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도 때로는 느려야…저널리즘의 복잡한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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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과 시간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영어에서 뉴스라는 단어가 '새로운 일들'로 풀이되듯 언론의 취재 관행은 기사를 최대한 빨리 전달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언론계에서는 주요 인사들의 부고 기사를 미리 취재하는 관행이 있는데, 은어로 이를 '관을 짜둔다'고 한다.
직접 겪은 일이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게 기억의 본질인데, 이럴 때 언론은 기념일을 소환하며 사회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할지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잣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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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과 시간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영어에서 뉴스라는 단어가 ‘새로운 일들’로 풀이되듯 언론의 취재 관행은 기사를 최대한 빨리 전달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특히 미디어 기술의 발달은 언론을 취재와 동시에 보도하고 끊임없이 업데이트해야 하는 ‘속도의 노예’로 만들었다.
언뜻 보면 언론이 가장 중요시하는 시간은 ‘가까운 과거’로 보인다. 현재를 제대로 취재하기는 어렵고, 먼 과거는 역사가들의 영역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펜실베이니아대 바비 젤리저 교수는 “저널리즘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선형적 시간으로 나눌 수 없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시간의 층위들이 존재한다”며 언론의 ‘복잡한 시간’(complex time)을 이야기한다.
기사를 쓰는 것은 과거를 끊임없이 소환하는 행위다. 과거 사례를 떠올리며 뉴스 가치를 판단하고, 비교와 대조를 통해 상황의 맥락을 설명하며 독자의 이해를 도모한다. 제주항공 참사를 취재하는 언론은 괌 대한항공 사고와 세월호를 기억하며 현장에서 무엇을 취재하고 어떤 실수를 피해야 할지 가늠한다. 유신과 군사정권, 전두환과 박근혜에 대한 집단 기억 없이 계엄과 탄핵 보도는 불가능하다.
과거에 빗대 미래를 준비하는 일도 언론의 몫이다. 언론계에서는 주요 인사들의 부고 기사를 미리 취재하는 관행이 있는데, 은어로 이를 ‘관을 짜둔다’고 한다. 지난해 말 타계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다룬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의 부고 기사에는 수십년 전 기사 초고를 작성했던, 지금은 타계한 언론인들의 바이라인이 대거 올랐다.
심지어 마감 시간을 맞추기 위해 기사를 상상해 쓰는 경우도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언론은 한국전 승패 시나리오별로 기사를 준비해 놓았다. 경기가 끝나면 바로 인쇄하기 위해서다. 한 스포츠 신문이 한-이탈리아전 패배 뒤 일본 내 한국 동포들의 반응을 상상해 쓴 기사가 그대로 출고된 해프닝도 있었다. 2000~2001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시 남쪽 공동취재단은 상봉자들을 사전 취재해 풀기사 초고를 써 놓았다. 비극적인 가족사에 “눈물이 바다가 되었다” 고 미리 써뒀는데 막상 당사자들은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시간 자체가 기사가 되기도 한다. 언론은 ‘올해의 책’ ‘해방 80주년’ 같은 기획 보도에서 임의적인 숫자에 불과한 시간에 뉴스 가치를 부여한다. 템플대 캐롤린 키치 교수는 이를 ‘기념일 저널리즘’이라고 일컫는다. 직접 겪은 일이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게 기억의 본질인데, 이럴 때 언론은 기념일을 소환하며 사회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할지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잣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언론이 일부러 시간을 끌거나 보도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일본 언론은 나루히토 천황의 세자 시절 약혼 사실을 알고도 황실의 엠바고 요청을 받아들여 1년 가까이 보도하지 않았다. 이번 제주항공 참사를 보도하는 언론이 속보 경쟁과 유족 취재를 자제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기자는 ‘질문하는 자’이지만, 묻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답일 때도 있다.
저널리즘의 복잡한 시간, 즉 언론조차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존재론적인 사명을 지녔다는 깨달음은 속도를 물신화하는 2025년 한국 사회에도 울림을 남긴다. 나는 내 주변 사랑하는 이들이 많이 떠난 1월이면 아프다. 제주와 세월호의 4월, 광주의 5월, 삼풍백화점의 6월, 이태원의 10월, 이제 무안의 12월을 기억하는 이들도 그럴 것이다. 기억하는 몸들 역시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과거는 이를 기념하는 ‘해석 공동체’인 언론을 통해 기록되고 살아남을 것이다.
서수민 |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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