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찌 자식을 몰라보겠나”...그림도, 글도 뛰어났던 명동 멋쟁이의 恨 [나를 그린 화가들]
천경자는 원색의 체크무늬 코트를 입고 명동을 활보하던 멋쟁이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명동 ‘인싸’였던 셈입니다. 그는 화가뿐만 아니라 문인들과도 우정을 나눴습니다.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와 특히 친하게 지냈죠. ‘광장’을 쓴 최인호는 그의 재능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인기 수필가였지만 천경자는 근본적으로 화단의 슈퍼스타였습니다. 전문가 집단에게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성도 겸비했습니다. 천경자의 개인전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고, 관객들은 그에게 싸인을 받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했죠.
천경자는 자신이 쥔 것들을 모두 놓고 홀연히 세계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창작의 영감을 위해 명예로운 교수직을 포기하고 전 세계를 다녔습니다. ‘미인도’ 위작 논란이 그의 다재다능한 면모를 집어삼켜 버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천경자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흥미와 재능이 있었습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갑니다. 이때쯤 부유했던 집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천경자의 아버지가 노름으로 전답을 날렸기 때문입니다.
이후 천경자는 김남중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유부남이었죠. 천경자는 통제력을 잃고 두 번째 남자와 헤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임신했는데, 이별을 통보받습니다. 아이를 뗀 후에 그가 다시 천경자를 찾아오면서, 두 사람은 질긴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천경자는 셋방살이하면서 친정 부모를 모시는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끼던 여동생 옥희는 결핵에 걸렸습니다. 언니를 따라 화가가 되려던 옥희는 홍익대 입학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생의 죽음과 남자와의 갈등, 가난으로 힘든 시기에 천경자는 그림을 그리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특히 광주에 있는 뱀집에 가서 뱀들을 관찰하며 스케치했습니다.
천경자는 “징그럽고 무서운 뱀을 그림으로써 나는 생을 갈구했고, 그 속엔 저항과 뜨거운 열기가 공존하는 저력이 심리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회상했습니다.
당시 한국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대한미협 전시는 부산 칠성다방에서 열렸는데요. 천경자가 다방 주방에 처박아둔 ‘생태’가 소문나면서 사람들은 그림을 보기 위해 주방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예술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천경자는 홍익대 교수이던 김환기로부터 같은 대학 채색화 교수로 와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천경자는 당시 광주에 살았는데요. 두 번째 남자는 본처와 천경자 사이를 여전히 왔다 갔다 했죠. 그는 광주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서울로 갑니다.
하지만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임신한 소식을 알게 된 천경자는 두 번째 남자와 결혼식 없는 피로연을 서울에서 엽니다. 그의 남편은 본 부인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에 다시 발길을 끊죠.
서울에서 천경자는 홀로 엄마이자, 교수, 작가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냅니다. 남편과는 애증의 관계를 이어갑니다. 남편과 싸우고 헤어질 결심도 하지만 화해하는 일이 계속됐습니다.
천경자의 남편은 1960년 참의원(상원)에 당선됐지만,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교도소에 수감됐습니다. 남편이 옥살이를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서울에서 생활했습니다. 천경자는 이 행복한 시절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천경자는 학창 시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일본에서 가난한 유학생으로 지냈습니다. 비 오는 날 다른 학생들이 알록달록한 우산을 가지고 다닐 때 그는 비를 다 막지 못하는 할머니의 낡은 양산을 쓰고 다녔죠. 이 그림 속 마당에는 천경자가 학창 시절 쓰지 못한 색색의 우산들이 놓여 있습니다.
천경자는 강렬한 원색을 흰색으로 중화한 채색화를 그렸습니다. 그는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이같은 채색 기법은 서양의 유화를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세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여행을 가려면 교수직을 병행할 수 없었습니다. 안정적인 교수직을 포기하고 작가로서 승부를 건 겁니다. 천경자는 여행지에서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돈이 모이면 또다시 여행을 갔습니다. 그렇게 그는 미국과 남태평양,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시아 등 전 세계를 다녔습니다.
천경자는 여행을 다니며 그린 풍경화 속에 자신과 닮은 여인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림이란 것이 자기의 심장을 부딪쳐 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근데 이건 막 보니까 허깨비 같고 기가 막히더라고요. 이 꽃은 제가 즐겨 그리는 블루메리아라고 남방계에서 많이 피는 꽃인데 그걸 막 보니까 테크닉이 더덕더덕 돼 있어요. 저는 어떻게 하든지 말끔하게 하거든요. 그게 좋아서요.”
“그림이란 것이 자기 나름의 심혈을 기울여 그린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분신이고 자기 자식 같은 것 아니겠어요. 저는 오래 전부터 방문 열고 집에 들어올 때 제 그림보고 ‘집 잘 보았냐’하고 돌아옵니다. 제가 그 정도로 그림과 밀착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그림은 통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감정 후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 천경자를 ‘자식도 몰라 보는 정신 나간 작가’로 만들어버린 셈입니다.
리움미술관 큐레이터 시절 천경자와 함께 전시를 기획한 최광진 박사는 “나의 기준에서 보면 ‘미인도’는 위작”이라며 “국립현대미술관이 진품임을 주장하려면 지금이라도 공식적인 발표를 통해 납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고, 그럴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한 작가를 정신이상자로 몰고 간 것에 대한 사과와 함께 위작임을 시인하고 ‘미인도’를 폐기처분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상처받은 천경자는 절필 선언을 하고 큰 딸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에 자식처럼 소중히 간직한 작품 93점을 기증했죠. 그는 2015년 고국이 아닌 뉴욕에서 타계했습니다.
천 화백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유족은 ‘미인도’와 관련한 국가 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2025년 새해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천 화백의 한은 늦게라도 풀릴 수 있을까요.
<참고문헌>
-최광진(2016), 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 : 천경자 평전, 미술문화
-천경자(2006),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 천경자 자서전, 랜덤하우스중앙
-천경자(2006),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랜덤하우스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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