재전 사용금지]

허름한 그의 사무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벽에 붙어 있는 사이트 이름이 기사에 나가도 되는지 물었다. 티비몬, 조이티비 등 그가 올해 폐쇄하겠다고 결심한 ‘타격 지점’들이었다. 그가 말했다. “꼭 내보내 주세요. 청소년들 도박에 빠지게 하는 너희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 두고 보라고.” 지하실에 한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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