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풀어놓은 '파시즘'과의 속도전
이 글을 쓰는 1월 6일 현재,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은 아직도 관저에 틀어박혀 있다. 경호처는 법원의 체포영장에 맞서 윤석열을 지키며 무장 농성 중이다. 한 마디로, 내란 사태가 한 달을 넘긴 채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폭설에 아랑곳없이 밤샘 시위를 벌이는 한남동 관저 앞 시민들처럼 윤석열 체포와 내란 진압에 전념해야 마땅하다. 무리하게 진단이나 분석을 흉내 냈다가는 쓸데없이 비관 혹은 낙관의 언어를 더하는 꼴이 되기 쉽다. 아마도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탄핵 인용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절박한 현실 앞에서 겸허한 마음가짐을 잃지 않는 쪽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껏 확인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고 토론의 운을 뗄 필요는 있다. 12월 3일에 돌연히 닥친 현실이 우리에게 너무나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이런 물음은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인용 판결이 나오더라도 계속 우리를 무겁게 짓누를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그 답을 조금씩 마련해나가야 한다. 그래야 내란 사태의 다음 국면에 닥칠 또 다른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가설'의 수준과 형태로마나마 감히 몇 가지 의견을 풀어놓는 이유다.
가설1 – 12. 3 친위쿠데타는 한국 사회에 '설익은' 파시즘이라는 유령을 풀어놓았으며, 이 '설익은' 파시즘과 이를 제압하려는 세력들 사이의 속도전이 시작됐다
윤석열 체포, 구속이 늦어지고는 있지만, 그래도 헌법재판소 판결이 대다수의 예상과 다르게 나올 가능성을 크게 잡는 전문가는 없다. 보는 이를 답답하게 만드는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위헌, 위법을 자행한 대통령을 파면하는 절차는 순리대로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앞에 펼쳐진 위험이 헌법재판소 판결만으로 말끔히 가시는 것은 아니다. 12월 3일 밤의 친위쿠데타가 한국 사회에 풀어놓은 유령, 파시즘 때문이다.
그날 밤 우리는 느닷없이 파시즘이 무시무시한 실체를 드러내는 광경을 봤다. '파시즘'은 워낙 논란이 분분한 용어이지만,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그 핵심 특징 중 하나는 기존 민주주의 제도를 미련 없이 파괴한다는 점이다. '극우파' 안에는 실로 다양한 갈래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도 이토록 민주주의를 노골적으로 파괴하는 사조는 드물다. 파시즘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심지어 왕당파조차 의회의 틀 안에서 다른 정파들과 경쟁하고 타협했다. 그러나 파시즘은 다르다. 정당 활동을 비롯한 언론, 결사의 자유를 부정하고, 대의기구를 분쇄한다. 군대가 국회를 공격한 12월 3일 밤의 모습, 이것이 파시즘의 '고전적' 실행이다.
하지만 '고전적' 파시즘과 확연히 다른 점도 있다. 백 년 전에는 제복 입고 거리를 떼 지어 다니며 패싸움을 일삼는 파시스트 대중운동이 어느 정도 무르익고 난 다음에야 기존 민주주의 질서를 짓밟으며 파시스트 체제가 들어섰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중도우파' 이미지를 내세워 선출된 대통령이 돌연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파시즘의 실행자로 나섰다. 고전 파시즘과는 달리 '집권 전 대중운동'에 해당하는 단계가 생략된 것이다. 그래서 12월 3일 밤의 일격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지난 글("조숙한 '파시즘' 윤석열의 내란 앞에 '나는 반성한다'", <프레시안> 2024. 12. 24)에서 나는 이것이 '21세기' 파시즘의 특징일지 모른다고 적었다. '집권 전 대중운동'이 생략됐지만, 전에 없던 요소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극우 유튜브 방송이다. 여기에서는 오프라인 가두 투쟁의 수고를 덜어주는 온라인 공간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부정선거론'이라는 새로운 음모론 또한 중요하다.
'부정선거론'의 위력은 참으로 놀랍다. 오늘날 대한민국 시민의 대의민주주의 경험은 1920-30년대 유럽 시민의 경험보다 훨씬 두텁다. 이런 시민이, 비록 그 일부라도, 파시즘에 동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부정선거론'은 이 어려운 일을 해낸다. 대의민주주의에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대중조차 '부정선거론'에 노출되면 갑자기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불신하게 되고 대의민주주의와는 '다른' 체제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 지금 이 전염병이 한때 윤석열을 지지했던 대중 사이에서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다.
