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시엔 돈 불려주지만, 위기 땐 송두리째 앗아가
강승준 서울과기대 부총장(경제학 박사)·前 한국은행 감사 2025. 1. 7. 09:01
[‘돈’으로 본 세계사] 경제활동 돕는 금융의 두 얼굴
"일반적으로는 자금의 융통과 화폐의 대차, 구체적으로 대부증권에 의한 자금의 대부나 참가 증권에 의한 자금의 출자를 말한다." (두산백과)
"금전을 융통하는 일을 말한다. 자금을 융통하는 과정에서 통상적으로 이자가 붙는데, 이로 인해 금융을 흔히 일정 기간을 정해 앞으로 있을 원금의 상환과 이자지급에 대해 상대방을 신용하고 자금을 이전하는 과정." (한경 경제용어사전)
이처럼 금융은 화폐를 융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융과 화폐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금융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 금융은 화폐 발명 후에 태동했다. 그렇다고 금융이 화폐의 종속변수인 것만은 아니다. 금융이 화폐를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화폐는 금융에 의해 재창출되고 확대되기 때문이다. 즉 신용 창출이 이뤄지는 것이다. 어쩌면 화폐는 금융에 의해 계속 진화(進化)해 왔는지도 모른다.
현대 금융인은 선망의 대상이다. 연봉도 높고 사무실도 번화한 시내 중심지에 있다. 월스트리트(Wall Street), 시티오브런던(City of London), 여의도 금융가는 부(富)의 대명사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다. 금융은 처음에 어떻게 시작됐을까. 금융이 제대로 된 산업으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대부업자, 환전상, 금세공업자, 전당포 등이 금융기관 노릇을 했다. 은행의 영어 단어인 뱅크(bank)는 베네치아에서 환전상들이 긴 탁자, 즉 방코(banco)를 앞에 놓고 환전과 대부업을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과거의 금융은 쉬운 말로 대부업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고리대금업이었다. 성경에는 고리대금업자와 세리가 자주 등장하는데, 언제나 악인으로 그려진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가 성전에 있는 환전상들의 좌판을 엎었다는 구절도 나온다. 로마 교황청은 이자 수취를 하나님의 시간을 훔친 결과물이라면서 죄악시했다. 지금도 기독교와 같은 뿌리를 가진 이슬람 세계에서는 돈을 빌려준 대가로 이자를 받는 것이 금지돼 있다. 이처럼 과거의 금융, 즉 대부업은 오랜 시간 천대받는 업종이었다.
금융을 말하면 많은 사람은 유대인을 떠올린다. 언제부터 유대인들이 금융업에 종사했을까. 유대인들은 어떻게 금융업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걸까. 사실 그것은 유대인의 슬픈 역사와도 관련돼 있다. 유대인들은 1세기 로마와 두 차례에 걸쳐 벌인 전쟁에서 패하면서 오랜 방랑을 시작했다. 고향을 떠나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이를 디아스포라, 즉 이산(離散)이라고 한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 때는 60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후엔 2000년의 세월이 더 지나야 했다.
디아스포라는 유대인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로마에서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군인이나 농민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상업이나 수공업, 대부업 등에 종사했다.
이자 수취를 죄악시한 가톨릭은 기독교인의 대부업을 금지했고, 이슬람인과 교역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이로써 대부업과 이슬람과의 무역은 유대인들의 차지가 됐다. 교회법이 유대인에게 무역과 금융에 더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고대로부터 상업과 대부업에 재주가 있던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무역과 대부업에 더 많이 진출했다. 후일 이런 일들이 무역업, 금융업이라는 이름으로 잘나가는 업종이 될 줄은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핍박이 오히려 축복이 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자와 대부업을 미워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와 경제가 발달할수록 돈은 항상 필요했다. 그렇다 보니 많은 경우 채권자는 유대인이었고, 채무자는 기독교인이었다. 이러한 구조는 유대인과 기독교인 간의 반목을 더 심화시켰다.
중세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들 간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11세기 후반 십자군전쟁이 시작될 즈음에 교황은 사실상 유대인의 학살을 방조했다. 기사들은 유대인 거주지를 습격해 유대인을 학살했다. 돈도 안 갚고 재산도 약탈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 14세기 중엽 흑사병이 퍼졌을 때 독을 퍼뜨렸다는 누명을 씌워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도 유대인 대부업자를 죽여서 채무를 면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유럽 사회는 유대인들의 돈은 필요했지만, 그들에게 돈을 갚고 싶지는 않았다. 돈에 목마른 유럽의 왕들은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가진 유대인들을 끌어들였지만, 돈을 갚을 때가 되면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13세기 말 영국 에드워드 1세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했다.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도 1492년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레콩키스타(reconquesta·재정복을 뜻하는 스페인어, 이베리아반도에서 가톨릭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벌인 활동을 의미)를 완성하자, 유대인들까지 추방했다.
