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내란 성공’ 막은 건 시민들의 저항···김용현 공소장 속 그날의 기록
내란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공소장에는 시민들이 저항해 12·3 비상계엄 성공을 막은 정황이 여러 곳 등장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밝힌 ‘경고성 계엄’이란 주장과 달리, 긴박했던 상황에서 계엄군을 온 몸으로 막아세운 이들이 없었다면 현재도 계엄이 지속될 수 있었다.
5일 경향신문이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김 전 장관 공소장을 보면, 김 전 장관은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요구안 가결이 임박하자 지난해 12월4일 오전 0시30분 여인형 당시 국군방첩사령관에게 체포 대상자 중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대표·우원식 국회의장 등 3명을 우선 체포할 것을 지시했다. 여 전 사령관은 이 명령을 방첩사 체포조에 하달했다.
방첩사 체포조 49명은 이날 오전 0시48분부터 차례로 국회 인근에 도착했다. 하지만 국회에 모인 수많은 시민들로 인해 차량에서 내리지 못하면서 국회 수소충전소에서 대기 중이던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지원인력 10명 등 경찰 50명에 합류하지 못했다. 방첩사 체포조는 오전 1시3분 국회에서 계엄 해제요구안이 가결되면서 오전 1시45분 이후 복귀 명령을 받고 부대로 복귀했다. 검찰은 “국회 주변에 모인 시민들과 국회 직원들로 인해 체포조가 국회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계엄 해제요구안이 가결되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밝혔다.
시민들은 육군특수전사령부와 수도방위사령부의 국회 진입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김 전 장관으로부터 국회 봉쇄 지시를 받은 곽종근 당시 특전사령관은 김현태 707특수임무단장에게 이를 하달했다. 김 단장은 지난해 12월3일 밤 11시49분 헬기에서 내려 병력 23명과 함께 국회의사당 후문으로 가서 봉쇄를 시도했으나 이를 막는 국회 경비인력 등 10여명과 맞닥뜨려 10분간 몸싸움을 벌이다 포기했다. 이후 국회의사당 정문 봉쇄를 시도했으나 그곳에 모여있던 국회 관계자, 국회의원 보좌진, 기자 등 수백명으로부터 더 큰 저항을 받았다. 결국 정문 봉쇄까지 실패하고 약 30분간 대치 상태로 있게 됐다.
김 단장은 다음날 오전 0시34분 병력 15명과 국회의사당 우측면으로 이동해 망치로 유리창을 깨고 의사당 내부로 침투했다. 이 과정에서 국회 안에 있던 당직자 등이 소화기를 분사하는 등 계엄군 진입을 막아서면서 서로 충돌했다.
김 전 장관 지시를 받은 이진우 당시 수도방위사령관도 지휘계통에 따라 이를 수방사 2특수임무대대에 하달했다. 2특수임무대대는 계엄 선포 당일 밤 11시46분 국회1문 근처에 도착했다. 이 전 사령관은 국회 정문 봉쇄 지시를 했으나, 시민들이 이들이 타고 있던 중형버스 앞을 가로막거나 중형버스 밑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국회에 진입하지 못한 채 대기해야 했다. 수방사 35특수임무대대도 이날 밤 11시45분쯤 국회 인근에 도착한 뒤 걸어서 국회1문으로 이동했으나 시민들로부터 출입을 제지당했다. 이들은 경찰 도움을 받아 다음날 오전 0시24분에야 국회7문 옆 담을 넘어서 경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정대연 기자 hoan@kyunghyang.com, 강연주 기자 pla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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