이것이 파시즘의 초고속 성장을 낳은 21세기적 요소라면, 이런 급성장에 기여한 한국 사회의 토착적 요소도 있다. 나는 다른 지면에 발표한 또 다른 글("내란의 뿌리를 뽑으려면", <한겨레> 2024. 12. 20)에서 현 제6공화국 체제에까지 이어지는 제3공화국의 뿌리 깊은 유산이 이러한 토착적 요소라고 지적했다. 5. 16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제3공화국은 산업화, 근대화, 경제성장의 깃발 아래 직선 대통령에게 권력을 극도로 집중시킨 체제였고, 제6공화국 헌법은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의 대통령 간선제만 극복한 채 제3공화국의 '대통령주의'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제6공화국 40여 년 동안 사실상 '민주주의'와 등치된 이 '대통령주의'는 제도와 인적 구성, 상식과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강고하게 이어지고 있다. 윤석열이 몇몇 측근과 함께 오랜 시간에 걸쳐 친위쿠데타를 치밀하게 기획,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대통령 1인의 재량에 내맡겨진 권력의 지대가 드넓기 때문이다. 또한 윤석열이 사법부가 발부한 영장을 가볍게 무시하며 농성전을 펼치는데도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끄는 행정부가 이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대통령이 국가 관료기구 전체와 일체라는 시각이 관료와 국민 모두에게 깊이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헌법을 다시 읽으며 '국회'가 '대통령'보다 먼저 등장한다는 사실에 새삼 주목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직도 상당수는 이러한 '대통령주의'와 민주주의의 간극에 둔감하다.
그래서 헌법재판소 판결이 상식대로 나오더라도 이후 상황을 낙관할 수만은 없다. 일단 12. 3 내란 시도로 한국 사회에 '설익은' 파시즘이 출현하고야 말았고, 이후 한 달 동안 이 '설익은' 파시즘이 한국 사회의 토착적 요소와 21세기의 최첨단 요소를 효과적으로 동원하여 초고속으로 성장할 수 있음이 어느 정도 증명됐다. 헌법재판소 재판 일정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1월 초 현재만 해도 '설익은' 파시즘의 분명한 지지층으로 떠오른 5-10%가 20-30%의 유권자에게까지 영향력을 넓히며 확장세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젠더, 연령, 지역 별로 핵심 지지 집단들이 존재하기에 상당히 안정적인 구심력까지 갖추고 있다.
12. 3 이후 이 문제는 한국 사회의 가장 첨예한 쟁점이자 사회 전체를 가르는 기본 지형이 됐다. 갑자기 강력한 흐름으로 등장한 '설익은' 파시즘과, 이를 제압하여 민주공화국의 기본 질서를 수호하려는 광범하고 다양한 세력들의 대립 구도가 모든 시민의 삶을 규정하는 엄중한 현실로 대두했다.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면 이 '설익은' 파시즘의 추격을 따돌리며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재건할 것인가"라는 치열한 속도 경쟁의 시각에서 모든 정치적 고민을 철저히 다시 사고해야 한다. '사회대개혁'이나 '사회대전환' 같은 사회운동의 오래 된 구호 역시 마찬가지다. 파시즘에 맞선 속도전이라는 차원이 대입되지 않으면, 이제 어떤 이상도, 전략도, 구호도 현실적일 수 없다.
가설2 – 지금 헌법 안의 자유주의적 규범을 진지하게 지키려 하는 것은 민중 세력뿐이며, 대중의 적극적 행동 덕분에 이런 규범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고전 파시즘은 명시적으로 반-자유주의를 표방했다. 노동운동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를 적대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자유주의를 불구대천의 적으로 지목했다. 이 점에서 윤석열의 사례는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다. 정치에 뛰어들면서부터 늘 '자유'를 입에 달고 다녔고, 지금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윤석열이 말하는 '자유주의'가 자유주의의 여러 흐름이나 버전 가운데에서도 '신자유주의'만을 가리킨다는 다소 심오한 논의를 참고할 수 있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 등이 공저한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정기헌 옮김, 원더박스, 2024)는 이 복잡한 맥락을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윤석열이 존경한다고 언급한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의 자유를 늘리기 위해 선배 자유주의자들이 주창한 자유권 중 상당 부분을 기꺼이 무효화하려 했다. 윤석열의 '자유주의'가 이런 부류라고 보면,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국민의 자유권을 박탈'하겠다는 언어도단의 뿌리를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굳이 이런 사상사적 탐구를 경유하지 않더라도 이미 분명한 사실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자유주의의 가장 구체적인 실현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헌법에 규정된 자유주의적 권리들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 구속, 압수, 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않을" 권리(제12조 1)나 "고문을 받지 않을" 권리(제12조 2),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제21조 1)가 그러한 자유권의 대표적 사례이고, 헌법 앞부분에 명시된 '정당 활동의 자유'(제8조)나 '국회', '정부', '법원'이 대등한 국가기구로 서술된 체계 역시 고전 자유주의의 원칙을 구현한다.
