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의 심장이 다시 뛴다…투자 늘고 일자리 생길 것”[글로벌 현장]
“이렇게 작은 땅에서 원자로를 운영할 수 있다고요?”
지난 12월 19일 미국 미시간주 밴뷰런 카운티 팰리세이드 원자력발전소 인근 소형모듈원자로(SMR) 준비 현장. 서쪽 방향의 미시간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웠다. 부지 곳곳에 43개 천공과 20개 관측용 우물을 뚫어 토양 견본 채취와 지하수 검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한 직원은 3억 년 된 회색 셰일층을 뽑아낸 원통형 견본을 보여주며 “땅이 충분히 단단하고 원전 운영에 위험요소가 없는지 확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원전업체 홀텍인터내셔널은 이곳에 3.5세대 원전으로 분류되는 SMR-300 두 기를 설치할 예정이다. SMR 현장에서 차로 5분 거리의 팰리세이드 원전(800MW)을 내년 중 재가동하고 2030년 상업운전을 목표로 하는 세계 최초 ‘원전 클러스터’ 프로젝트다. 기존 원전의 인프라와 인력 풀, 환경영향평가 등을 고스란히 활용하면서 새로운 원전 산업의 기반을 만들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3.5세대 SMR은 물을 냉각재로 사용하지만 기존 원전처럼 냉각수를 외부에서 계속 공급하지 않아도 되는 피동형 냉각 방식으로 안전성이 강화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돌아오는 ‘원전 붐’
현재 SMR은 아직 가동 중인 것이 없다. 홀텍을 비롯해 미국 테라파워, 뉴스케일파워, 엑스에너지 등 주요 원전들은 잇달아 SMR 개발과 부지 선정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상용화는 시간 문제일 뿐 미래 대세가 원전, 특히 안전성을 보강하고 비용을 낮춘 SMR이 될 것이라는 데 많은 에너지업계 관계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개발로 데이터센터 수요가 폭증하고 기후 위기에 대응하며 경제 안보 관점에서 에너지원을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만한 대안이 없어서다.
현장에서 살펴본 SMR 부지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하다고 했다. 켈리 트라이스 홀텍인터내셔널 사장은 “25에이커(0.1㎢) 부지에 SMR 2기를 설치할 수 있고 거기서 640MW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화력발전으로 이 정도 전력을 생산하려면 160배의 땅이 필요하고 매주 석탄과 폐기물을 열차 단위로 실어 날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5에이커는 미국의 고등학교 평균 면적 정도다.
지역 주민들은 ‘원전의 심장이 다시 뛰는’ 일에 들뜬 분위기가 완연했다. 닉 컬프 홀텍인터내셔널 선임 매니저는 “나를 포함해 이곳 직원은 거의 모두 이 지역 출신”이라며 “원전 산업이 잘되면 지역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를 모두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밴뷰런·캐스 카운티 경제개발청인 ‘마켓원’ 소속 잭 모리스 전무는 “팰리세이드 원전 재가동으로 지역경제에 해마다 3억 달러 가치가 신규로 창출될 것”이라며 “SMR 가동까지 포함하면 경제적 영향은 훨씬 더 클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전력을 확보하면 데이터센터를 유치할 수 있고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선순환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는 “빅테크 기업으로부터 이 지역에 투자하겠다는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며 “최근 6개월 동안 20~30건 문의가 들어왔다”고 했다.
컬프 매니저는 “홀텍이 SMR 건설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미시간대에서는 원자력공학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다”며 “이 분야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해 원자력공학으로 진로를 정하는 지역 고등학생들이 늘었다”고 전했다. 밴뷰런 카운티의 존 폴 국장은 “지역 주민 대다수가 이 프로젝트를 지지하고 있다”며 “젊은이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홀텍이 지역 주민들에게 금전적으로 보상을 하느냐는 질문에는 “세수가 늘어나고 일자리가 생기는 것 자체가 보상”이라고 했다.
