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14명 중 8명이 죽었다…가슴에 묻은 아버지가 한 일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성수영 2025. 1. 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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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유럽 최고 인기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1827~1901)
끝없는 상실의 굴레에서
영원을 건져내다
죽음의 섬(1883). 히틀러가 한때 소장했던 가장 유명한 버전이다.

자식이 죽으면 땅이 아니라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남자의 가슴에는 아주 많은 무덤이 있었습니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열네 명. 그중 다섯 명은 어린 시절을 넘기지 못했고, 세 명이 남자보다 먼저 숨을 거뒀습니다. 전쟁과 전염병으로 죽음이 일상이었던 그 시절 유럽에서도 이만한 불행을 겪은 집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내가 경제적으로 무능한 가장이어서 그래. 먹을 것도 입힐 것도 아이들에게 제대로 마련해주지 못해서….” 남자는 자책했습니다. 그도 그럴 법했습니다. 남자는 ‘안 팔리는 화가’였습니다. 돈이 없어 때로는 콩 한 자루로 온 가족이 끼니를 때워야 했고, 미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한 귀부인이 찾아왔습니다. 몇 년 전 남편을 잃은 그녀는 곧 다른 남자와 재혼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림을 의뢰하고 싶어요. 세상을 떠난 전 남편을 추억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려주세요. 하지만 초상화는 안 돼요. 새 남편이 싫어할 테니까요. 그러니 풍경화를 그려주세요. 내가 ‘꿈을 꿀 수 있는 그림’을요.”

죽은 이를 추억하며 꿈을 꿀 수 있는 풍경화라니. 정말로 까다로운 요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 아르놀트 뵈클린(1827~1901)의 머릿속에는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숱하게 바라보며 그의 무의식에 깊이 새겨진 하나의 풍경. 뵈클린은 곧바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완성된 작품의 이름은 ‘죽음의 섬’. 귀부인의 요청 그대로, 죽음이라는 꺼림칙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에는 보는 사람을 꿈꾸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뵈클린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가 됩니다.

죽음을 그린 화가 뵈클린의 삶과 작품, 그리고 우리 모두가 마지막으로 도착하게 될 그 섬에 대한 이야기.

자화상(1873).

 죽음, 죽음, 죽음

뵈클린은 1827년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한때 사업으로 성공을 거뒀지만, 부동산 투기에 손을 댔다가 가산을 탕진한 인물. 그래서 집안 형편은 넉넉지 못했습니다. “화가가 된다니 말도 안 된다! 공장에 취업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거라.” 미술 학교에 가고 싶다는 뵈클린에게 아버지가 이렇게 호통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 덕분에 뵈클린은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 입학해 미술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뵈클린에게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졸업 증명서에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학장은 이렇게 썼습니다. “중요한 인재입니다.”

꿈 많은 20대 청년으로 자라난 뵈클린은 거장들의 그림을 보고 실력을 키우기 위해 벨기에로,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 경비는 그림을 그려 팔아서 충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서로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부모님은 무일푼 화가인 뵈클린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뵈클린은 여성에게 말했습니다. “몇 년만 기다려. 이탈리아 로마로 건너가서 그림을 배우고 올게. 조금만 더 실력을 키우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뵈클린은 작별의 입맞춤을 한 뒤 로마로 떠났습니다.

역병(1898).

그렇게 로마에 도착한 지 불과 2주일. 편지 한 통을 받아서 든 뵈클린은 망연자실해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사랑하는 그녀가 뇌염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뵈클린 자신도 열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경험을 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죽음과 만난 순간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젊은 뵈클린은 몸과 마음의 충격에서 회복했고, 몇 년 뒤인 1853년 평생의 동반자인 안젤라를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이로써 뵈클린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잠시 걷히는 듯했습니다. 부부는 사이가 아주 좋았고, 둘 다 아이를 많이 낳고 싶어했거든요. 부부가 아이를 총 열네 명이나 낳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내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뵈클린은 아이를 정말로 좋아했다. 어린아이들의 지치지 않는 활력, 생명력이 주는 상쾌함, 장난기와 유쾌함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특히 갓난쟁이들에게는 열정적인 사랑을 쏟았다.”

그런 만큼 아이 여덟 명의 죽음은 뵈클린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냈습니다. 결혼 이듬해 태어난 첫아이는 로마를 휩쓴 전염병에 걸려 돌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1858년 로베르트는 장티푸스로, 1860년 랄프는 알 수 없는 고열로…. 태어난 해조차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1861년 태어난 딸 루시아가 일곱 살 때 집 안에서 놀다가 떨어지는 건축 자재에 맞아 세상을 떠나자 가장 아끼던 딸을 잃은 뵈클린은 반쯤 미쳐버려 집을 나갔습니다.

뵈클린이 그린 루시아의 초상화.

