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국면 맞은 ‘가습기살균제’ 소송…대법, 유죄판결 뒤집어 [허란의 판례 읽기]
과실범 공동정범 해석에 제동
CMIT·MIT 인과관계 다시 쟁점
[법알못 판례 읽기]
가습기살균제 피해 사건의 형사재판이 10여 년 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대법원이 SK케미칼(현 SK디스커버리)과 애경산업 전 대표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던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고 다시 심리하도록 결정했기 때문이다.
대법원 형사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2024년 12월 26일 업무상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SK케미칼·애경산업·신세계이마트 전직 임직원 13명의 상고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2024도1856).
재판부는 제조사 간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립을 인정한 항소심의 판단이 법리를 오해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극명하게 엇갈린 1·2심 판결
이 사건은 하급심에서 극과 극의 판단이 나왔다. 2021년 1월 서울중앙지법(재판장 유영근 부장판사)은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CMIT·MIT 가습기살균제 사용과 폐질환, 천식 발생 혹은 악화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피고인들이 제조·판매한 가습기살균제 사용과 피해자들의 상해 및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됨을 전제로 하는 공소사실은 모두 범죄증명이 없다”고 판시했다(2019고합142).
1심은 특히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많은 피해가 발생한 사회적 참사였고 이를 바라보는 심정은 안타깝고 착잡하다”면서도 “2년여 동안 심리한 결과 CMIT 성분 가습기살균제는 유죄 판결을 받았던 PHMG 성분 가습기살균제와 성분·유해성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반면 2024년 1월 서울고법(재판장 서승렬 부장판사)은 대부분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한모 전 SK케미칼 사업본부장 등에게 각각 금고 4년이 선고됐고, 나머지 임직원들도 금고 2년 6개월에서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2021노134).
대립하는 ‘과실범 공동정범’ 해석
항소심은 유죄 판결의 핵심 근거로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립을 들었다. 재판부는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경쟁 관계에 있는 복수의 제조업자가 동일한 유형의 제품을 제조·판매하고 소비자가 시중에 유통되는 여러 종류의 제품들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히 예정돼 있다”며 “각 가습기살균제 제품의 개발·제조·판매에 관여한 사람들 모두가 공동의 주의 의무와 인식 아래 업무상 과실로 결함 있는 가습기살균제를 각각 제조·판매했다”고 판단했다.
항소심은 또 “피고인들은 제품 출시 전 수행하도록 요구되는 안전성 검사를 이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품 출시 후 요구되는 관찰의무도 이행하지 않아 피해를 확대시켰다”고 지적했다. 특히 “일부 피고인들은 가습기 제품의 용기에 허위 사실이 기재되도록 한 업무상 과실까지 존재한다”며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피고인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러한 항소심의 판단이 법리를 오해한 것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옥시 등이 제조·판매한 가습기살균제와 이 사건 피고인들이 제조·판매한 가습기살균제는 용도나 용법이 동일할 뿐 주원료의 성분, 체내분해성, 대사물질 등이 전혀 다르다”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활용하거나 응용해 개발·출시됐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형사책임 무한 확장’ 우려
대법원은 특히 항소심이 제시한 형사정책적 근거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재판부는 “소비자들이 주원료의 차이를 알고 구매하기 어려웠다는 점 등은 피고인들의 인식이나 의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일축했다.
나아가 “이러한 사정만으로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립을 인정한다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상품 제조·판매자들에 대한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립 범위가 무한정 확장된다”고 우려했다.
재판부는 “어떠한 제품이 개발·출시된 후 경쟁업체가 ‘기존 제품과 주요 요소가 전혀 다른 대체 상품’을 독자적으로 개발·출시한 경우에는 사망 또는 상해의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정을 공동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고 볼 여지가 없다”고 판시했다.
법조계는 이번 판결이 제조물 책임 사건에서 형사책임의 범위를 합리적으로 제한하는 선례가 될 것으로 평가했다. 상고심을 맡은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인단은 “원심이 과실범의 공동정범 법리를 위반해 그 범위를 무한정 확장될 수 있을 정도로 확대했다는 점을 대법원이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파기환송심에서는 크게 세 가지 쟁점이 다퉈질 것으로 예상된다. 첫째는 1심에서 부정됐던 CMIT·MIT 성분과 피해 발생 간의 인과관계다. 둘째는 개별 피고인들의 업무상 주의의무 위반 여부다. 셋째는 복합사용 피해자들의 경우 어떤 제품이나 유해물질로 인해 구체적인 피해가 발생했는지 여부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제조물 책임 사건에서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립 요건을 엄격하게 해석한 것”이라며 “다만 이는 형사책임에 한정된 것으로 이미 인정된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이나 국가배상 책임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한 변호사는 “성분이 완전히 다른 제품들 사이에서는 과실을 공유했다고 보기 어려운데 이를 모두 인정해버리면 향후 과실범의 공동정범에 대한 책임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될 수 있다”며 “파기환송심에서는 모든 쟁점이 다시 철저히 심리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돋보기]
가습기살균제 관련 소송, 13년째 진행 중
가습기살균제 사태는 2011년 4월 첫 사망자가 발생하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검찰은 2016년 1차 수사에서 신현우 전 옥시 대표 등을 구속기소했고 2019년 2차 수사에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등을 재판에 넘겼다.
대법원은 2023년 11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에 대한 제조·판매사의 민사 배상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피해자 A 씨가 옥시레킷벤키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위자료 500만원 지급을 명령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가습기살균제에 설계 및 표시상 결함이 있고 원고는 그 결함으로 인해 폐가 손상되는 손해를 입었다”고 판단했다.
국가의 배상 책임도 인정됐다. 대법원은 2024년 6월 환경부가 가습기살균제 유해성 심사를 불충분하게 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에게 300만~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안전성을 보장한 것과 같은 외관이 형성됐고 이 때문에 화학물질이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고 수입·유통돼 끔찍한 피해가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형사사건의 경우 가습기살균제에 쓰인 성분에 따라 판단이 갈렸다. PHMG 성분을 사용한 옥시의 경우 대법원이 2018년 1월 신현우 전 대표의 징역 6년을 확정하며 가습기살균제와 피해자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반면 CMIT·MIT 성분을 사용한 SK케미칼·애경산업의 경우 이번 대법원 판결로 공동정범 성립 여부와 인과관계 등을 다시 따져보게 됐다. 이날 대법원의 파기환송으로 가습기살균제 사태 형사재판은 빨라야 2025년에나 종결될 전망이다.
파기환송심에서는 복합사용 피해자들의 경우 어떤 제품이나 유해물질로 인해 구체적인 피해가 발생했는지를 세밀하게 심리할 것으로 예상된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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