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병통치약인가 독약인가…스테로이드의 빛과 그림자
용량.사용 주기 무시하면 건강에 치명적인 적이 될 수도
(시사저널=노진섭 의학전문기자)
최근 '바르면 살이 빠진다'는 다이어트 크림을 팔던 업체들이 적발됐다.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는데도 허위광고를 한 것이다. 이들 업체는 특히 스테로이드 성분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원래 배합이 금지된 원료인 스테로이드 성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써 소비자가 오인할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스테로이드는 의사 처방이 반드시 필요하므로 화장품이나 건강기능식품 등 소비자가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제품에는 원칙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테로이드에 관한 사회적 관심과 우려가 한층 커졌다.
1940년대 류머티스 관절염 치료에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진 이후, 스테로이드는 현재까지 여러 질환의 치료제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콩팥 위쪽에 위치한 부신이라는 장기에서 코티솔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은 혈압과 혈당을 높여 아침에 활력을 느끼게 한다. 또 스트레스를 받거나 긴장 상태에 처하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코티솔 분비가 증가한다. 이로 인해 코티솔은 흔히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불린다. 코티솔은 이러한 기능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해 다른 생리 기능을 억제한다. 특히 면역체계를 억제해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과를 낸다.
코티솔의 이런 효과를 모방해 만든 의약품이 스테로이드다. 강력한 항염증 효과가 있어 호흡기·피부·관절·신경계 등 거의 모든 신체 조직에 발생한 염증 치료에 사용한다. 흡입제·경구약·연고·주사제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무릎과 허리의 만성 통증에 시달리는 고령층이 병원에서 맞는, 이른바 '뼈주사'도 스테로이드의 일종이다. 통증 완화에 탁월한 효과가 있어 이를 찾는 노인이 많다. 스테로이드는 관절염뿐만 아니라 비염·편도염 같은 질환에도 효과적이며, 염증을 억제해 부기와 통증을 줄이는 데 기여한다.
스테로이드를 용량에 맞게 잘 사용하면 면역을 적절하게 억제할 수 있다. 그래서 스테로이드는 면역이 과하게 활성화돼 발생하는 질환(류머티즘·궤양성 대장염·루푸스·크론병·베체트병 등) 환자나 장기를 이식받은 환자에게 필수 의약품이다. 피부질환(아토피·건선·습진·두드러기 등), 호흡기질환(만성폐쇄성폐질환 등), 내분비질환(부신 기능 저하증 등) 치료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림프종이나 백혈병에 대한 항암제로도 사용한다. 암세포 증식을 억제하는 작용과 항암 치료의 부작용(구토·메스꺼움 등)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스테로이드는 특히 쇼크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에게 필수적인 의약품이다. 이는 특정 물질이나 음식에 대한 과민반응(아나필락시스)이나 천식 발작 같은 응급 상황에서 빠른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안철우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염증에 다른 소염제가 효과를 보이지 않을 때 스테로이드는 훌륭한 대안이 된다. 또 혈압이나 혈당이 급격히 떨어지는 쇼크 상황에서도 스테로이드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영구적인 내분비계 교란 부작용 주의
스테로이드는 그 효과로 인해 만병통치약이나 명약으로 불릴 법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독약이 될 수 있다. 스테로이드는 면역을 억제하기 때문에 과도하게 사용하면 세균·바이러스·곰팡이 감염에 취약해진다. 또 재생 기능을 억제하므로 뼈·힘줄·피부·연골 등이 약해지는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 특히 관절염 치료를 위해 스테로이드를 장기간 사용하면 뼈 재생보다 손실이 증가해 골다공증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 실제로, 성인 천식이나 알레르기 치료를 위해 스테로이드를 장기간 사용할 경우 골감소증과 골다공증 위험이 높아진다는 국내 연구 결과가 있다. 특히 50대 이상 여성은 스테로이드 치료를 오래 받을수록 골다공증과 골절 위험이 2배 이상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테로이드는 근육 재생을 억제해 근육 손실 위험을 높이며, 성장기 어린이가 장기간 노출될 경우 성장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또 혈관 재생이 저해돼 고관절 질환(대퇴골두 무혈성괴사) 위험이 증가한다. 스테로이드는 피부질환 치료에 흔히 사용되는 연고에도 포함돼 있다. 피부염이나 두드러기에 효과적이지만, 피부 재생을 억제하는 부작용이 있어 피부가 얇아지고 멍이 쉽게 들며 안면 홍조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용량이 과하면 복부에 튼살처럼 보이는 피부질환(자색 선조)이 생길 위험이 있다.