하지만 산업과 금융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던 유대인의 추방은 영국과 스페인 경제에 타격을 줬다. 16세기 말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 발표된 셰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을 읽어보면 당시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교도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크롬웰은 유대인들의 영국 입국을 허락했다. 이후 명예혁명 때 영국 왕이 된 오렌지공 윌리엄을 따라 그를 지지했던 네덜란드의 유대인들도 영국으로 대거 이주했다. 런던 속의 런던인 '시티오브런던(City of London)'이 생긴 것도 이때 즈음이다. 이렇게 네덜란드의 선진 무역, 금융시스템을 받아들이면서 영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영국에서는 금세공업자들이 대부업을 했다. 금세공업자들은 금화, 은화를 만드는 사람들이었는데, 영국의 왕들이 런던탑에 맡겨놓은 상인들의 금을 강탈하자, 상인들은 금세공업자들에게 금을 맡기고 대신 금보관증을 받았다. 이러한 금보관증을 상인들이 시장에서 화폐처럼 유통하자, 금세공업자들은 금보다 많은 금보관증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대출을 통해 신용을 창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것도 큰돈을 댈 귀족이나 영주가 없어, 여러 명의 상인이 돈을 갹출해 회사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가격이 계속 오르는 동인도회사의 주식을 수시로 거래하기 위해 증권거래소도 설립됐다. 이러한 선진 시스템은 네덜란드를 세계경제 최강국으로 만들었고, 이후 150년 동안 그들의 지위는 유지됐다. 홍익희가 쓴 '유대인이야기'는 암스테르담은행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주 중 상당 수가 유대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네덜란드의 전성기인 1630년대 벌어진 튤립 파동은 세계 최초의 버블(bubble)이었다. 금융위기라기보다는 '투기 열풍으로 인한 큰 소란'이라고 봐야겠지만, 그래도 프랑스의 미시시피 버블, 영국의 남해 버블과 함께 근세 유럽의 3대 버블로 손꼽힌다. 예로부터 돈이 넘쳐나면 버블이 형성되고, 그러다 결국 버블이 터지는 것은 하나의 공식이다. 그 당시 튤립 구근(球根)이 선물로 거래됐다니 네덜란드에서 금융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튤립 구근 하나가 숙련공 연 소득의 열 배가 넘는 가격에 거래됐다고 하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오렌지공이 영국 왕 윌리엄 3세가 돼 영국으로 이주할 때 많은 유대인이 따라갔다. 이후 스코틀랜드의 상인과 유대 상인들이 윌리엄 3세를 설득해 영란은행을 설립했다. 영란은행은 암스테르담은행과 같은 구조를 가진 상인들의 은행이었다. 영란은행의 특이점은 국왕, 즉 정부를 상대하는 은행이라는 점이었다. 윌리엄 3세에게 8%의 이자로 전쟁 자금을 대주고 대신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는 금세공업자들이 발행하는 금보관증과는 차원이 달랐다. 국왕이 보증하는 은행권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영란은행은 영국의 국채를 체계적으로 관리했고, 영국은 국왕의 채무불이행이 잦던 불신의 나라에서 신용 국가로 탈바꿈했다. 영국이 나폴레옹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산업혁명에 성공하면서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것도 영란은행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3%대의 낮은 이자율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전쟁에서건, 산업에서건 그런 나라를 이긴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18세기 유럽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으로 시작해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등 전쟁의 불길이 끊이지 않았지만, 하반기에 일어난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은 전 세계의 경제 상황과 정치 지형을 바꿔놓았다. 자유와 시장경제의 물결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18세기 초 유럽 경제를 뒤흔든 두 사건이 프랑스의 미시시피 버블과 영국의 남해 버블이었다. 두 사건은 정부가 지원한 거대 회사의 주가 폭락으로 시민들이 파산하고, 거기에 왕실과 정부가 개입됐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사태를 수습하는 두 나라의 대처법은 달랐다. 정부의 외면으로 가난뱅이가 된 프랑스 시민들은 국가가 주도하는 은행과 은행권에 강한 불신을 갖게 됐고, 그 이후에도 프랑스에서 발행된 지폐는 다 실패했다. 1800년이 돼서야 나폴레옹에 의해 가까스로 프랑스은행이 설립된다. 영국에서도 남해 버블이 막 출범한 하노버 왕조를 뿌리째 흔들었다. 하지만 정부가 시간을 갖고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화폐와 금융,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를 지킬 수 있었다.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19세기 초 나폴레옹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그 기세를 몰아 금본위제를 구축하고 기축통화인 파운드화와 함께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다. 세계가 자유무역주의와 '팍스 브리태니카'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면서 세계경제는 급속도로 팽창했다. 이러한 영국의 시대는 신흥 강국 미국과 독일이 부상하는 19세기 말까지 지속됐다.
