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우표가…새에게 쉼터를 주고 예술가를 격려했네

최원형 기자 2025. 1. 5.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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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정부가 철새 보호 위해 만든 우표
예술적 가치로 철새 서식지 확보에 기여
1934년 8월 발행된, 미국 연방정부의 첫 오리 우표.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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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어류·야생동물관리국(USFWS)은 1년에 한번씩 오리 등 새들이 그려진 우표를 발행해 판매한다. 넉넉한 자연을 배경으로 생생한 새들의 모습이 예술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이 ‘오리 우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자연 보존 수단”으로 꼽힌다. 기본적으론 철새 사냥을 승인해주는 허가증 같은 것이지만, 정작 이 오리 우표에 더 열광하는 것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 자연을 보존하고 싶은 사람, 예술을 아끼는 사람 등이다.

고생물학자이자 과학큐레이터인 대니얼 크셉카는 지난 27일 미국 과학잡지 ‘사이언티픽아메리칸’에 기고한 글에서 “크기 3제곱인치(7.62㎠)도 안 되는 오리 우표가 600만에이커(2만4281㎢)가 넘는 물새 서식지를 보호”한 흥미진진한 역사를 들려준다. 그는 코네티컷주 브루스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예술을 통한 보존’이란 제목의 오리 우표 전시회를 기획한 큐레이터이다.

안개 낀 습지를 배경으로 날아가는 새떼의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1900년 미국에서 오리는 엄청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인구가 늘어나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고기와 깃털을 얻으려는 상업적 목적으로 새들을 대량 살상하는 일들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새들은 주로 습지에 먹이를 찾고 둥지를 트는데, 무차별적인 개간으로 새들이 살 곳 또한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보존’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미국 연방정부는 1918년 ‘철새조약법’을 만들어 사전에 승인을 받지 않은 경우 보호 대상으로 지정된 철새를 사냥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1929년 ‘철새보호법’을 만들어 어류·야생동물관리국이 철새를 보호할 목적으로 땅을 사들이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금을 마련하는 방법은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여기에 돌파구를 마련해준 것이 바로 오리 우표다. 1934년 3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철새를 사냥하려는 16살 이상의 모든 사람은 특정한 우표를 사서 소지해야 한다는 규정을 담은 ‘철새 사냥과 보존 우표에 대한 법’(철새사냥우표법)에 서명했다. 철새를 사냥하는 사람들에게 1달러짜리 우표를 사게 하고, 그 수익금을 철새 보호구역을 만드는 데 쓴다는 아이디어였다. 정치 만화가이자 유명한 ‘보존운동가’였던 제이 노우드 ‘딩’ 달링(1876~1962)이 루즈벨트가 만든 ‘야생동물 보존을 위한 위원회’에 들어가 이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달링이 철새사냥우표법에 기여한 것은 단지 ‘법안 통과’뿐이 아니었다. 그는 1934년 처음 인쇄된 오리 우표에 사용된 도안을 그린 인물이기도 하다. 한 쌍의 청둥오리가 습지에 착륙하는 장면을 포착한 그림이다. 어류·야생동물관리국의 전신이 되는 기관인 생물학조사국의 장을 맡고 있던 달링은 오리 우표의 콘셉트를 점검하기 위해 골판지 위에 스케치를 했는데, 그것이 실수로 조폐국으로 넘어가 실제 우표 제작으로까지 이어진 결과였다.

1934년 발행된 첫 오리 우표에 실린 그림을 그린 정치 만화가이자 보존운동가 제이 노우드 달링. 위키미디어 코먼스

달링의 그림은 그 뒤 100년 동안 이어질 오리 우표의 핵심적인 전통과 정체성을 만들었다. 1935년부터 1949년까지 15년 동안 정부는 오리 우표의 디자인을 ‘야생동물 예술가’에게 의뢰했는데, 이들은 대체로 학자이자 박물관 전문가이기도 했다.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오리 우표 도안에 참여하길 원했고, 1949년부터는 오리 우표에 실릴 그림을 선정하는 공개적인 경연대회가 시작됐다. 1970년부터는 컬러로 된 그림 제출이 허용되어 작품의 완성도가 더 높아졌다. 당국은 우표의 예술적 가치를 활용해 철새 보호에 쓰일 기금을 더 많이 모을 수 있으며, 예술가는 영예를 얻고 그에 따른 판매나 전시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사냥을 위해 의무적으로 구매해야 하는 사냥꾼들 뿐 아니라 “탐조가, 자연 사진 작가, 야외 활동 애호가 등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야외 장소에서 야생동물을 볼 수 있도록” 오리 우표를 샀다.