아내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를 급히 따라가야 했다. 뵈클린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 같아서.”

피에타(1885). 왼쪽 아이들 중 루시아의 얼굴이 보인다.

뵈클린은 자신의 마음속에 묻은 그 아이들을 평생 그리워했습니다. 죽기 전까지 그는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에 보고 싶은 아이들의 얼굴을 그려 넣곤 했습니다. 자녀를 떠나보내고 슬픔에 잠긴 부모에게 죽은 아이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습니다.

 안 팔리는 화가

뵈클린의 작품은 40대가 될 때까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못 그려서는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는 기억력이 좋고 묘사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습니다. 어떤 풍경을 딱 한 번 보고는 작업실에 돌아가 그 장면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게 뵈클린의 특기였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뵈클린이 손을 움직이기도 전에, 그림은 그의 머릿속에서 완성된다”고요.

악기를 연주하는 판(1875). 뵈클린은 그리스 신화 속 반은 인간, 반은 염소인 존재인 판을 자주 그렸다. 여러 가지 의미를 한 번에 표현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켄타우르스의 전투(1872~1873).

뵈클린의 목표는 인간 정신의 밑바닥, 무의식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림은 영혼을 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손장난에 불과하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보는 사람의 무의식을 뒤흔드는 충격을 주기 위해, 그는 신화 속 인물과 괴물을 재해석한 독창적인 작품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예술계는 이런 작품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이고 웅장한 그림을 선호했던 예술계에 이런 작품은 너무 기괴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예술계의 비판, 가난과 슬픔에 좌절한 뵈클린이 꿈을 꺾을 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근처 농가에서 얻어온 콩 한 자루로 온 가족이 끼니를 때우던 서른 살 무렵의 어느 날, 뵈클린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제 더 이상 꿈을 좇을 순 없을 것 같아. 나도 가장이잖아. 스위스 용병에 입대할 생각이야. 그동안 미안했어. 돈은 넉넉히 부칠 수 있을 거야.” 그러자 아내는 벌컥 화를 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군인이랑 결혼한 줄 알아? 나는 화가랑 결혼했어. 그런 소리 할 시간 있으면 계속 그림 그려. 살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렇게 헌신적인 아내의 뒷바라지 덕에 뵈클린은 그림에만 몰두하며 자기 작품을 더욱 갈고닦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40대에 들어선 뵈클린의 삶에 조금씩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1859년 바이에른(현재 독일) 왕실이 그의 그림을 구입하고, 바이에른의 한 대학에서 그에게 교수직을 제안한 겁니다.

바닷가의 빌라(1864).

그리고 이 시기, 뵈클린 특유의 작품 양식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냅니다. 1863년 작인 ‘바닷가의 빌라’는 뵈클린이 어떤 화가인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어둡고 음울한 하늘과 거친 바다, 바다를 마주 보고 있는 고대 로마 양식의 빌라, 그리고 외로운 여인의 뒷모습. 실제 장면이 아니라 일종의 ‘상상 속 풍경화’지만 뵈클린의 생생한 묘사력 덕분에 이 그림은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장면과 같은 힘과 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렬한 자연의 힘 앞에 선 나약한 인간을 표현한 이 작품은, 대중에게도 널리 인기를 얻으며 뵈클린을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죽음과 마주하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죽음과 함께하는 자화상. 바이올린의 줄은 오직 하나 뿐이다. 원래 줄이 하나였을까? 아니면 뵈클린이 태어났을 때는 여러 줄이었다가, 하나씩 끊어지고 마지막 하나만 남은 걸까?

그리고 마침내 뵈클린은 죽음을 마주 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인간으로, 예술가로 성숙한 덕분이었습니다. 마흔다섯 살 때인 1872년 그린 이 자화상에서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화가의 귀에는 바이올린의 애절하고 우울한 선율이 들려옵니다. 그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건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당장이라도 해골은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나무를 톡톡 두드린 뒤, 화가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일 듯합니다. “내가 항상 네 곁에 있다는 걸 명심해.”

하지만 화가는 죽음이 자신의 옆에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여전히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해골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 건, 결코 겁먹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바이올린 선율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거기서 영감을 얻으려고 하는 중입니다. “삶과 죽음이 서로 붙어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계속 연주하기나 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야.”

죽음의 섬(1880). 맨 처음 그려진 버전이다.


그렇게 뵈클린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점차 깊이 탐구하게 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죽음’과 ‘영원함’이 연결돼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2년 뒤 완성된 그를 상징하는 작품 ‘죽음의 섬’에 이런 생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수의를 입은 여성과 망자를 싣고 잔잔한 물 위에 떠 있는 죽음의 섬으로 향하는 조각배. 섬 안의 숲은 어두워 얼마나 깊고 넓은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아는 모든 떠난 이들은 저 안에서 고요하고 평화롭게 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영원히.