메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헤센 공국의 군주 빌헬름 9세를 만나 궁중 상인이 되면서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는 다섯 명의 자식을 유럽 각국 중심지로 보내 금융업을 시작했는데, 특히 영국으로 간 셋째 아들인 나탄(네이선)이 두각을 나타냈다. 나탄 메이어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 양쪽에 줄을 대고 대륙봉쇄령 때 밀수, 금 수송 등을 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특히 나탄은 워털루전쟁 때 영국의 승전 소식을 왕실보다도 빨리 입수해 떼돈을 벌었다. 주가조작으로 돈을 번 것이었다. 영국 채권을 서서히 투매하자 이를 본 투자자들이 영국 채권을 헐값에 팔아치웠고, 그렇게 휴지 조각이 된 영국 채권을 사들이는 수법을 썼다. 영국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채 가격이 바로 급등하면서 "로스차일드가 영국을 샀다"는 말이 퍼질 정도로 부자가 됐고, 영란은행의 대주주로 올라선다.
로스차일드가는 신흥국 미국이 점차 성장하자 같은 유대인인 J.P. 모건과 손을 잡고 미국으로 진출했다. 모건이 로스차일드의 대리인이었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에서 국제 금융자본이 자리를 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방과 중앙은행의 통제를 거부했던 토머스 제퍼슨 등 분권주의자들 때문에 미국의 중앙은행은 문을 닫았다. 거기에 각 주에서 자체적으로 은행을 설립하고 은행마다 각기 은행권을 발행하는 자유 은행업 시대가 한동안 유지된 탓이다. 이후 남북전쟁으로 북부가 승리하면서 미국은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변모했고, 보호주의 정책을 통해 미국은 강력한 산업국으로 부상했다.
J.P. 모건은 이때부터 산업 전면에 나서 돈 되는 것을 모두 손에 넣었다. 벤터빌트에게 철도회사를 사들이고, 카네기 철강회사를 인수해 US 스틸을 세계 최대의 철강회사로 키웠다. US 스틸 주식이 뉴욕거래소에 상장되자 이때부터 뉴욕 증권거래소의 거래 규모가 런던 거래소를 추월했다. 발명왕 에디슨에게 투자해 전기회사도 독점해 나갔다. 이때의 미국은 온통 모건과 석유왕 록펠러의 세상이었다. 동시에 문란한 금융 질서로 인해 금융위기가 계속 반복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지금 전 세계는 미 연준이 발행하는 달러를 기축통화로 모시고 살고 있다. 오랜 역사에서 수모를 겪던 유대인은 이제 미국 사회의 주축이 돼 세계 금융을 움직이고 있다. 금융업은 이제 가장 유망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부상했다. 유대인은 더는 목숨을 위협받고 박해와 탄압을 당하던 민족이 아니다. 금융, 유통 등 경제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언론, 영화, 학계, 예술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새 역사를 만들고 있다. 돈만 알던 '베니스의 상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이제 세계적 갑부가 돼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오늘날 금융은 일반 국민 바로 곁에 있다. 국민 대부분이 주식과 채권 등 금융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휴대폰 금융기관 앱으로 모든 은행 업무나 주식거래를 처리한다. 앞으로 금융기관 창구는 점차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금융 속도가 빨라지고 편리성이 제고된 것이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금융위기 속도도 빨리질 것이다. 순식간에, 부지불식 간에 금융위기가 터질 수 있다.
금융은 평시에는 우리들의 경제활동을 돕고 우리의 부를 지켜주고 불려주지만, 위기가 찾아오면 우리 재산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삶을 뿌리째 뒤흔들 수 있는 존재다. 좋을 때는 좋지만 나쁠 때는 너무 나쁜 것이 금융이다. 우리가 금융 상황에 항상 관심을 갖고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 화폐의 세 가지 기능 ‘교환 매개, 가치척도, 가치저장’
● 대부업, 네덜란드에서 처음 ‘제대로 된 금융업’으로 발전
● 고리대금업자라고 탄압받던 유대인, 글로벌 금융 재벌로 변신
● 좋을 때는 이득, 나쁠 때는 삶 송두리째 앗아가는 금융
중세 이전 실물경제 조력자 역할을 하던 화폐가 근대에 들어 금융위기를 일으키는 주범으로 지목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화폐가 단순한 교환의 매개 기능, 즉 실물경제의 윤활유 역할에서 벗어나 경기변동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화폐는 세 가지 기능을 가진다. 교환의 매개, 가치척도, 그리고 가치저장 기능이다. 교환의 매개와 가치척도 기능이 실물경제를 내조하는 조력 기능이라면, 가치저장 기능은 현재의 구매력을 미래로 이전시켜 투자와 자본의 생성을 일으키는 화폐가 가진 특수하고도 독자적인 기능이다.
