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P 만평가, 만화 게재 거부되자 퇴사… 베이조스 역린 건드렸나
“언론 자유 부당하게 침해당해” 반발
미국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의 시사 만화가가 사주(社主)인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를 풍자하는 만평의 게재가 거부되자 반발해 신문사를 퇴사했다. 만평은 빅테크 거물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에게 구애하는 세태를 꼬집는 내용인데 작가는 “언론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WP에선 지난해에도 대선 직전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지지 사설 게재가 무산돼 논설위원들이 사퇴하는 등 논란이 일었다.
2008년부터 WP에서 만평을 그린 만화가 앤 텔네이스는 3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내가 WP를 관두는 이유’란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지금까지 의견 충돌을 포함해 많은 생산적인 대화를 나눴지만 내가 그린 대상이 문제가 돼 만화가 삭제된(killed) 적은 없었고, 이는 자유 언론에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죽인다를 뜻하는 단어인 킬(kill)은 언론계에서 삭제를 뜻하는 은어다.
텔네이스가 공개한 밑그림(rough)을 보면 베이조스와 마크 저커버그 메타 창업자,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 로스앤젤레스(LA)타임스 소유주 패트릭 순시옹 등이 돈 꾸러미를 들고 트럼프 동상 앞에 무릎 꿇고 있다. 베이조스 등은 최근 트럼프 취임식 준비를 위해 각 100만달러(약 14억7000만원)를 잇따라 기부했다. 월트디즈니의 대표 캐릭터 미키 마우스가 엎드려 있는 장면도 있다. 디즈니 소유 ABC방송이 트럼프의 과거 성 추문 사건을 보도하며 ‘강간’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명예훼손 소송을 당해 합의금 1500만 달러(약 215억원)로 종결한 것을 비꼰 것이다. 그는 “억만장자와 IT, 미디어 거물들이 차기 대통령에게 아첨하는 것을 비판하는 만평”이라고 했다.
앞서 베이조스는 2013년 8월 경영난을 겪던 WP와 계열사를 2억5000만달러(약 3680억원)에 인수했다. 베이조스는 트럼프 1기 (2017년 1월~2021년 1월) 때는 정부 정책에 대한 WP의 비판적 보도 등을 놓고 트럼프와 여러 차례 충돌했다. 그러나 2기 출범을 앞두고는 “트럼프가 8년 동안 더 차분해졌고 성장했다” “(연방 정부 개혁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도울 것” 등 잇단 덕담을 내놓으며 유화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베이조스는 트럼프, 정부효율부(DOGE) 수장에 지명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 등과 마러라고에서 만찬까지 같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만평가의 절필(絶筆) 선언이 나온 것이다.
텔네이스는 “편집장이 내가 비판하는 일을 막았고 그래서 WP를 떠나기로 했다. 고작 만평 작가인 나의 결정이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킬지는 모르겠지만 ‘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죽는다(Democracy Dies in Darkness)’는 말이 있듯이 계속해서 진실에 힘을 부여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죽는다’는 말은 WP의 세계적 특종인 워터게이트 보도의 주역 밥 우드워드가 즐겨 쓴 표현이다. WP의 새로운 사명으로 채택돼 트럼프 1기 정부 출범 한 달이 지난 2017년 2월부터 WP의 1면 제호(題號) 아래 등장했다. WP의 데이비드 시플리 여론 담당 에디터는 뉴욕타임스에 “우리는 같은 주제 칼럼을 이미 그 주에 게재했고, (비슷한 주제의) 다른 칼럼도 게재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려는 차원에서 만평을 내지 않기로 한 것”이라고 했다. WP는 지난해 대선에서도 베이조스 관련 논란에 휩싸였다. 사설을 통해 민주당 대선 후보를 공개 지지해 오던 전통이 베이조스의 반대로 무산됐다. 논란이 일자 베이조스는 직접 기명 칼럼까지 내고 “매체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결정이었다”며 자신의 결정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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