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주식 부호 판도 대격변…정의선·조정호 웃고 이재용·김범수 울었다
현대차·메리츠 등 선전…알테오젠·크래프톤 창업자 10위권 첫 진입
삼성·SK·LG·롯데와 카카오 등 신구 재벌 총수 주식 가치 줄줄이 하락
(시사저널=이석 기자)
한국 경제는 지난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유례없는 내수 침체와 수출 둔화,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성장률이 크게 둔화됐다. 반도체와 철강, 석유화학, 이차전지 등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던 기업들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치 리스크까지 불거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기습적인 비상계엄 선포와 릴레이 탄핵으로 해외투자자들의 '탈한국' 현상이 가속화됐다. 원-달러 환율은 1500원대 언저리까지 치솟았다. 1997년 외환위기 때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비슷한 수준이다. 증시 역시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지난해 말 코스피지수는 연초 대비 10% 가까이 하락했다. 같은 기간 대만 가권지수(TAIEX)와 홍콩 항셍지주, 일본 닛케이지수, 싱가포르 스트레이츠타임스지수 등이 각각 16~29% 상승한 것과 대비된다.
결국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5%에서 2.1%로 크게 낮춰잡았다. 2.5%에서 2.3%로 하향 조정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보다도 조정 폭이 더 컸다. 이런 추세라면 일본처럼 한국 경제의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OECD와 IMF 등 국제 경제기관과 투자은행들은 한국 경제의 올해 성장률이 2%를 밑돌 것이라고 전망한다.
상위 50명 주식 가치, 1년 만에 3조원 증발
이런 추세는 주식 부호들의 주식 가치 변화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국내 상장기업 주식 부호 상위 50명의 주식 가치는 2024년에만 3조원 가까이 증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과 SK, LG, 롯데, 한화, 신세계 등 주요 그룹 총수 및 총수 일가의 주식 평가액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사실은 시사저널과 기업분석 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매년 진행하는 88개 대기업집단의 오너 일가 886명의 주식 가치 전수조사 결과에서 확인됐다. 2024년 12월27일 종가 기준으로 국내 주식 부호 상위 50명의 주식 가치는 83조3873억원이다. 연초 조사(86조3197억원) 때와 비교할 때 2조9324억원(3.4%) 하락했다. 2023년 어려운 경영 환경 속에서도 상위 50인의 주식 가치가 소폭 상승한 것과 비교된다.
개별 그룹별로 보면 삼성그룹 오너 일가가 2024년에도 상위권을 독차지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모친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여동생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과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의 주식 가치를 모두 더하면 26조7856억원이다. 삼성 오너 일가 4명의 주식 평가액이 조사 대상 886명(105조7710억원)의 25.3%에 이를 정도다.
이 중에서도 1위는 단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차지했다. 이 회장의 주식 가치는 지난해 12조1671억원으로 연초(14조3755억원) 대비 15.4%나 떨어졌다. 이 회장이 보유한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삼성생명의 주식 가치가 크게 하락한 결과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해 주가가 40% 넘게 급락하면서 투자자들로부터 '4만전자'라는 비아냥까지 받아야 했다. 외국인들이 10조원 넘게 삼성전자 주식을 팔면서 주가 하락을 이끌었다. 인공지능(AI) 대장주인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주가가 170%나 오르고, 경쟁사인 SK하이닉스 역시 23% 오른 것과 비교된다. 올해 상황도 녹록지 않다. 주요 증권사들은 삼성전자 목표주가를 줄줄이 하향 조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은 여전히 압도적인 주식 부호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조정호 메리츠그룹 회장 상승률 1위
홍라희 전 관장과 이부진·이서현 사장은 각각 3, 4, 6위를 기록했다. 이들의 주식 가치도 각각 5조4824억원, 4조9023억원, 4조2337억원으로 연초 대비 20.1% 하락했다. 하지만 이들 4명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견고하다는 게 재계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반면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역대급' 경영성적표를 받았다. 해외 판매 호조로 2022년부터 3년간 사상 최대 매출을 경신할 것으로 예상된다. 덕분에 정몽구 명예회장과 정의선 회장의 주식 가치 역시 크게 상승했다. 정몽구·정의선 부자의 주식 평가액은 각각 4조3859억원, 4조379억원으로 연초 대비 5.2%, 14.1%씩 증가했다. 주식 부호 순위는 5위와 7위로 그룹별 평가액은 삼성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지난해 10대 그룹 오너 일가 중에서 주식 가치가 상승한 곳은 현대차, HD현대, CJ그룹 등 3곳에 불과하다"면서 "특히 현대차그룹의 경우 고부가가치 차량 판매 확대와 우호적인 환율로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하면서 오너 일가의 주식 가치가 가장 많이 상승했다"고 설명했다.
