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이후 얼어붙은 내수... 덜 먹고 덜 놀러갔다
12월 둘째주 카드 이용액 급감
비상계엄과 탄핵소추, 항공기 참사 등 연이은 대형 사건·사고가 연말·연초 내수 경기 특수(特需)를 집어삼켰다. 특히 외식과 숙박, 오락·문화 등 ‘먹고 놀고 즐기는’ 소비가 급감했다.
5일 통계청의 속보성 지표인 ‘나우캐스트’에 따르면, 작년 12월 둘째 주(7~13일) 전국 신용카드 이용 금액은 1년 전보다 3.1% 감소했다. 직전 주인 11월 30일~12월 6일 카드 이용액은 전년 대비 7.3% 증가했는데, 1주일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이다.
12월 둘째 주는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1차 탄핵안이 정족수 미달로 무산(12월 7일)된 뒤, 2차 탄핵안이 가결(14일)되기 직전까지 기간이다. 정치권에서 탄핵 찬반 논란이 치열하게 이어지고, 서울 여의도와 광화문에서 대규모 탄핵 찬반 집회가 열리던 때다. 계엄과 탄핵 추진 등 정국 혼란이 장기 부진에 빠져 있는 내수 경기 회복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부문별로는 오락·스포츠 및 문화(-7.4%), 숙박 서비스(-7.1%), 음식 및 음료서비스(-4.5%)의 소비가 더 큰 폭으로 줄었다. 소비가 그만큼 ‘엄숙’해진 것이다. 연말 소비자심리지수는 코로나 사태 이후 4년 9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하락했다.
◇계엄 해제 안된 내수… 덜 먹고 덜 놀러갔다
서울 여의도의 금융회사에 다니는 김모(44)씨는 원래 작년 12월 16일 부서 차원의 송년 회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계엄 여파로 회식이 ‘무기한 연기’됐다. 김씨는 “나라 전체가 뒤숭숭한데 우리끼리 ‘부어라 마셔라’ 분위기로 회식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회사 차원의 판단이 있었다”며 “그런데 연말에 제주항공 참사까지 겹치면서, 이젠 송년회를 대신할 신년회도 열기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달 크리스마스 때 사흘간 휴가를 썼지만, 예년처럼 강원도 스키장 등으로 놀러 가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그는 “많은 국민이 나라 걱정으로 추운 날씨에도 집회에 참가하는데, 나만 좋은 데서 쉬고 맛있고 비싼 음식을 먹을 기분이 잘 나지 않았다”며 “시시각각 정국 상황이 뒤바뀌니, 정치 뉴스를 보다가 휴가가 다 간 느낌”이라고 했다.
대기업 직장인 최모(42)씨는 당초 지난달 18~24일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부산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었지만, 계엄 이후 이를 취소했다. 그는 국내 주식 시장에 수천만 원 정도 투자하고 있었는데, 계엄 직후 투자 종목의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하면서 며칠 만에 500만원 가까운 손해를 봤다. 최씨는 “‘계엄 정국’에선 연말 기분도 안 나는 데다 투자에서도 목돈을 잃어 최대한 절약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줄일 수 있는 소비’ 확 줄었다
김씨와 최씨처럼 국내 소비자들은 계엄 이후 외식과 숙박, 오락·스포츠 등에서 집중적으로 소비를 줄였다. 12월 둘째 주(12월 7~13일) 신용카드 총 이용액은 1년 전 대비 3.1% 감소했는데, 오락·스포츠 및 문화(-7.4%), 숙박 서비스(-7.1%), 음식 및 음료서비스(-4.5%) 등 분야에서는 더 줄었다. 영화·연극 표값, 스포츠 경기 입장료, 놀이공원과 레포츠 시설 이용료, 호텔이나 리조트 숙박비, 회사 회식비 또는 가족 외식비 등으로 쓰는 돈이 확 줄었다는 얘기다.
반면 같은 기간 의류 및 신발(2.9%), 교육 서비스(5.7%), 식료품 및 음료(2.7%) 부문에서는 1년 전 대비 카드 이용액이 늘었다. 이는 경기와 관계 없이 꾸준히 수요가 유지되는 분야다. 통계 당국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계엄 이후 ‘줄일 수 있는 소비’는 최대한 줄인 것으로 보인다”며 “‘외식 소비’가 줄어든 반면 ‘식료품 소비’는 늘어난 것은 그만큼 밖에서 사 먹기보다 식재료를 가지고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12월 둘째 주에 이어 12월 셋째 주(14~20일)에도 ‘덜 놀고 덜 즐기는’ 추세는 이어졌다. 전체 신용카드 이용액은 1년 전 대비 2.8% 늘어났지만, 외식·숙박·오락 소비는 줄어든 것이다. 셋째 주 신용카드 소비를 분야별로 보면 숙박 서비스는 1년 전 대비 8.3% 줄었고, 오락·스포츠 및 문화(-5.9%), 음식 및 음료서비스(-0.3%)에서도 감소세가 계속됐다. 소비 감소는 다른 지표에서도 확인된다. 소비 심리를 나타내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12월 88.4로 전월보다 12.3포인트 급락했다. 이는 코로나 사태 때인 2020년 3월(-18.3포인트) 이후 최대 폭 하락이다.
◇자영업자 고통은 가중
소비자들이 지갑을 동여매자, 안 그래도 역대급 내수 부진에 시달리고 있던 자영업자들의 고통은 더 커지고 있다. 서울 여의도에서 4년째 영업 중인 한 돼지고깃집은 지난달 3일 계엄 사태가 발생한 주에 점심 손님은 평소 대비 30%, 저녁 손님은 50%가량 줄었다고 한다. 특히 계엄 사태 후 첫 주말이었던 지난달 7일 저녁 예약은 90% 줄었다. 이 가게 사장은 “안 그래도 최근 몇 개월간 손님이 줄어 힘들었는데, 결정타를 맞은 느낌”이라고 했다.
최근 우리 경제의 내수 지표는 ‘부진 일변도’ 분위기다. 대표적인 내수경기 지표인 소매판매액지수는 2024년 3분기 100.6으로 1년 전보다 1.9% 감소했는데, 2022년 2분기(-0.2%) 이래 10개 분기 연속으로 감소세가 이어지는 중이다. 1995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최장 기록이다. 한 외식 업계 관계자는 “국민들의 ‘소비 자제’ 분위기는 계엄과 탄핵 정국을 거쳐 최근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제주항공 참사로 정점을 찍은 분위기”라며 “먹고 마시는 데 돈 쓰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는 어쩔 수 없지만, 내수 부진이 계속되면 우리 경제의 전체적 활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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