“세상을 떠난 남편을 추억하며 꿈을 꿀 수 있는 풍경화를 만들어 달라”는 귀부인의 요청을 받고 그려진 이 그림은, 그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 덕분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같은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아 뵈클린이 그린 작품은 총 다섯 점. 일반 가정에도 걸 수 있도록 인쇄된 저렴한 복제본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덕분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이 작품은 전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였습니다. “독일 베를린의 모든 집안에 이 그림이 걸려있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뵈클린은 자신의 작품이 사람들의 영혼에 닿아 울려 퍼지기를 바랐습니다. 마치 음악처럼요. 의도는 적중했습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교향시 ‘죽음의 섬’을 작곡했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 “이 작품 속에 들어간 꿈을 꿨다”고 썼습니다. 그만큼 이 그림에는 인간의 무의식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훗날 조르주 데 키리코,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초현실주의자들도 이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의외의 인물들도 이 작품의 팬이었습니다. 러시아 공산당의 창시자 블라디미르 레닌, 프랑스의 전쟁장관 조르주 클레망소 등 수많은 정치인과 관료가 사무실이나 서재 벽에 이 작품의 복제본을 걸었습니다. 심지어 나치 독일의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원본 중 하나를 구입해 소장하기도 했습니다.

 생명과 죽음의 섬

오디세우스와 외눈박이 거인(1896).

50대 중반이 된 뵈클린은 부와 명예를 얻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 그는 큰 존경을 받는 화가가 됐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삶에 어려움이 없던 건 아니었습니다. 장티푸스 등 전염병에 걸려 죽을 위기를 넘긴 적도 많았고, 우울증은 계속 그를 괴롭혔습니다. 특히 그림을 그릴 때 쓰는 오른쪽 어깨에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걸린 건 그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안겼습니다. 1892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항상 곁에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덕분이었습니다.

자화상(1893).

뇌졸중에서 회복한 뒤 그린 1893년 자화상은 이런 그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줍니다. 그림을 그리던 뵈클린은 몸을 돌려 작업실에 찾아온 뜻밖의 손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작업을 방해받은 탓에 얼굴에는 조금 언짢은 기색이 있지요. 그를 찾아온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바로 질병(뇌졸중)이라는 게 미술사학자들의 해석입니다. 그림을 통해 뵈클린은 말하는 듯 합니다. “작업을 방해받다니 불쾌하구먼. 하지만 별것 아냐. 돌려보내고 계속 작업하면 그뿐이야.” 그렇게 죽음과 마주하면서도 삶을 충실히 살아내던 그는 1901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뵈클린의 삶은 상실과 질병의 고통으로 가득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마다 뵈클린은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뵈클린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큰 흐름이고, 집착하고 절망하면 고통스러울 뿐이라는 것을요.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슬픔에 절망하기보다 삶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요.

여름날(1881).

이는 고대 중국의 사상가 장자(莊子)가 지락(至樂)에 남긴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장자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통곡하다 어느 날 깨달음을 얻고 울음을 그쳤습니다. 그의 깨달음을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을 생각해 봅시다. 그때 우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이 무섭거나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없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린 사람도 없었습니다. 죽음도 이와 마찬가지라는게 장자의 이야기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모여 잠시 우리를 만들었다가, 다시 흩어져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태어나기 전의 시간을 걱정하고 슬퍼하지 않듯이, 죽음 후의 시간도 너무 슬퍼할 필요 없다고 장자는 말했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우주의 거대한 순환 속 잠시 생겨났다가 가라앉는 물거품일 뿐. 그러니 상실을 너무 슬퍼할 필요 없다고,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이 순간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요.

생명의 섬.

이 ‘생명의 섬’(1888)은 장자의 이야기가 뵈클린의 작품과 맞닿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차분하다 못해 침울한 색으로 그린 죽음의 섬과 달리 생명의 섬은 형형색색의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꽃이 만발한 나무 아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로 가득한 초원에서 사람들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뵈클린은 이 작품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그림은 죽음의 섬 반대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깨달음. 그 덕분에 ‘죽음의 섬’은 단순히 신비로운 풍경화를 넘어, 보는 사람의 영혼에 울림을 주는 또 다른 여정의 시작이 될 수 있었습니다.

*참사로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이번 기사는 Arnold Bocklin : die Gemalde(Rolf Andree 지음), Arnold Bocklin(Kunstmuseum Basel 펴냄), Arnold Bocklin(Aflred Schmid 지음), Arnold Bocklin(hayward Gallery 펴냄), 김영민 서울대 교수의 칼럼 [김영민의 문장 속을 거닐다] 속 '슬픔이 파도처럼 들이닥칠 땐 가파른 언덕을 기어올라 山으로 가자'(2022)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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