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시멀리스트의 여행, 무라노섬에서 건너온 작은 오리

김나영 2025. 1. 7.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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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밟힐 땐 사야 한다. 여행이니까 더더욱.

이탈리아 베니스 출장이라니. 비록 급하게 잡힌 출장이었지만 마음이 두근거렸다. 언젠가는 가 보리라 마음 한편에 품어두었던 여행지. 짧은 일정이지만 베니스라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두루 마주하고 싶었다. 본섬부터 작은 섬들까지 전부!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마음이 더욱 분주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만들어 낸 일정이었지만, 그 분주한 욕심 덕에 오늘의 주인공인 무라노 글라스 오리가 우리 집에 와 있다는 점에선 한 톨의 후회도 없다. 그저, 더 큰 작품을 데려올 걸, 조금 더 큰손이 되어 볼 걸 하는 후회는 남았지만.

베니스에 있다 보면 출렁이는 물결 따라 배를 타는 몸짓이 자연스레 깃든다. 그러다 보면 그 배를 타고 조금은 더 멀리 나가고 싶어진다. 물살을 가르며 가 닿는 작은 섬마을은 또 다른 얼굴을 내밀며 여행자를 반긴다. 색색의 건물 덕에 인스타그래머블한 동네로 소문난 '부라노'를 가장 많이들 기억하겠지만, '무라노'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섬이다. 부라노의 명성 덕에 조금 가려져 있을 뿐.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서 수상버스인 '바포레토'를 타고 한 시간쯤 가면 무라노섬에 다다른다. 다소 소란스러운 배의 모터 소리도, 물 내음 가득한 공기도, 물결의 크고 작은 일렁임도 더는 거슬리지 않게 되었을 딱 그즈음이다. 베네치아에 오기 전부터 무라노라는 섬 이름이 익숙했던 건 무라노 글라스 덕분이다. 10세기부터 베니스 사람들은 유리나 크리스탈을 만들어 왔다. 주요한 수익창출의 수단인 된 유리 세공 기술이 외부로 유출되는 걸 방지하고자 13세기에 들어서는 유리 세공자들을 무라노섬으로 이주시켰다. 베니스의 웬만한 고급 호텔에는 무라노 글라스로 완성한 환상적인 조명이 객실마다 달려 있다. 탐나서 눈독 들이던 호텔 레스토랑의 컵도, 욕실의 비누 받침까지도 '무라노'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무라노 글라스는 빛을 만날 때 그 가치의 정점을 찍는다. 또렷하고 영롱한 색감을 투영해 내는 오색 빛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림자마저 찬연한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미 마음을 빼앗겼으니 보는 것만으로는 절대 만족이 안 된다. 무라노 거리의 상점가를 둘러본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 건너 하나가 모두 유리공예 상점이다.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쇼윈도 너머에서 찬란히 빛나는 유리 공예품의 모습에 이끌려 홀린 듯 가게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양손 무겁게 쇼핑백을 들고 나오는 건, 맥시멀리스트 여행자에겐 너무나도 당연하게 벌어질 결과일 것이다. 욕심을 접어 두고 잠시 호흡을 고른 뒤 유리공예 장인의 손길을 지켜볼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가 본다.

뜨거운 불길이 피어오르는 가마 곁에 장인이 자리를 잡는다. 기다란 파이프 끝에 매달린 붉게 달궈진 유리 반죽을 집게 모양의 도구를 사용해 빠른 손길로 모양을 내니 순식간에 완벽한 말 한 마리가 탄생한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라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절로 나오는 탄성과 박수에 익숙한 반응이라는 듯 주인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신문지 귀퉁이를 찢어 방금 만든 뜨거운 유리 위에 얹어 보인다. 종이에 화르르 불이 붙는 모습에 또 한 번 '브라보!' 박수를 보냈다. 그는 이 몸짓을 얼마나 많이 반복해 왔을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장인의 정확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이런 퍼포먼스를 보고 나니 더욱이 무라노 글라스로 만들어진 무언가를 사야만 한다는 욕심이 부풀어 오른다. 나름 합리적인 욕심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필이면 출장에 가져온 트렁크에 여유가 없었다. 결국, 색유리가 섞인 작은 병들과 펜던트, 귀여운 오리 모양의 미니 오브제를 몇 개 구매했다. 다른 어느 곳에도 없는, 단 하나의 수제 작품들. 듣자 하니 전통적인 무라노 유리공예 장인들은 집안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유리 성분 조합의 비법을 비밀수첩에 기록해 보존하고, 수제자를 통해 그 비법이 이어지는 게 정석이라고 한다. 책상 한편에 고이 모셔 둔 무라노 오리를 이따금 바라볼 때마다 연금술사의 비밀 레시피라도 쥐고 있는 듯 기분이 달뜬다. 한편으로는 '화병과 컵도 사올 걸' 하는 후회가 동시에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눈에 밟힐 땐 사야 한다. 언제 또 오게 될지 모르니까. 맥시멀리스트의 여행은 언제나 이렇다. 보고, 사고, 후회하고, 다시 사고.

*김나영 작가의 맥시멀리스트 여행
여행이 일의 한 부분이던 시절, 다채로운 도시들을 탐험하며 부지런히 작은 물건들을 사 모았다. 같은 종류만 고집하며 모았으면 나름의 컬렉션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후회를 거듭하면서도 여전히 홀딱 반한 물건들을 수집하는, 사물 한정 금사빠의 사는(buy) 이야기

글 사진 김나영 에디터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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