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말로 불 지르기 좋은 도구지 [사람IN]

장일호 기자 2025. 1. 7.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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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쉬던 중이었다.

"읽기에만 머무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영원히 읽기만 할 수 없어요. 책 읽기의 근사한 점 중 하나가 나를 내가 생각지 못했던 다른 곳으로 데려다놓는 거예요. 근래 한강 작품을 읽으면서 오카 마리의 〈가자란 무엇인가〉를 연계 도서로 읽었어요. 광주에서 가자로, 이렇게 연결되는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노씨는 들불의 활동과 자신의 중요한 정체성을 '시민 활동가'로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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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이 주목한 이 주의 사람.  더불어 사는 사람 이야기에서 여운을 음미해보세요.
노혜지씨(활동명 '구구')는 독서 공동체 '들불'을 운영한다. ⓒ시사IN 조남진

공원에서 쉬던 중이었다. 누군가 비둘기에게 발길질하는 모습을 봤다. 비둘기의 처지가 여자들의 처지랑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비둘기에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겹쳐 보며 골똘해지다 보니 비둘기가 좋아지고, 이내 지키고 싶어졌다. 활동명을 ‘구구’로 정하겠다는 노혜지씨(35)의 말에 친구가 맞장구를 쳤다. “딱이네, 너 구구절절 말하는 것도 좋아하잖아.”

노씨는 ‘말할 자리’를 만드는 일을 한다. 시작은 동아리였다. 2017년 지역 도서관 내 페미니즘 독서 동아리를 꾸렸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은 갈증이 2021년 노씨를 ‘사업자’로 만들었다. “브랜드 이름으로는 너무 강하다”라는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동아리 때부터의 이름을 고수했다. ‘들불’이라는 투박한 이름을 어쩐지 지키고 싶었다. “들불은 걷잡을 수 없는 불, 널리 내는 불이잖아요. 책이 어디까지 멀리 갈 수 있는지, 독서 공동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 마음을 담기에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들불에서 진행되는 여러 온·오프라인 모임은 ‘읽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책에 나의 이야기를 겹쳐 보고, 내 이야기를 다시 사회적 맥락 안에 위치시킬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설계한다. 함께 읽고 나면 ‘행동하기’라는 과제가 선물처럼 남는다. “읽기에만 머무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영원히 읽기만 할 수 없어요. 책 읽기의 근사한 점 중 하나가 나를 내가 생각지 못했던 다른 곳으로 데려다놓는 거예요. 근래 한강 작품을 읽으면서 오카 마리의 〈가자란 무엇인가〉를 연계 도서로 읽었어요. 광주에서 가자로, 이렇게 연결되는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노씨는 들불의 활동과 자신의 중요한 정체성을 ‘시민 활동가’로 정의한다.

공동체 안에서 돈이 돈으로만 기능하지 않는 방식도 궁리한다. 독서 공동체 들불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소비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시민으로 만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는 요즘 노씨가 가장 집요하게 붙잡고 있는 질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저한테 중요한 건 공동 지식, 공동 자원이거든요. 이를테면 얼마 전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으로 북클럽을 했는데, 한 회 발제를 하면 참가비를 할인해주거나 아예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옵션을 줬어요. 내게 나눌 것이 있으면 굳이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화폐가 아닌 지식이나 다른 자원을 주고받는 형태를 계속 실험해보고 싶어요.”

독서 공동체 들불은 2025년 하반기 ‘들불 학교’로 또 한 차례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2025년은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진 지 10년 되는 해이다. 연구자도 활동가도 아니지만 학교 밖에서도 여전히 공부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고자 한다. “저는 안전한 공동체가 아니라 갈등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부수고, 깨면서 나아가고 싶어요.”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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