중상주의 시대에 금속화폐인 금·은이 가장 중요한 국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화폐가 얼마나 독특한 자산인지 이해할 수 있다. 화폐의 가치저장 기능으로부터 태동한 것이 '금융'이라는 거대 산업이다. 소비자의 저축은 금융을 통해 기업의 자본으로 형성되고, 투자를 통해 경제를 성장시킨 것이다.
화폐는 세 가지 기능을 가진다. 교환의 매개, 가치척도, 그리고 가치저장 기능이다. 교환의 매개와 가치척도 기능이 실물경제를 내조하는 조력 기능이라면, 가치저장 기능은 현재의 구매력을 미래로 이전시켜 투자와 자본의 생성을 일으키는 화폐가 가진 특수하고도 독자적인 기능이다.
중상주의 시대에 금속화폐인 금·은이 가장 중요한 국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화폐가 얼마나 독특한 자산인지 이해할 수 있다. 화폐의 가치저장 기능으로부터 태동한 것이 '금융'이라는 거대 산업이다. 소비자의 저축은 금융을 통해 기업의 자본으로 형성되고, 투자를 통해 경제를 성장시킨 것이다.
금융, 화폐 가치저장 기능에서 태동
지식백과사전에서 금융(金融)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일반적으로는 자금의 융통과 화폐의 대차, 구체적으로 대부증권에 의한 자금의 대부나 참가 증권에 의한 자금의 출자를 말한다." (두산백과)
"금전을 융통하는 일을 말한다. 자금을 융통하는 과정에서 통상적으로 이자가 붙는데, 이로 인해 금융을 흔히 일정 기간을 정해 앞으로 있을 원금의 상환과 이자지급에 대해 상대방을 신용하고 자금을 이전하는 과정." (한경 경제용어사전)
이처럼 금융은 화폐를 융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융과 화폐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금융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 금융은 화폐 발명 후에 태동했다. 그렇다고 금융이 화폐의 종속변수인 것만은 아니다. 금융이 화폐를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화폐는 금융에 의해 재창출되고 확대되기 때문이다. 즉 신용 창출이 이뤄지는 것이다. 어쩌면 화폐는 금융에 의해 계속 진화(進化)해 왔는지도 모른다.
현대 금융인은 선망의 대상이다. 연봉도 높고 사무실도 번화한 시내 중심지에 있다. 월스트리트(Wall Street), 시티오브런던(City of London), 여의도 금융가는 부(富)의 대명사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다. 금융은 처음에 어떻게 시작됐을까. 금융이 제대로 된 산업으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대부업자, 환전상, 금세공업자, 전당포 등이 금융기관 노릇을 했다. 은행의 영어 단어인 뱅크(bank)는 베네치아에서 환전상들이 긴 탁자, 즉 방코(banco)를 앞에 놓고 환전과 대부업을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과거의 금융은 쉬운 말로 대부업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고리대금업이었다. 성경에는 고리대금업자와 세리가 자주 등장하는데, 언제나 악인으로 그려진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가 성전에 있는 환전상들의 좌판을 엎었다는 구절도 나온다. 로마 교황청은 이자 수취를 하나님의 시간을 훔친 결과물이라면서 죄악시했다. 지금도 기독교와 같은 뿌리를 가진 이슬람 세계에서는 돈을 빌려준 대가로 이자를 받는 것이 금지돼 있다. 이처럼 과거의 금융, 즉 대부업은 오랜 시간 천대받는 업종이었다.
금융을 말하면 많은 사람은 유대인을 떠올린다. 언제부터 유대인들이 금융업에 종사했을까. 유대인들은 어떻게 금융업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걸까. 사실 그것은 유대인의 슬픈 역사와도 관련돼 있다. 유대인들은 1세기 로마와 두 차례에 걸쳐 벌인 전쟁에서 패하면서 오랜 방랑을 시작했다. 고향을 떠나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이를 디아스포라, 즉 이산(離散)이라고 한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 때는 60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후엔 2000년의 세월이 더 지나야 했다.
디아스포라는 유대인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로마에서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군인이나 농민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상업이나 수공업, 대부업 등에 종사했다.
채권자는 유대인, 채무자는 기독교인
더욱이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유대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분리돼 나왔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죽음으로 내몬 유대인을 좋게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자 수취를 죄악시한 가톨릭은 기독교인의 대부업을 금지했고, 이슬람인과 교역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이로써 대부업과 이슬람과의 무역은 유대인들의 차지가 됐다. 교회법이 유대인에게 무역과 금융에 더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고대로부터 상업과 대부업에 재주가 있던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무역과 대부업에 더 많이 진출했다. 후일 이런 일들이 무역업, 금융업이라는 이름으로 잘나가는 업종이 될 줄은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핍박이 오히려 축복이 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자와 대부업을 미워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와 경제가 발달할수록 돈은 항상 필요했다. 그렇다 보니 많은 경우 채권자는 유대인이었고, 채무자는 기독교인이었다. 이러한 구조는 유대인과 기독교인 간의 반목을 더 심화시켰다.