“10년 후 美 원전 100기 증가”
원전 산업 붐은 전 세계적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약 10년 동안 침체됐던 원전 산업 기후변화 대응, 인공지능(AI)발 데이터센터 수요 증가, 경제 안보 강화, 신재생에너지의 낮은 효율성 등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원전만 한 것이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중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전 세계 원자력발전 용량이 2023년 406GW에서 2050년 950GW 수준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는 2050년까지 원전 용량을 현재의 3배로 늘리기로 하고 SMR 등 원전 산업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트라이스 사장은 향후 10년간 세계 각국에 SMR을 중심으로 200~300여 기의 원전이 새로 생길 것(착공 단계 포함)”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에만 50~100여 기가 생길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수십 기의 원전을 건설하고 안전하게 운영해 온 한국 기업들의 역량도 크게 주목받고 있다. 현대건설은 2021년부터 홀텍인터내셔널과 SMR 개발 및 사업 동반진출을 위한 협력계약을 체결하고 일찌감치 시장 선점에 나섰다. 팰리세이드 SMR 프로젝트 건설을 맡게 될 뿐만 아니라 영국, 우크라이나 등 전 세계를 상대로 SMR 건설사업 수주전에 도전하고 있다. 정구혁 현대건설 북미법인장은 “오랜만에 원전 건설을 재개하는 미국은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을 성공적으로 짓는 등 최근 건설 경험이 풍부한 한국 업체와의 협업을 선호한다”며 “이런 수요가 세계 곳곳에 적지 않다”고 전했다.
韓 기업 원전 건설 역량도 ‘주목’
삼성물산은 미국 뉴스케일파워에 7000만 달러를 투자하고 글로벌 SMR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기술 협력하고 있다. 작년 6월엔 루마니아 원자력공사를 비롯한 글로벌 원자력 리딩기업 5개사와 루마니아 SMR 사업의 전 과정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이후 2024년 7월부터 미국 플루어, 뉴스케일, 사전트앤룬디 등 글로벌 엔지니어링 기업 3개사와 공동으로 기본설계(FEED)를 착수하면서 루마니아 SMR 사업을 본궤도에 올렸다는 평가다.
루마니아 SMR 사업은 뉴스케일 기술을 기반으로 기존 도이세슈티 지역에 위치한 석탄화력발전소를 462MW 규모의 SMR로 교체하는 사업으로 2030년 상업 운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약 1년간 기본설계에 대한 공동 수행을 거친 뒤 향후 이어질 EPC 최종계약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것이란 설명이다. 루마니아 SMR 프로젝트는 유럽으로 확대하는 교두보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최근 스웨덴 민간 SMR 개발사인 칸풀넥스트와 스웨덴 SMR 사업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스웨덴 정부는 2023년 자국 원자력 로드맵을 공개하면서 2035년까지 최소 2500MW 규모의 원전설비를 확충하고 2050년까지 SMR을 비롯해 대규모 대형 원전 건설을 진행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DL이앤씨는 미국 SMR 개발사인 엑스에너지와 손잡고 관련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2023년 1월 2000만 달러 규모의 전략적 투자를한 데 이어 엑스에너지가 SMR 대표모델로 개발 중인 ‘Xe-100’을 적용한 SMR 플랜트 운영 및 유지 보수를 위한 기술을 공동으로 개발 중이다. DL이앤씨는 SMR 가동 시 발생하는 높은 열을 또 다른 친환경 에너지원인 수소 및 암모니아 생산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SMR 사업과 접목한 친환경 에너지 밸류체인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SMR 플랜트 EPC(설계, 기자재 조달, 시공)뿐만 아니라 운영 및 보수 분야까지 SMR 전 주기의 기술 경쟁력 확보를 기대하고 있다. 엑스에너지는 현재 글로벌 화학기업 다우(Dow)와 손잡고 북미 지역 최초로 공업지대 내 무탄소 전력 및 고온의 공정열 공급을 위한 SMR 건설을 추진 중이다. 2029년 상업운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밴뷰런(미국)=이상은 한국경제 특파원, 심은지 건설부동산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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