886명의 조사 대상 중에서 주식 평가액이 가장 많이 증가한 인사는 조정호 메리츠금융그룹 회장인 것으로 나타났다. 조 회장의 주식 가치는 2024년 초 6조6957억원 수준이었다. 하지만 1년여 만에 9조9213억원으로 48.2%나 증가했다. 연초까지 6만원을 오르내리던 메리츠금융지주 주식이 연말에 100만원을 돌파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조 회장은 메리츠금융지주 주식 51.25%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덕분에 현대차, SK, LG, 한화 등 주요 그룹 총수들을 누르고 주식 부호 2위 자리에도 올랐다. 재계에서 메리츠금융을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모범적 사례로 평가하는 이유다.
메리츠금융은 2023년 보험 업계 불황에도 연간 순이익 '2조원 클럽'에 처음 가입했다. 지난해 상반기에도 1조3000억원대 당기순이익을 기록하면서 반기 기준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이런 추세라면 2024년에는 처음으로 영업이익과 순이익이 사상 최대를 기록할 것이라고 증권가는 예상하고 있다. 경영진의 이런 노력에 투자자들이 화답하면서 주가 역시 우상향 곡선을 그리는 것으로 평가된다.
박순재 알테오젠 대표가 조 회장의 뒤를 이어 상승액 2위를 차지했다. 박 대표의 주식 평가액은 연초 7889억원에서 연말 3조720억원으로 289.4%나 증가했다. 주식 가치 증가율로만 치면 박 대표가 사실상 전체 1위다. 바이오 기업인 알테오젠의 경우 'ALT-B4' 기술을 앞세워 올해 주가가 급등했다. ALT-B4는 면역항암제를 기존의 정맥주사(IV) 방식에서 피하주사(SC) 방식으로 전환하는 기술이다. 항암제 투여 기간을 5분의 1로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11월에는 일본 제약사 다이이치산쿄와 2000만 달러 규모의 기술 이전 계약도 체결했다. 때문에 연초 8만~9만원대를 오르내리던 주가는 연말 30만~40만원대로 급등했다. 박 대표의 순위 역시 쟁쟁한 재벌 총수들을 누르고 8위를 기록했다. 연초 대비 16계단이나 상승한 기록이다.
뒤를 이어 장병규 크래프톤 대표와 장형진 영풍 고문,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순으로 주식 가치 상승액이 높게 나타났다. 장현진 고문과 최윤범 회장의 주식 가치 상승은 지난해 중순부터 본격화된 장씨 일가와 최씨 일가의 경영권 분쟁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초 40만원대였던 고려아연 주가는 12월 장중 한때 200만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지난 75년간 고려아연 지분을 나눠 보유해온 장씨와 최씨 일가의 지분 가치가 상승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실적 살아난 크래프톤, 주식 부호 순위 '껑충'
하지만 크래프톤의 사례는 상황이 다르다. 1인칭 슈팅게임(FPS) '배틀그라운드'를 개발한 크래프톤은 2021년 상장하면서 화려하게 증시에 데뷔했다. 공모액만 4조3098억원으로, 코스피 역대 공모액 중 두 번째로 높았다. 하지만 2022년 들어서면서 이 상승세가 꺾였다. 실적이 투자자들의 기대감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주가가 날개 없는 추락을 이어갔다.
