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나온 테라 권도형...몸엔 쇠사슬, 판사엔 “굿모닝” 인사
노란 수트 입고 양손에 주황색 수갑
기자들 질문엔 고개 숙이고 묵묵부답
8일 오전 10시 30분 미국 뉴욕 남부연방법원 1305호, 출입문이 열리고 짧은 머리에 노란색 점프 수트(상·하의가 하나로 붙은 옷)를 입은 남성이 들어왔다. 그의 양손에는 주황색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수갑과 이어진 굵은 쇠사슬은 몸통을 서너 바퀴 둘러 그를 조이고 있었다. 직접 눈으로 본 가상 화폐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핵심 인물인 권도형(34) 전 테라폼랩스 대표의 모습은 마치 막 호송된 강력범과 비슷했다. 외신에서 보던 모습보다 더 말랐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날 그에 대한 첫 본(本) 재판이 열렸다. 그는 가상 화폐 ‘테라’와 관련한 사기로 400억 달러(약 58조원) 이상의 투자 손실을 초래한 혐의 등을 받는다. 미국 검찰이 그에 대해 적용한 혐의는 총 9가지, 최장 130년형까지 나올 수도 있다. 2022년 4월 한국을 떠나 싱가포르로 도주한 권씨는 이후 도피 생활을 이어가다 2023년 3월 몬테네그로에서 위조 여권을 소지한 혐의로 체포됐고, 지난해 12월 31일 미국으로 범죄인 송환 됐다. 지난 2일 혐의 인정 여부를 묻는 5분짜리 간략한 재판이 열렸고, 이날 그에 대한 정식 재판이 시작됐다.
검은색 바지와 회색 상의를 입은 두 명의 건장한 방호원과 법정에 들어선 권씨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들어 방청석을 바라봤다. 손과 몸통에서 수갑과 쇠사슬이 풀리자 미리 법정에 와 있던 3명의 변호인이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권씨를 기소한 뉴욕 남부연방지검 소속 검사 3명은 권씨를 흘끗 쳐다봤다. 권씨를 기소한 남부지검은 ‘월가의 저승사자’라고 불리는 금융범죄 전문가들이다. 재판장이 들어오기 전 권씨는 말없이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양옆에 앉은 변호인들은 서류를 펼치고 간간이 그에게 귓속말했다.
잠시 뒤 이 사건을 맡은 뉴욕 남부연방지법 폴 A. 엥겔마이어판사가 들어왔다. 방청석에는 외신 기자를 포함해 20여명이 있었다. 이번 사태 피해자로 보이는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권씨와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방호원 두 명이 앉았다. 이날 오전 9시 같은 장소에서 열린 다른 사건 재판에서는 방호원이 없었다. 방호원들은 방청석에서 사람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엥겔마이어 판사는 모두 착석했는지를 확인하고 권씨에게 인사를 건넸고, 권씨도 마이크에 대고 “굿모닝”이라고 답했다.
이날 재판에서 검찰 측은 이미 제출한 79페이지짜리 공소장을 축약해 판사에게 설명했다. 제러드 레노우 검사는 “이 사건은 40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초래한 대규모 사기에 관한 것”이라면서 “권씨는 테라 블록체인이 가상화폐 세계에서 전체 생태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홍보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권씨는 테라·루나가 안정적이라고 광고했지만 작동하지 않았고 조작을 해야만 했다”면서 “그는 회사의 모든 지분을 통제해 조작했다”고 밝혔다. 권씨 변호인은 “그는 스테이블 코인을 프로그래밍을 했고 정부는 허상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알고리즘이 있었다”며 반박했다. 권씨는 이날 재판에서 발언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차례 옆에 앉은 변호인에게 귓속말하며 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변호사가 건네준 자료를 읽거나, 검사가 발언할 때는 쳐다보기도 했다.
재판은 방대한 자료와 한국어 번역 문제로 예상보다 더 오래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검찰은 전날 법원에 권씨의 이메일 계정, X(옛 트위터) 계정, 4대의 휴대전화에 대한 수색 영장을 청구했다. 검찰과 변호인은 증거개시(피고인이 공소사실과 관련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료를 받아 보는 것) 과정에서 약 6테라바이트 분량의 데이터가 만들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이를 검토하는데 물리적인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검찰은 몬테네그로에서 잠겨져 있는 권씨 휴대전화 4대를 함께 넘겨받았기 때문에 이를 해제해 증거를 파악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추출한 자료에는 한국어로 된 것도 상당수 있기 때문에 번역하는 데 추가로 시간이 든다는 점도 있다. 이 때문에 모든 절차가 끝난 뒤 집중 심리를 하는 재판은 내년 1월이 될 것으로 법원은 보고 있다. 엥겔마이어 판사는 첫 기일에 재판 시작일을 1년 넘게 연기한 것에 대해 “내 경력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라면서 “재판을 앞당기기 원하는지 피고인에게 물어봐 달라”고 했다.
이날 재판은 약 2시간 정도 진행된 이날 오후 12시 30분쯤 끝났다. 재판이 끝나고 권씨는 다시 손목에 수갑을 차고 몸통에 쇠사슬을 감았다. 법정 밖 엘리베이터에 서 있던 권씨는 ‘여전히 무죄라고 생각하느냐’, ‘한국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취재진 질문에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법원은 오는 3월 6일 증거개시 등 진행 상황을 논의하기 위한 협의를 갖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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