오리 우표는 1년에 한 번 발행되는데, 물새 사냥이 보통 9~10월에 시작되기 때문에 해마다 6~8월에 공모가 이뤄진다. 공모 안내를 보면, “자연 서식지에서 살아 있는 새를 묘사한 장면이 담겨야” 하며 컴퓨터로 만들거나 인쇄한 이미지는 쓸 수 없다. 자격에 대해서는 별다른 요건이 없으나, 물새와 관련한 기본적인 생물학 지식(봄 풍경을 묘사했다면 새의 깃털이 그 계절에 적합한지 등)을 갖출 것, 예술적으로 구성(예술적으로 흥미롭고 눈길을 잡아끄는지 등)되어 있을 것, 자그마한 우표 크기로 인쇄하기에 적합할 것 등을 요구한다.

1935년에 발행된 오리 우표.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국 어류·야생동물관리국의 2025년 오리 우표 경연대회 안내. 지난해 수상작이 담겨 있다. 누리집 갈무리

오리 우표는 해마다 4천만달러를 모금하고, 수익금의 98%가 철새 보존을 위한 서식지를 취득하고 보호하는 데 쓰인다. 1934년 첫 오리 우표는 1달러씩 60만장가량 판매됐는데, 현재에는 25달러씩 150만장가량 팔린다. 어류·야생동물관리국은 오리 우표로 “1934년 이래로 12억달러 이상을 모금해, 600만에이커의 습지를 구매했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자연 보존 수단”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자연 보존을 위해 우표를 사용하는 아이디어는 연방 단위뿐 아니라 각 주로도 퍼져나갔고, 캐나다, 멕시코, 뉴질랜드 등 여러 다른 나라들도 이 같은 오리 우표를 발행하고 있다.

미국 브루스박물관 누리집에 올라온 오리 우표 관련 전시회 공고. 2022년 수상작인 제임스 하우트먼의 오리 우표 그림이 담겨 있다. 누리집 갈무리

오리 우표의 영향력은 미국 대중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코언 형제(에단 코언·조엘 코언)가 감독한 1997년 영화 ‘파고’의 마지막 장면을 들 수 있다. 이 영화에는 연거푸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자들과 이들을 쫓는 만삭의 시골 경찰관 마지(프랜시스 맥도먼드)가 등장하는데, 마지의 남편이 바로 취미로 오리 우표 공모전에 참가하는 ‘오리 우표 예술가’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이 체포된 뒤,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온 마지는 침대에서 남편과 잡담을 나눈다. 남편이 자신의 청둥오리 그림이 공모전에서 2위에 머물러 고작 3센트짜리 우표에 실리게 됐다고 불평하자, 마지는 “우편 요금이 올라 사람들이 작은 단위의 우표를 더 많이 쓸 거”라며 남편을 다독이고 격려한다. 영화는 선인들의 세계와 악인들의 세계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는데, 평범한 사람들의 선량한 마음을 드러내는 장치로 새들과 예술가들에게 터전을 마련해준 오리 우표가 쓰인 것이다.

영화에선 남편을 누르고 청날개 청둥오리 그림을 29센트짜리 우표에 싣게 된 우승자의 이름으로 ‘하우트먼’이 거론되기도 한다. 작가인 피트 하우트먼 등 하우트먼 형제들은 경연대회에서 15번이나 우상하는 등 오리 우표 그림으로 유명하다. 미국 전역에는 300~600명의 “진지한” 오리 우표 예술가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역대 오리 우표들에 담긴 멋들어진 새 그림들은 조류·야생동물관리국 누리집이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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