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의 NYT 친북 기고문에 발칵 뒤집힌 워싱턴 정가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2025. 1. 5.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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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41회>]
리버먼 상원의원 “기절할 정도” “끔찍하다”고 비판
김성환 장관, “카터는 제3자, 그의 발언에 무게 안 둬 ”
카터 1994년 ‘대동갓 뱃놀이’ 이어 두 차례 더 방북
김정일, 중국 가거나 면담 피하며 안 만나줘
카터, 金사망하자 조전 보내며 방북 허가 요청하기도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 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드립니다.]

미국의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가 지난 29일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역대 최장수 미국 대통령이었던 그는 퇴임 후에 국제 평화와 인권 문제에 헌신하며,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전 세계적인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별세 소식에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 등 미국 정치권의 주요 인사들은 깊은 애도를 표하며 추모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도 2일 주한미국대사관을 찾아 조문록에 “평생을 국제 평화와 번영에 헌신했던 카터 전 대통령을 기억하며, 그의 유산이 밝은 미래로 이어지길 기원한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북한 외국문출판사(外國文出版社)가 운영하는 '조선의 출판물' 홈페이지는 지난 2021년 9월 발간한 화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 드린 선물' 화보에서 1994년 6월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부부한테서 받은 동장식 접시를 공개했다. /연합뉴스

퇴임 후, 카터의 업적은 분명 높게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성공한 전직 미국 대통령’이라는 평가 속에 전 세계의 원로로 활동해왔습니다. 1994년 김일성 북한 주석과의 ‘대동강 뱃놀이’로 이어진 그의 첫 번째 방북이 당시 한반도 긴장 완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 전체에서 남북한에 대해 다른 잣대를 들이대고, 북한의 대변인 처럼 활동한 것은 유감입니다. 카터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는 인권 문제를 제기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 대한민국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북한의 잔혹한 독재체제와 비확산 체제 위반, 북한 인권에는 침묵하며 대화만을 강조, 결과적으로 김일성 일가의 대남 정책에 활용됐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카터가 별세하자 미국 사회는 추모 분위기를 띄우지만, 그의 잘못된 대북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숨기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카터의 NYT 기고문에 경악한 워싱턴 정가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2010년 9월 16일이었습니다. 워싱턴 DC는 이날 카터 때문에 한바탕 큰 소동이 일었습니다. 워싱턴 DC의 정계, 관가(官街)와 싱크탱크의 한반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온종일 “카터 전 대통령의 뉴욕타임스 기고문 읽었느냐”는 말이 오고 갔습니다.

미사일이 열리면서 꽃을 든 손이 나오는 삽화와 함께 실린 카터의 기고가 날이 밝자마자 비판의 대상이 된 겁니다. 저는 그날 저녁까지 최소한 3차례의 한반도 관련 모임 안팎에서 카터의 기고에 대한 ‘탄식’이 나온 것을 목격했습니다.

2010년 8월 북한이 억류했던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 석방을 명목으로 방북했던 카터는 ‘북한은 협상을 원한다’는 기고에서 일방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북한이 미국·한국과 포괄적인 평화협상, 한반도 비핵화 협상 재개를 바란다는 분명하고 강력한 신호들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당시 납치했던 선박 송환과 이산가족 상봉 제의 등을 ‘긍정적인 메시지’로 규정하며 지체 없이 즉각 대화 재개에 나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북한이 6자회담을 먼저 깨고 나간 것이나,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에 대한 비판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기고문이 나온 직후, 이날 오전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이에 대한 비판이 공개적으로 표출됐습니다. 한때 카터와 같은 당에 소속돼 있었던 조 리버먼 상원의원은 ‘기절할 정도(stunning)’, ‘끔찍한(awful)’이라는 단어를 써 가며 그를 비판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이 우리에게 (북한으로부터) 여러 차례 샀던 똑같은 말을 사라고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가 천안함 사태를 언급하지 않았다”고도 지적했습니다.