중세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들 간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11세기 후반 십자군전쟁이 시작될 즈음에 교황은 사실상 유대인의 학살을 방조했다. 기사들은 유대인 거주지를 습격해 유대인을 학살했다. 돈도 안 갚고 재산도 약탈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다. 14세기 중엽 흑사병이 퍼졌을 때 독을 퍼뜨렸다는 누명을 씌워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도 유대인 대부업자를 죽여서 채무를 면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유럽 사회는 유대인들의 돈은 필요했지만, 그들에게 돈을 갚고 싶지는 않았다. 돈에 목마른 유럽의 왕들은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가진 유대인들을 끌어들였지만, 돈을 갚을 때가 되면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13세기 말 영국 에드워드 1세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했다.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도 1492년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레콩키스타(reconquesta·재정복을 뜻하는 스페인어, 이베리아반도에서 가톨릭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벌인 활동을 의미)를 완성하자, 유대인들까지 추방했다.
하지만 산업과 금융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던 유대인의 추방은 영국과 스페인 경제에 타격을 줬다. 16세기 말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 발표된 셰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을 읽어보면 당시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교도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크롬웰은 유대인들의 영국 입국을 허락했다. 이후 명예혁명 때 영국 왕이 된 오렌지공 윌리엄을 따라 그를 지지했던 네덜란드의 유대인들도 영국으로 대거 이주했다. 런던 속의 런던인 '시티오브런던(City of London)'이 생긴 것도 이때 즈음이다. 이렇게 네덜란드의 선진 무역, 금융시스템을 받아들이면서 영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대표적 금융 가문 메디치와 푸거
유대인만이 대부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십자군전쟁 때 기사들을 대상으로 대부업을 했던 프랑스의 성전(temple) 기사단 외에도, 이탈리아나 독일에 대부업자가 많았다. 그러나 교회법이 서슬 퍼렇던 시절에 대놓고 대부업을 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환전상 또는 상인이라는 이름으로 대부업을 했다. 전주들은 돈을 상환받을 때 외국 돈으로 받으면서 환율을 조금 높게 올려받는 편법을 써서 이자를 받았다. 또는 환어음을 취급하면서 할인을 통해 우회적으로 이자를 수취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금세공업자들이 대부업을 했다. 금세공업자들은 금화, 은화를 만드는 사람들이었는데, 영국의 왕들이 런던탑에 맡겨놓은 상인들의 금을 강탈하자, 상인들은 금세공업자들에게 금을 맡기고 대신 금보관증을 받았다. 이러한 금보관증을 상인들이 시장에서 화폐처럼 유통하자, 금세공업자들은 금보다 많은 금보관증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대출을 통해 신용을 창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 때 대표적 금융 가문은 메디치가(家)와 푸거가였다. 메디치가는 모직산업과 금융업으로 돈을 벌어 피렌체의 권력을 장악하고 교황을 둘이나 배출한 막강한 가문이다. 이들은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등 천재 화가들을 후원함으로써 르네상스를 번성시켰다. 대표적인 사람이 '위대한 로렌초'라고 불린 로렌초 데 메디치였다. 그 유명한 '군주론'도 마키아벨리가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아버지인 로렌초 2세에게 관직을 얻기 위해 헌정한 책이었다. 메디치가는 교황청의 은행이 돼 명성을 쌓고, 이후 영국 왕 등에게 필요한 자금을 대주는 대가로 무역독점권 등의 특혜를 받아 사업을 벌였다.
메디치가에 이어 15세기 말부터 16세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은행 가문은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가였다. 푸거가는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금줄이었다. 처음에 푸거가는 금융업 이전에 은광 개발과 상업을 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이 돈을 교황과 황제에게 빌려주면서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해 나갔다. 스페인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로스 1세(카를 5세)가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푸거가 가문의 돈과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온 금·은 덕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전쟁과 가톨릭 수호자라는 멍에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막대한 재정지출을 불러와 스페인을 너무 일찍 쇠퇴하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메디치가와 푸거가는 둘 다 유럽의 왕과 황제들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면서 과거 그들에게 영광을 줬던 정경유착으로 인해 몰락했다. 엄청난 돈이 드는 전쟁을 끊임없이 수행해 가던 왕과 황제는 결국 돈을 갚을 수가 없었고 결국 두 가문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근세에 들어 이자를 받는 것이 합법화하면서 그 당시까지 상류층만 이용하던 금융은 이제 상인과 일반인을 위한 금융으로 변모했다. 명실공히 상업은행이 생겨난 것이다. 대부업이 제대로 된 금융업으로 처음 발전한 곳은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땅이 바다보다 낮아 간척을 통해 토지를 만들었다. 이런 척박한 땅에 영주가 있을 리 없었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처럼 돈 많은 왕족과 귀족도 없었다. 그래서 시민들이 상업과 제조업에 종사하면서 장원이 아닌 도시를 형성했다.
