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세상]내란 보도, 삼인성호의 주술에서 벗어나야

기자 2025. 1. 5.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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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움츠렸던 내란세력은 우두머리의 선동과 함께 다시 일어났다. 극우 컬트 집단도 동원됐다. 나는 초기에 윤석열과 김용현이라는 망상가들의 돌출 행동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건은 이해관계로 묶인 권력 네트워크가 공유한 집단적 욕망의 표출이란 것을 깨닫는다. 본래 친위 쿠데타라는 것이 권력을 독점, 영속하기 위해 수권 집단이 헌정을 유린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번 일에서 더 심각한 것은 총리, 장관, 그리고 국민의힘 등 보수 권력 네트워크의 반응이다. 이들은 탄핵과 수사 등 헌정질서 회복 조치를 방해하며 내란을 사실상 옹호한다. 나는 이들의 행태가 수괴 처벌 이후에도 한국 내에 민주공화정을 부정하는 극단주의 집단 양성의 단초가 될 것을 우려한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다. 세 사람이 호랑이를 만든다는, 거짓도 여러 사람이 맞다고 하면 참으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사회심리학 연구가 이를 실증한 바 있다. 이 실험은 카드 한 장에 그린 기준선 한 개와 다른 카드에 그린 비교선 세 개 중 어느 것이 같은 길이인지를 맞히는 극히 단순한 것이다. 같은 공간에 있는 진짜 실험 대상자 한 명 외에는 다 가짜다. 이들은 연구진과 미리 짜고, 같은 길이 선이 버젓이 있는데도 더 길거나 짧은 선이 기준선과 같다며 입을 모으는 역할을 한다. 가짜 한두 명이 거짓말을 할 때는 실험 대상자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가짜가 세 명이 되는 순간부터 실험 대상자는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고 가짜들의 판단에 동조해 얼토당토않은 것이 기준선 길이와 같다며 고르기 시작한다.

이번 ‘윤의 난’은 친위 쿠데타 역사에서 전혀 새롭지 않다. 선거 패배로 권력이 약해진 대통령이 이에 불복, 계엄령으로 의회를 무력화하려는 전형적인 패턴이다. 그런데도 일부 보수 및 공영 언론은 내란세력과 그 동조자들이 부리는 삼인성호 주술에 걸리거나, 아니면 스스로 주술을 부리고 있다. 마술이 아닌 바에 생중계 상황을 모두가 직접 눈으로 본 것 이상의 진실은 없다. 그러나 이들은 내란세력의 거짓 주장을 확산해 그것을 참으로 만들어준다.

미국 언론학자 대니얼 핼린은 언론이 사안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합의’ ‘합법적 논쟁’ ‘일탈’로 구분한 바 있다. 합의 프레임은 이견이 없는 이슈에 관한 것이다(예를 들어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등). 합법적 논쟁 프레임은 정치 과정의 주요 행위자들의 합법적 논의와 경쟁에 대한 공정한 보도다. 일탈은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범법 행위다. ‘합의’나 ‘일탈’ 이슈에 대해 언론은 공정성을 지킬 필요 없이 일방적으로 우호 또는 적대적 태도를 취한다. 그런데 현재 일부 언론과 기자들은 내란 및 그 동조 세력의 주장이 뻔뻔하고 강할수록 그것을 일탈이 아닌 합법적 논쟁 사안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논란’ ‘갑론을박’ ‘정치적 합의’ 등의 용어로 일탈적 행위를 논쟁 사안으로 만들어준다.

헌정 파괴 행위에 일부 주류 정당과 정치 엘리트들이 미온적이거나 동조하는 행태는 세계 쿠데타 역사에 자주 등장한다. 반란세력 진압 실패로 인한 쿠데타 성공의 핵심 요인이다. 현재 한국의 내란세력과 그 동조집단도 참과 거짓을 같은 논란의 반열에 올리려 한다. 이 여론전으로 보수 성향 헌법재판관들이 탄핵 반대표를 던질 명분을 갖게 한다는 속셈일 것이다. 이미 구속된 행동대장들의 초기 자백 뒤집기도 가능하다. 언론은 일상의 출입처 제도 아래 그간의 방식 그대로 담당 정치인의 발언을 ‘객관적으로 가감 없이 그대로’ 충실히 옮겨주며 부지불식간에 내란 선전도구로 전락한다. 이번 중대 시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한국의 민주주의와 극단주의 우파세력의 미래가 달렸다. 언론이 정신 바짝 차리고 ‘전략적 궤변’을 화면으로, 음성으로, 자막으로, 제목으로 쉽게 옮겨주지 말아야 한다.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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