미 국무부의 커트 캠벨 동아태 차관보(현재 부장관)도 “천안함 사건에 대한 언급이 그의 기고에서 빠진 것에 대해 놀랐다”는 말로 리버먼 의원의 입장에 동조했습니다. 이날 오후 한·미경제연구소(KEI)의 세미나에서 잭 프리처드 KEI 소장은 “카터 전 대통령의 기고문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로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습니다.

◇김정일 못 만난 두번째 방북

2010년 8월 방북한 카터는 예상과는 달리 2박3일간 평양에 머물렀지만 끝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 못하고 귀국했습니다. 1994년 김일성과의 ‘대동강 뱃놀이’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카터 주연의 ‘한반도 드라마’는 재연되지 않았습니다.

2010년 8월 27일 북한 순안공항에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86·왼쪽)이 7개월 동안 북한에 억류돼 있었던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31·오른쪽)와 포옹하고 있다. 25일 평양에 도착한 카터는 목표했던 곰즈의 석방을 이끌어냈지만, 26일 갑자기 방중(訪中) 길에 오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는 데는 실패했다. /연합뉴스

2010년 8월 25일 평양에 도착한 카터는 미국인 곰즈의 석방을 이끌어냈지만, 26일 김정일이 갑자기 중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그를 만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1994년 방북 당시 그의 아버지인 김일성을 만나 영변 핵시설 동결 및 남북 정상회담 개최 용의 발언을 이끌어냈지만 두 번째 방북에서는 김정일의 얼굴도 보지 못했습니다.

카터가 1994년 김일성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을 떠올리며 김정일 면담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북한을 방문, 민망한 상황을 자초했다는 분석이 많았습니다. 김정일이 미국의 전직 대통령을 방문하게 한 후 중국으로 떠나버림으로써 당분간 미국과의 대결구도를 계속 가져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해석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당시 취재에 따르면, 오바마 정부 내에서는 카터가 김정일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다소 안도하는 기류가 있었습니다. 카터가 미국인 곰즈를 데리고 평양을 출발한 후 이례적으로 그의 방북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다시 한번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강조한 것이 이에 대한 방증입니다.

국무부의 필립 크롤리 공보담당차관보는 성명을 발표 “(미국) 정부는 이번 방북을 제안하거나 주선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곰즈의 건강이 미국에서 즉각적인 치료를 받지 않으면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판단을 토대로 정부는 북한의 방북 제안을 수용하겠다는 카터 전 대통령의 결정에 동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굳이 공개하지 않아도 될 내용을 밝힘으로써 카터가 방북 당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논의한 것을 바탕으로 대북정책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 의사를 표명한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카터가 억류된 미국인의 석방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승인했지만, 크게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정통한 워싱턴 DC의 외교소식통은 “오바마 대통령이 카터 전 대통령을 크게 예우하는 것도 아니고, 카터 역시 오바마에게 두드러지게 친근감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카터가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곰즈 구출을 명목으로 ‘비공식 특사’가 된 것은 카터가 워낙 적극적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카터와 오랫동안 친분이 있는 조지아대의 박한식 교수가 북한과 구체적인 일정을 협의했습니다.

◇다시 논란 부른 세 번째 방북

카터는 2011년 4월 세 번째 이자 마지막 방북에서도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카터를 단장으로 하는 전직 국가수반(首班) 모임인 ‘디 엘더스(The Elders)’ 회원들은 2011년 4월 26일 베이징을 떠나 평양에 도착, 백화원 영빈관에서 박의춘 외무상을 만났습니다. 디 엘더스 방북단에는 카터 외에 마르티 아티사리 전 핀란드 대통령, 그로 브룬트란드 전 노르웨이 총리,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이 포함됐습니다.

카터는 이때 “1994년 김일성 북한 주석이 자신을 매우 따뜻하고 친근하게 대했는데 이번에도 환영받았다”고 블로그에 썼습니다. 김일성과 ‘(대동강에서) 잊지 못할 6시간의 뱃놀이’를 했으며 그의 사망에 대해 슬퍼한 것도 소개했습니다.

