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의 달인’ 트럼프, 한국 권력 공백 길어지면 ‘패싱’하거나 ‘압박’
권한대행 체제 길어지면 美 대북 협상에서 한국 건너뛸 가능성도
(시사저널=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
"상식적으로 미국 측이 계엄 시도를 미리 알았다면 윤석열 대통령을 말렸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지난해 말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사 연구 1∼6》을 완간한 이완범 한국학중앙원 교수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의견이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동맹국 지도자의 반(反)헌법적 조치로 안정이 손상될 것 같으면 지도자 교체까지도 고려했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0·26 사태 한 달 전에 주한 미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를 만나 '정권 교체'를 논했다고 한다. 글라이스틴은 1999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미국은 은연중 보인 말과 행동이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박정희 대통령 몰락에 영향을 준 건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고 썼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미국 측 핵심 인사가 남길 수 있는 최대한의 고백이라고 평했다.
'노골적 불만' 美…尹, 향후 美 도움받기 어려워
이번 12·3 계엄 사태에 대해 미국은 윤 대통령이 미국을 '패싱'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한 데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부장관은 "윤 대통령이 심각하게 오판(badly misjudged)했다"고 직격했다. 골드버그 주한 미대사도 비상계엄 선포 당일 밤 한국 정부 관계자 그 누구도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동맹국 지도자라도 반헌법적 조치로 안정이 손상될 것 같으면 지도자 교체도 고려하는 미국의 패턴에 따르면 앞으로도 윤 대통령은 미국의 도움을 받기 어려워 보인다.
지난해 12월초 미국이 계엄 사태에 대해 비판 기조를 이어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윤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후인 12월15일에야 한덕수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통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12월2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김홍균 외교부 차관과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부장관이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비상계엄 사태 이후 중단됐던 한미 간 주요 외교 일정을 완전히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12월27일 한덕수 대행마저 탄핵되면서 미국이 바라던 동맹국의 '안정'은 다시 요원한 상태가 됐다.
바이든 행정부 말기에 맞은 초유의 사태에서 이제 공은 오는 1월20일 출범할 트럼프 행정부로 넘어가고 있다. 트럼프는 한 달 가까이 한국의 계엄 사태와 탄핵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한국이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행으로 이어지는 시점에 한미 외교 일정의 공백은 최소한 올 상반기 내내 계속될 전망이다. 이는 트럼프가 생각하는 대북 접근과 대중국 견제 진용 구축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4년밖에 재임할 수 없는 트럼프는 첫날부터 한시가 급할 것인데 동아시아 핵심 동맹국인 한국의 권력 공백은 전반적인 외교 구상 이행에 도움이 될 리 없다. 그럼에도 트럼프 입장에서는 특별히 한국 상황에 관여할 여유나 이유가 없는 게 현실이다.
첫째, 트럼프에게 한국과 협의해야 할 북한 문제가 현재는 첫 번째 우선순위가 아니다. 현지시간 12월12일 공개된 타임 인터뷰에서도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와 가자에서 전쟁이 끝나면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했다. 집권 초기에 러·우 전쟁과 중동 가자 전쟁 해결이 최우선이다. 이 문제 해결에 주력하고 차차 다음 한국 대통령이 정해지면 그와 논의하며 김정은에게 접근해도 늦지 않은 시간표다.
혹시 한국 정국이 안정되지 않아 권력 공백이 길어져도 이미 김정은과는 직접 세 번이나 만난 적이 있는 사이다. 트럼프 성격상 한국이 아무리 동맹국이라도 '거래'가 가능하지 않은 상태라면 북한 문제를 풀어갈 때 얼마든지 한국을 제칠 수도 있다. 만약 김정은과 직접 거래해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면 트럼프로서는 마다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누가 한국의 다음 대통령이 되고 '거래' 상대방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현재로서는 불필요한 말은 아끼는 게 향후 협상 전략상 유리하다.
둘째, 트럼프에게는 '탄핵 트라우마'가 있다. 1기 집권 당시인 2021년 1월6일 의회 난입 사태와 관련해 트럼프도 임기를 일주일을 남기고 탄핵을 당한 바 있다. 2021년 1월13일 미 하원은 찬성 232명, 반대 197명의 과반 찬성으로 트럼프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트럼프 탄핵안이 하원에서 가결된 것은 2019년 말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이어 두 번째였다.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임기 중 하원에서 두 번이나 탄핵당하는 불명예 대통령이 됐다. 상원에서 탄핵안이 부결되어 임기 중 직무정지나 파면은 면했지만 '탄핵'이라는 단어가 반가울 리 없다. 그런 그가 동맹국 대통령의 탄핵을 굳이 언급하며 아픈 추억을 먼저 소환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트럼프, 거래 앞두고 한국 '전략적 외면'
현재 미국의 전문가들과 워싱턴 조야는 대체로 한국의 계엄 사태가 한미동맹을 흔들 위험요소가 되진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북한의 핵 위협과 북·러 밀착 그리고 중국의 도전과 같은 한반도 일대의 상황이 우호적이지 않은 만큼 한미 양국의 대중국·대러시아 공동 견제를 위한 협력 여지가 더 클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건 12·3 비상계엄 사태로 촉발된 탄핵 정국이 조속히 마무리되고 올해 상반기 중 한국의 다음 권력이 정해진 상황에서나 안정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곧 출범할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이 헌법 질서에 따라 회복력을 보인다면 인위적 개입을 섣불리 할 이유가 없지만 회복이 지연된다면 어떤 판단을 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한국의 회복이 더딘 경우 트럼프는 북한 문제만큼은 직접 나설 가능성이 있다. 또 방위비분담금, 대중 관계 설정, 무역적자 같은 문제도 미국의 입장 관철을 위해 기다리지 않고 압박을 가해올 가능성이 높다. 한국이 어수선했던 지난 연말 미 의회조사국도 '한국의 정치적 위기: 계엄령과 탄핵'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미 차기 행정부가 향후 관세나 주한미군 규모, 반도체 및 각종 기술 정책, 방위비 분담 협정과 같은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칠 변화를 추진할 경우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인 한국은 자국 입장을 주장하는 데 불리하다"고 진단한 바 있다.
상대의 불리함이 자국의 유리함으로 작용하면 아무리 동맹국이라도 기다리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한국이 조속히 회복하면 계획대로 한미 관계를 진행하면 되고,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면 그 틈에 강하게 압박해 이익을 취하면 되는 상황이다. 자비를 베풀거나 압박을 가하거나 미리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불확실성마저도 전략적 모호성으로 포장할 수 있는 게 외교라지만 우리가 맞고 있는 초유의 상황이 이를 허락할 여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의 상황을 속히 정리해야 할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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