메디치가에 이어 15세기 말부터 16세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은행 가문은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가였다. 푸거가는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금줄이었다. 처음에 푸거가는 금융업 이전에 은광 개발과 상업을 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이 돈을 교황과 황제에게 빌려주면서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해 나갔다. 스페인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로스 1세(카를 5세)가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푸거가 가문의 돈과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온 금·은 덕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전쟁과 가톨릭 수호자라는 멍에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막대한 재정지출을 불러와 스페인을 너무 일찍 쇠퇴하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메디치가와 푸거가는 둘 다 유럽의 왕과 황제들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면서 과거 그들에게 영광을 줬던 정경유착으로 인해 몰락했다. 엄청난 돈이 드는 전쟁을 끊임없이 수행해 가던 왕과 황제는 결국 돈을 갚을 수가 없었고 결국 두 가문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근세에 들어 이자를 받는 것이 합법화하면서 그 당시까지 상류층만 이용하던 금융은 이제 상인과 일반인을 위한 금융으로 변모했다. 명실공히 상업은행이 생겨난 것이다. 대부업이 제대로 된 금융업으로 처음 발전한 곳은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땅이 바다보다 낮아 간척을 통해 토지를 만들었다. 이런 척박한 땅에 영주가 있을 리 없었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처럼 돈 많은 왕족과 귀족도 없었다. 그래서 시민들이 상업과 제조업에 종사하면서 장원이 아닌 도시를 형성했다.
세계 최초 주식회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대표적 도시가 암스테르담이었다. 이 도시는 스페인에서 추방된 세파르디계 유대인들이 안트베르펜을 거쳐서 암스테르담으로 대거 들어오면서 부흥하기 시작했다. 상업은행인 암스테르담은행이 문을 열었다. 상인들의 자본으로 설립됐으며, 상인들이 환전과 예금을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대출을 받을 수도 있었다. 네덜란드에는 캘빈파 개신교도가 많아 적정 이자를 받는 것이 일찌감치 정당화됐다. 암스테르담은행은 상인들을 위한 근대적 은행의 표준이 됐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것도 큰돈을 댈 귀족이나 영주가 없어, 여러 명의 상인이 돈을 갹출해 회사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가격이 계속 오르는 동인도회사의 주식을 수시로 거래하기 위해 증권거래소도 설립됐다. 이러한 선진 시스템은 네덜란드를 세계경제 최강국으로 만들었고, 이후 150년 동안 그들의 지위는 유지됐다. 홍익희가 쓴 '유대인이야기'는 암스테르담은행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주 중 상당 수가 유대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네덜란드의 전성기인 1630년대 벌어진 튤립 파동은 세계 최초의 버블(bubble)이었다. 금융위기라기보다는 '투기 열풍으로 인한 큰 소란'이라고 봐야겠지만, 그래도 프랑스의 미시시피 버블, 영국의 남해 버블과 함께 근세 유럽의 3대 버블로 손꼽힌다. 예로부터 돈이 넘쳐나면 버블이 형성되고, 그러다 결국 버블이 터지는 것은 하나의 공식이다. 그 당시 튤립 구근(球根)이 선물로 거래됐다니 네덜란드에서 금융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튤립 구근 하나가 숙련공 연 소득의 열 배가 넘는 가격에 거래됐다고 하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오렌지공이 영국 왕 윌리엄 3세가 돼 영국으로 이주할 때 많은 유대인이 따라갔다. 이후 스코틀랜드의 상인과 유대 상인들이 윌리엄 3세를 설득해 영란은행을 설립했다. 영란은행은 암스테르담은행과 같은 구조를 가진 상인들의 은행이었다. 영란은행의 특이점은 국왕, 즉 정부를 상대하는 은행이라는 점이었다. 윌리엄 3세에게 8%의 이자로 전쟁 자금을 대주고 대신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는 금세공업자들이 발행하는 금보관증과는 차원이 달랐다. 국왕이 보증하는 은행권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영란은행은 영국의 국채를 체계적으로 관리했고, 영국은 국왕의 채무불이행이 잦던 불신의 나라에서 신용 국가로 탈바꿈했다. 영국이 나폴레옹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산업혁명에 성공하면서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것도 영란은행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3%대의 낮은 이자율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전쟁에서건, 산업에서건 그런 나라를 이긴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18세기 유럽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으로 시작해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등 전쟁의 불길이 끊이지 않았지만, 하반기에 일어난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은 전 세계의 경제 상황과 정치 지형을 바꿔놓았다. 자유와 시장경제의 물결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18세기 초 유럽 경제를 뒤흔든 두 사건이 프랑스의 미시시피 버블과 영국의 남해 버블이었다. 두 사건은 정부가 지원한 거대 회사의 주가 폭락으로 시민들이 파산하고, 거기에 왕실과 정부가 개입됐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사태를 수습하는 두 나라의 대처법은 달랐다. 정부의 외면으로 가난뱅이가 된 프랑스 시민들은 국가가 주도하는 은행과 은행권에 강한 불신을 갖게 됐고, 그 이후에도 프랑스에서 발행된 지폐는 다 실패했다. 1800년이 돼서야 나폴레옹에 의해 가까스로 프랑스은행이 설립된다. 영국에서도 남해 버블이 막 출범한 하노버 왕조를 뿌리째 흔들었다. 하지만 정부가 시간을 갖고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화폐와 금융,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를 지킬 수 있었다.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19세기 초 나폴레옹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그 기세를 몰아 금본위제를 구축하고 기축통화인 파운드화와 함께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다. 세계가 자유무역주의와 '팍스 브리태니카'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면서 세계경제는 급속도로 팽창했다. 이러한 영국의 시대는 신흥 강국 미국과 독일이 부상하는 19세기 말까지 지속됐다.