북한의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을 겪은 이명박 정부는 카터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011년 4월 26일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카터의 방북 후, 김정일의 메시지를 가져 올 가능성과 관련, “(남북 간 채널도 있는데) 북한이 굳이 제3자를 통해 우리와 얘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김 장관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은 이미 우리와 여러 대화채널이 열려 있으며 북한 매체를 통해 ‘우리 민족끼리’를 얘기하고 있지 않으냐”며 이 같이 말했습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손든 이)이 부인 로잘린 카터 여사와 함께 1994년 6월 한반도 핵 위기 때 북한을 방문한 뒤 판문점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하고 있다./연합뉴스

김 장관이 카터를 ‘제3자’로 지칭한 것은 그가 어떤 메시지를 가져오든지크게 무게를 두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입니다. 김 장관은 카터의 방북 효과에 대해서도 “현재로서는 그다지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북한이 굳이 민간인을 통해 우리측에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로 평가절하했습니다. 또 “이번 방북은 순전히 개인적 방문일뿐, (미국) 정부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브리핑은 카터가 주도한 방북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기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미 양국 정부는 카터 전 대통령의 이번 방북이 순수한 의도에서 출발했을지는 몰라도 북한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습니다.

김 장관이 우려했던 대로 카터는 평양에 이어서 서울에 와서 북한의 입장을 대변했습니다. 특히 그는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 실망스러운 발언을 했습니다. “북한에 인권 문제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직접 통치하지 않는 입장에서 간섭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과 미국이 의도적으로 대북 식량 지원을 중단한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다.” 카터는 전 세계 분쟁의 중재자로 나서며 ‘휴머니스트’로 살아왔지만, 북한 인권 증진을 위해 이후에도 의미 있는 발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 김정일 사망때 보낸 조전에서 “방북하고 싶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했습니다. 그러자 카터는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앞으로 조전(弔電)을 보냈습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카터는 조전에서 북한 주민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영도자로서 새로운 책임을 지게 된 김정은 부위원장에게 성과가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북한 주민을 굶어 죽이고, 대한항공 폭파사건을 비롯한 테러를 자행해 온 독재자에게 조전을 보내는 것은 전직 미국 대통령이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조전에서 “북한을 다시 방문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습니다. 김정은은 그러나 카터의 방북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카터는 다시 평양을 가고 싶어했으나, 그의 방북 기록은 2011년 4월에서 더 이상 연장되지 못했습니다.

P.S.

1. 2011년 4월 카터가 세 번째 방북했을 때 ‘북한자유주간’ 행사가 서울에서 개최되고 있었습니다. 행사 주최측은 카터가 방북한 다음날 서울 세종로에서 납북자 이름 부르기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의 이미일 이사장은 “꿈에도 잊지 못하는 가족들이 조국과 가족에게 돌아오길 바라며 정성 들여 이름을 부르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구순(九旬)의 그의 어머니 김복남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 이성환씨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지난 60년간 북한에 억류된 이들의 이름이 28일 새벽까지 불렸습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나 몸이 약한 이 이사장은 철야 행사가 끝난 후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병상에서 전화가 연결된 이 이사장은 목이 쉬어 있었습니다. 카터가 김정일을 만나지 못한 채 서울을 방문한 것이 자연스레 화제에 올랐습니다. 그의 목소리엔 카터에 대한 노여움이 묻어났습니다.

“김정일 일가는 8만명이 넘는 납북자들의 생존 여부에 대해 알려주지도 않는 범죄 집단이에요.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분이 그런 사람과 대화를 하겠다고 가서 지난해에 이어 또 속고 오다니….” 장애 때문에, 아버지의 납북으로 힘들게 살아온 이 이사장은 카터보다 김정일 체제의 본질을 더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카터는 평화와 인권 증진이라는 이상을 위해 헌신하며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균형을 잃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가 북한을 방문하면서도 이미일 이사장을 비롯한 납북자 가족, 탈북자, 북한인권단체 관계자들을 만나는 균형감을 가졌더라면 “북한 독재체제를 대변했다”는 비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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