스테로이드는 혈당을 높이므로 당뇨병 환자는 사용에 특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당뇨병 합병증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킬 수 있다. 또 혈당 상승을 위해 지방 대사에 관여하므로 특정 부위에 지방이 축적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안철우 교수는 "예컨대 스테로이드 연고는 보통 손가락 길이보다 더 많이 바르지 말라고 권장한다. 과도하게 사용하면 쿠싱증후군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이 달덩이처럼 붓거나 목 뒤쪽에 비정상적으로 지방이 축적되는 증상이다. 배에 지방이 쌓여 뚱뚱해지는 반면 팔다리는 오히려 가늘어지는 현상도 생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신질환(불면증·우울증 등), 안과 질환(녹내장·백내장 등), 혈관질환(고혈압·당뇨병 등), 위장질환(소화불량·궤양 등)도 스테로이드 오남용에 의한 부작용이다. 안철우 교수는 "스테로이드를 오남용하면 부작용이 극대화된다"며 "이에 따라 시상하부·뇌하수체·아드레날린 체계가 교란된다"고 말했다. 문제는 교란된 체계가 스테로이드를 끊어도 코티솔이 분비되지 않는 등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스테로이드 종류 중에는 운동 능력을 높이는 스테로이드도 있는데, 운동선수들이 그런 스테로이드를 투여해 도핑 검사에서 적발되기도 한다. 이 스테로이드도 남성이 여성화되거나 여성이 남성화되는 호르몬 교란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사용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게 안 교수의 지적이다.
감초 등 '숨은 스테로이드'도 있어
그만큼 부작용 범위가 넓고 정도가 심각하므로 스테로이드는 반드시 의사의 처방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 사용 용량과 투약 주기를 철저히 지켜야 스테로이드의 순기능을 기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환자의 면역 상태와 상황에 따라 강한 스테로이드 한 개를 사용하는 것보다 약한 스테로이드 여러 개를 사용하는 편이 이로울 수 있다. 또 당뇨병 환자에게 소량의 스테로이드가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는데, 이때 혈당이 과하게 높아진다. 높아진 혈당이 본래 수준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일주일이 걸리므로 의사는 스테로이드 사용 용량과 투약 주기를 조절한다.
관절염 통증을 완화하는 스테로이드 뼈주사는 일반적으로 3개월 주기로 맞아야 한다. 그러나 병원을 전전하며 매달 뼈주사를 맞는 사람이 있다. 이처럼 장기간 또 자주 노출되면 스테로이드 의존성이 생길 수 있다. 스테로이드를 끊기 어렵고, 스테로이드 투약을 중단하면 금단 증상까지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일부 환자는 증상이 좋아지자마자 스테로이드 투약을 임의로 중단한다. 투약 용량과 시기를 무시하면 이른바 스테로이드 리바운딩이 발생한다. 이는 염증이 더 심해지는 일종의 내성 현상이다. 따라서 스테로이드 용량을 줄일 때도 의사의 지침에 따라 서서히 줄이는 방법(테이퍼링)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스테로이드는 증상을 억제할 뿐,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장기적인 치료에는 적합하지 않다. 오랜 기간 사용할 수밖에 없다면 정기적으로 의사와 상담하며 부작용 여부를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사용하던 스테로이드를 자신이 사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평소에는 '숨은 스테로이드'를 조심할 필요도 있다. 안철우 교수는 "감초나 스테로이드를 투여한 육류 등 우리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스테로이드 식품이 있다. 이렇게 숨어있는 스테로이드에 자주 노출되면 내분비계가 교란된다. 이따금 그런 환자를 볼 수 있다. 약재나 식재료에 스테로이드 성분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도 용량 지켜야
스테로이드 부작용은 심각하므로 스테로이드가 없는 항염증제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흔히 소염진통제라고 하는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NSAIDs)는 두통·치통·생리통·몸살감기 등이 생겼을 때 의사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다. 아스피린·이부프로펜 등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가 알약·캡슐·주사제·시럽 등 다양한 제형으로 나와 있다. 이 의약품은 염증 유발 물질을 합성하는 특정 효소의 작용을 방해해 염증을 억제한다. 스테로이드가 없는 만큼 효과는 크지 않다.
스테로이드 성분이 없다고 부작용까지 없는 것도 아니다. 과량 복용하면 위장에 출혈이 생기거나 간에 독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소염 효과는 없고 진통 억제 효과만 있는 약(아세트아미노펜)도 있다. 그래도 특정 성분에 민감한 사람에게 다양한 과민반응이 발생할 수 있다. 혈관부종으로 얼굴·눈·구강·혀·인후두가 붓거나 두드러기와 발진이 생긴다. 과민반응이 발생하면 약물 복용을 즉시 중단하고, 복용한 약물의 이름이나 종류를 기록해 의사나 약사와 상담할 필요가 있다. 갑자기 숨 쉬기가 힘들거나, 목이 붓거나, 전신 발진, 어지럼 등 위급 상황이 생기면 즉시 응급실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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