2024년 들어 실적이 살아나면서 주가 역시 반등했다. 크래프톤의 매출은 지난해 3분기 누적 기준으로 2조922억원을 기록했다. 창사 이후 처음으로 연매출 2조원을 돌파한 것이다. 3분기까지 누적 영업이익도 9670억원으로 연간 1조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연초 20만원 전후이던 크래프톤 주가 역시 30만원대로 뛰었고, 창업주인 장병규 의장의 주식 가치는 1조5302억원에서 2조2114억원으로 44.5%나 증가했다.
장 의장의 주식 부호 순위는 12위로 아쉽게 10위 안에 진입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구광모 LG그룹 회장(13위·1조8421억원), 최태원 SK그룹 회장(14위·1조7586억원), 정몽준 HD현대 최대주주(15위·1조1851억원),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16위·1조6048억원), 이재현 CJ그룹 회장(20위·1조2846억원),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21위·1조2345억원), 조현범 한국앤컴퍼니 회장(24위·1조582억원), 김남정 동원그룹 회장(25위·8563억원) 등 전통적인 재벌 회장은 물론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17위·1조4917억원), 이동채 에코프로 회장(19위·1조4917억원),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22위·1조2119억원), 방준혁 넷마블 창업자(23위·1조655억원) 등 신흥 부호 순위까지 넘어섰다.
삼성 오너 일가, 1년 만에 6조원 가까이 날려
주식 평가액이 가장 많이 하락한 곳은 삼성그룹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 등 삼성 오너 일가 4명이 지난해 날린 주식 가치만 5조9982억원에 이른다.
류광지 금양 회장과 이동채 에코프로 회장 등도 지난해 주식 평가액이 1조원 넘게 증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발포제 생산 및 판매 기업 금양은 2022년부터 이차전지 신사업을 추진해 왔다. 박영준 부산시장과 MOU(양해각서)를 맺고 부산 기장에 1조3000억원 규모의 생산시설도 짓고 있다. 이 과정에서 회사의 자금난이 악화됐다. 주가 역시 연초 10만원대에서 최근 2만원 안팎까지 추락했다. 이 회장의 주식 가치는 연초 1조7944억원에서 2862억원으로 80% 넘게 하락했다.
에코프로 창업자인 이동채 회장 역시 25년 전 설립한 이차전지 회사를 매출 7조원대 대기업으로 키워 주목을 받았다. 자회사인 에코프로비엠과 에코프로에이치엔을 더한 '에코프로 3형제'의 시가총액이 한때 현대차에 필적할 정도였다.
하지만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으로 에코프로 실적이 정체기에 빠졌다. 2023년에는 이 회장이 미공개 정보 이용 거래 등의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되면서 회사 주가는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했다. 이 회장은 지난해 9월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경영에 복귀했다. 하지만 회사 실적은 1년여 만에 반 토막이 났다. 창업자의 복귀 효과를 기대했던 시장은 크게 실망했다. 주가는 연일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한때 30만원을 찍었던 에코프로 주가는 현재 5만원대로 추락한 상태다. 이 때문에 이 회장의 주식 가치 역시 연초 2조5175억원에서 연말 1조4293억원으로 43.2%나 감소했다.
이 밖에도 방시혁 하이브 의장과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 겸 경영쇄신위원장이 주식 부호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박현주 회장(10위, 2조3010억원)을 제외한 인사들의 주식 가치는 소폭 하락했다. 'BTS의 아버지'로 불리는 방 의장은 2021년 하이브가 상장하면서 주식 부호 순위에 처음 올랐다. 한때 평가액이 3조원에 육박하면서 재벌들을 제치고 전체 7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 산하 레이블인 어도어의 민희진 전 대표와 갈등을 겪었다. 여론전이 거듭되면서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고, 주가 역시 하락세를 보였다. 방 의장의 주식 가치는 지난해 2조5212억원으로 소폭 하락하면서 9위에 머물렀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 역시 지난해 어려운 한 해를 보냈다. SM엔터테인먼트 주가 시세조종 혐의로 구속되면서 카카오는 비상경영체제로 전환했다. 김 창업자는 지난해 10월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여전히 불구속 상태에서 계속 재판을 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카카오 주가는 1년여 만에 반 토막이 났다. 김 창업자의 주식 가치 역시 연초 3조1011억원에서 2조2948억원으로 26%나 하락했다. 주식 부호 순위에서는 8위에서 10위로 2계단이나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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