역사상 가장 유력한 금융 가문,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가는 나폴레옹전쟁 시기에 영국에서 부상한 유대인 금융 가문이다. 로스차일드(Rothschild)는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게토에 걸려 있는 붉은 방패를 뜻하는 말이다. 와인 애호가들에게 샤토 무통 로칠드, 샤토 라피트 로칠드 등으로 친숙한 로스차일드는 원래 세계 역사상 가장 유력한 금융 가문이었다. 로스차일드가의 전설은 그곳에 살던 유대인 상인이자 환전상인 메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로부터 시작된다.
메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헤센 공국의 군주 빌헬름 9세를 만나 궁중 상인이 되면서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는 다섯 명의 자식을 유럽 각국 중심지로 보내 금융업을 시작했는데, 특히 영국으로 간 셋째 아들인 나탄(네이선)이 두각을 나타냈다. 나탄 메이어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 양쪽에 줄을 대고 대륙봉쇄령 때 밀수, 금 수송 등을 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특히 나탄은 워털루전쟁 때 영국의 승전 소식을 왕실보다도 빨리 입수해 떼돈을 벌었다. 주가조작으로 돈을 번 것이었다. 영국 채권을 서서히 투매하자 이를 본 투자자들이 영국 채권을 헐값에 팔아치웠고, 그렇게 휴지 조각이 된 영국 채권을 사들이는 수법을 썼다. 영국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채 가격이 바로 급등하면서 "로스차일드가 영국을 샀다"는 말이 퍼질 정도로 부자가 됐고, 영란은행의 대주주로 올라선다.
로스차일드가는 신흥국 미국이 점차 성장하자 같은 유대인인 J.P. 모건과 손을 잡고 미국으로 진출했다. 모건이 로스차일드의 대리인이었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에서 국제 금융자본이 자리를 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방과 중앙은행의 통제를 거부했던 토머스 제퍼슨 등 분권주의자들 때문에 미국의 중앙은행은 문을 닫았다. 거기에 각 주에서 자체적으로 은행을 설립하고 은행마다 각기 은행권을 발행하는 자유 은행업 시대가 한동안 유지된 탓이다. 이후 남북전쟁으로 북부가 승리하면서 미국은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변모했고, 보호주의 정책을 통해 미국은 강력한 산업국으로 부상했다.
J.P. 모건은 이때부터 산업 전면에 나서 돈 되는 것을 모두 손에 넣었다. 벤터빌트에게 철도회사를 사들이고, 카네기 철강회사를 인수해 US 스틸을 세계 최대의 철강회사로 키웠다. US 스틸 주식이 뉴욕거래소에 상장되자 이때부터 뉴욕 증권거래소의 거래 규모가 런던 거래소를 추월했다. 발명왕 에디슨에게 투자해 전기회사도 독점해 나갔다. 이때의 미국은 온통 모건과 석유왕 록펠러의 세상이었다. 동시에 문란한 금융 질서로 인해 금융위기가 계속 반복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금융위기 때마다 J.P. 모건이 나서 해결하자 더는 모건에게 손 벌리지 말고 중앙은행을 설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1913년 미 연방준비제도가 창설됐다. 모건계와 시티계 은행들이 투자한 뉴욕연방준비은행이 중심이 되는 시스템이었다. 드디어 미국에도 중앙은행이 설립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중앙은행을 불신하는 국민 여론을 고려해 은행(bank)이 아닌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라고 명명했다. 워싱턴 DC에 있는 연방준비제도 이사를 대통령이 임명함으로써 연준에 공공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부여했다.