윤석열 내란 세력은 이러한 자유주의의 최상의 유산을 폐지하려 했다. 증거로는 비상계엄 포고문 제1호 하나로 충분하다.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첫 항부터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다"는 마지막 항까지 모든 내용이 헌법 안의 자유주의적 원칙에 대한 부정이다.
그럼 지금 한국 사회에서 누가 이러한 원칙의 편에 서 있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가? 물론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원내외 야당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을 뒷받침하는 더 강력한 힘은 내란을 진압하기 위해 거리와 광장에 모이는 시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이를 응원하는 시민으로부터 나온다. 12월 3일 밤에 친위쿠데타에 동원된 장병들이 국회를 공격하길 주저하게 만든 것도, 내란동조정당의 방해에도 2주만에 탄핵안 가결을 밀어붙인 것도, 윤석열 정부의 남은 무리가 위헌, 위법을 저지를 때마다 이들을 포위하며 새로운 출구를 연 것도 모두 시민의 힘이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펼쳐지는 묘한 균열과 대립 구도에 주목해야 한다. 자유주의는 오랫동안 부르주아 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치부돼왔다. 이는 좌파 정치나 노동운동만이 아니라 주류 역사학, 사회과학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명제였다. 그러나 12. 3 이후 한국 사회의 지배 집단 가운데 과연 누가 내란 세력이 공격하는 자유주의의 영혼을 지키려고 나섰는가? 재벌 중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행정부 고위 관료와 사법부 고위층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니, 내란 세력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 형편이다. 자유주의의 오랜 주체로 여겨진 집단들이 헌법 안의 자유주의를 방어하려는 의지나 의사가 없음이 드러났다.
반면에 목숨을 걸고서라도(12. 3 밤에는 확실히 그랬다) 이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것은 재벌, 고위 관료에 비하면 '민중 세력'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시민들이다. 거리와 광장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은 노동계급의 여러 부분이고 신, 구 중간계급의 상당 부분이며 여성이고 젊은 세대이며 다양한 소수자들이다. 그들은 "'형식적', '추상적' 자유가 인민대중의 획득물"(니코스 풀란차스, <국가, 권력, 사회주의>, 박병영 옮김, 백의, 1994. 117쪽)임을 본능적으로 이해하며, 이것이 온전히 보장 받는 민주공화국에서만 더 진일보한 사회적 권리들 또한 실현될 수 있음을 정확히 간파한다. 그래서 한때 자유주의의 담지자로 상정됐던 집단들이 이를 공격하거나 방기하는 와중에 그 마지막 상속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하지만 민중 세력만이 자유주의의 상속자라는 책임을 떠맡았다는 '일방적' 관계만 봐서는 안 된다. 좀 더 '쌍방향적인', 그래서 더 역동적인 관계가 작동하고 있다. 내란을 진압하려고 직접 행동에 나선 시민 덕분에 그간 종이 위 활자로만 존재하던 원칙들이 비로소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통령주의'의 시각에서는 늘 혈세 낭비 기구로나 치부되던 국회가 민주주의의 심장으로서 권위를 되찾았다. '대통령주의'적 국가에서 결코 행정부와 대등한 기관으로는 보이지 않던 사법부가 윤석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국가기구의 엘리트들이 새삼 원칙적 자유주의자로 거듭났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 대중운동 때문이다.
말하자면 '설익은' 파시즘에 맞서 민중 세력이 헌법 안의 자유주의적 원칙(자유권의 철저한 보장,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을 지키는 주체로 나서고, 이런 민중의 직접 행동과 개입을 통해 그간 잠자던 자유주의적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상호 상승 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자유주의 대 인민주의'류의 도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포착할 수 없는 관계이고, '설익은'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희망의 근거다.
윤석열 탄핵과 퇴진 이후에 추구해야 할 정치 대안에 관한 상상 역시 내란 사태 이후의 정세와 동떨어진 다른 어떤 별난 논의가 아니라 지금 이미 작동하는 이 역동적 관계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조기 대선이 됐든 개헌 논의가 됐든 앞으로 닥칠 정치적 계기마다, 대중의 행동과 개입을 통해 활력을 유지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이 실마리가 우리의 앞길을 밝히는 응원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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