쑹홍빙은 그의 저서 '화폐전쟁'에서 미국은 민간은행이 법정통화인 달러를 찍어내는 이상한 국가라고 비판한다. 뉴욕을 위시한 12개 연방준비은행은 유대인이 많은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민간은행이기 때문이다. 본래 화폐는 민간 시장에서 태동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민간은행이 법정화폐를 찍어내는 것은 관(官)의 권위를 믿는 필자를 포함한 동양인 정서로는 이해하게 힘든 게 사실이다.
20세기 양대 세계 전쟁과 함께 세계사에 영향을 끼친 가장 큰 사건이라면 1929년 터진 세계대공황(The Great Recession)을 들 수 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호황기에 연이어 발생한 경제위기에 모두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세계경제는 참담하게 무너졌다. 호황과 버블 그리고 붕괴라는 공식은 이때도 딱 맞아떨어졌다. 이로 인해 케인스주의, 수정자본주의, 혼합경제 등 새로운 사상과 용어가 쏟아져 나왔다.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세계가 하나가 되면서 금융위기의 파괴력은 훨씬 강해졌다. 예전에는 전쟁광인 황제와 군주들이 국가의 금융과 경제를 망쳤지만, 지금은 금융과 화폐가 호황과 불황을 주기적으로 일으키면서 끊임없이 위기를 만들고 있다.
쑹홍빙은 그의 저서 '화폐전쟁'에서 미국은 민간은행이 법정통화인 달러를 찍어내는 이상한 국가라고 비판한다. 뉴욕을 위시한 12개 연방준비은행은 유대인이 많은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민간은행이기 때문이다. 본래 화폐는 민간 시장에서 태동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민간은행이 법정화폐를 찍어내는 것은 관(官)의 권위를 믿는 필자를 포함한 동양인 정서로는 이해하게 힘든 게 사실이다.
20세기 양대 세계 전쟁과 함께 세계사에 영향을 끼친 가장 큰 사건이라면 1929년 터진 세계대공황(The Great Recession)을 들 수 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호황기에 연이어 발생한 경제위기에 모두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세계경제는 참담하게 무너졌다. 호황과 버블 그리고 붕괴라는 공식은 이때도 딱 맞아떨어졌다. 이로 인해 케인스주의, 수정자본주의, 혼합경제 등 새로운 사상과 용어가 쏟아져 나왔다.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세계가 하나가 되면서 금융위기의 파괴력은 훨씬 강해졌다. 예전에는 전쟁광인 황제와 군주들이 국가의 금융과 경제를 망쳤지만, 지금은 금융과 화폐가 호황과 불황을 주기적으로 일으키면서 끊임없이 위기를 만들고 있다.
갈수록 중요해지는 중앙은행
잦은 금융위기 발생으로 중앙은행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중앙은행은 단기 성과에 급급한 선거 권력으로부터 화폐의 안정성을 지켜야 할 뿐더러 동시에 탐욕스러운 민간 금융 세력이 시장 금융 질서를 흔드는 것도 막아야 한다.
지금 전 세계는 미 연준이 발행하는 달러를 기축통화로 모시고 살고 있다. 오랜 역사에서 수모를 겪던 유대인은 이제 미국 사회의 주축이 돼 세계 금융을 움직이고 있다. 금융업은 이제 가장 유망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부상했다. 유대인은 더는 목숨을 위협받고 박해와 탄압을 당하던 민족이 아니다. 금융, 유통 등 경제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언론, 영화, 학계, 예술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새 역사를 만들고 있다. 돈만 알던 '베니스의 상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이제 세계적 갑부가 돼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오늘날 금융은 일반 국민 바로 곁에 있다. 국민 대부분이 주식과 채권 등 금융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휴대폰 금융기관 앱으로 모든 은행 업무나 주식거래를 처리한다. 앞으로 금융기관 창구는 점차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금융 속도가 빨라지고 편리성이 제고된 것이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금융위기 속도도 빨리질 것이다. 순식간에, 부지불식 간에 금융위기가 터질 수 있다.
금융은 평시에는 우리들의 경제활동을 돕고 우리의 부를 지켜주고 불려주지만, 위기가 찾아오면 우리 재산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삶을 뿌리째 뒤흔들 수 있는 존재다. 좋을 때는 좋지만 나쁠 때는 너무 나쁜 것이 금융이다. 우리가 금융 상황에 항상 관심을 갖고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강승준
●1965년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행정고시 제35회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前 한국은행 감사
●現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저서 : 역사는 돈이다
●1965년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행정고시 제35회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前 한국은행 감사
●現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저서 : 역사는 돈이다
강승준 서울과기대 부총장(경제학 박사)·前 한국은행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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