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9km 동서트레일 새해 첫 구간을 걷다 [미리 가보는 동서트레일]

서현우 2025. 1. 3.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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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구간 르포
원효봉 9부능선에서 바라본 예산군 일원. 저 멀리 동쪽 지평선을 향해 동서트레일은 산을 넘고 넘어 구불구불 걸어가도록 설계되고 있다.

동서트레일이란?

충남 태안에서 경북 울진까지 한반도를 동서로 잇는 849km 걷기길이다. 5개 시·도, 21개 시·군, 87개 읍·면의 239개 마을을 지난다. 55구간의 정규코스 외에 충북 충주, 제천을 우회하는 우회코스도 생길 전망이다. 우리나라 중부지방을 동서로 연결하는 최초의 걷기길이며, 기존에 운영되는 걷기길들을 엮는 형식으로 조성되고 있기에 많은 예산을 들이지 않는다.

특히 동서트레일이 주목받고 있는 것은 '백패킹이 가능한 걷기길'이란 콘셉트로 만들고 있기 때문. 걷다가 트레일 곳곳에 지정된 장소에서 화기를 이용한 취사와 야영이 합법적으로 가능하다. 게다가 이런 백패킹 장소들은 되도록 넓은 캠핑장 형태가 아니라 소수의 백패커만 머물 수 있는 작은 공간으로 구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산림청 담당직원은 "캠핑장이 아닌 장소기 때문에 현재 법령상으로는 화기를 사용한 취사는 불법이라 2025~2026년에 백패킹법을 만들 예정"이라고 전했다. 백패킹 관련법이 만들어지면 단순히 동서트레일을 넘어서서 한국 백패킹 문화 저변 확장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원효봉 초입은 키 큰 낙엽송과 멋드러진 리기다소나무 숲이다. 

한반도 중심을 횡단하는 동서트레일. 총 849km 중 2024년까지 개방된 구간은 양쪽 끝부분인 태안 1~4구간 57km와 봉화 47구간 15km, 울진 55구간 20km다. 나머지 구간들은 순차 개방될 예정인데 그중 가장 먼저 개방되는 길은 1~4구간에서 이어지는 5~12구간과 47구간과 55구간을 잇는 48~54구간이다. 2025년 예정.

조성 사업을 주관하는 산림청으로부터 GPS데이터를 받아 두 달에 걸쳐 먼저 걸어보기로 했다. 먼저 5~12구간이다. 서산 팔봉산에서부터 홍성 오서산까지 ㄱ자 형태로 뚝 떨어진다.

데이터를 보니 없던 길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다. 상당 부분 내포문화숲길을 따른다. 원효깨달음길과, 내포역사인물길, 백제부흥군길 일부 구간들을 엮는 형식이다.

내포문화숲길은 이제 조성된 지 15년이 되어가는 길이다. 지자체가 조성한 길 중에서 처음으로 지난 2021년 국가숲길에 지정되기도 할 만큼 그 규모와 품질은 이미 검증을 마쳤다. 거기다 이젠 동서트레일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이미 걸어봤다고 하더라도 다시 한 번 걸어볼 가치가 생긴 것.

금술샘 아래 조망터에서 바라본 들머리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일대. 사진 중앙 마루금 바로 뒤에 충남도청 소재지 내포신도시가 숨어 있다. 

5~12구간 중에선 8구간이 가장 걷는 맛이 좋아 보인다. 가야산 원효봉 자락을 오르기에 시원한 조망을 만나볼 수 있고, 국보인 마애삼존불상도 볼 수 있다. 마애삼존불상은 높이 2.8m의 불상으로 표정이 마치 웃는 모습처럼 보여 '백제의 미소'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단지 부담스러운 것은 길이. 총 약 20km다. 원활한 여정을 위해 유튜브 '러닝해영' 조해영씨와 함께 속도전을 펼치기로 했다.

다시 걷는 내포문화숲길

동서트레일은 서에서 동으로 걷는 것이 정방향이다. 하지만 8구간은 역방향으로 걷는 것이 좀 더 낫다. 이유는 두 가지로 첫 번째는 교통편.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도착하는 덕산스파정류장에서 20분 정도 걸으면 시점인 윤봉길의사기념관에 도착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원효봉 구간의 존재다. 정방향으로 걸으면 잔잔한 마을길과 숲길을 오래 걸은 뒤 원효봉 오르막에 달라붙어야 한다. 먼저 가파른 오르막을 끝내놓고 비교적 평지구간을 걷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다.

호젓한 상가리 마을길.  

겨울 햇살이 희미하게 드리우는 가운데 윤봉길의사기념관 앞에 선다. 이곳은 1년간 리뉴얼 공사가 진행 중이라 2024년 내내 닫혀 있었다. 이제 공사 마무리 단계며 지나가는 도보 여행객들이 둘러볼 수 있도록 2025년 2월 초 개방 예정이다.

펄럭이는 태극기에 담긴 의사의 의기를 생각하며 걸음을 옮긴다. 매연을 뿜어대는 차량 옆으로 숨을 참고 종종걸음을 내닫아 아람파크빌아파트 옆 원효봉 들머리로 스며든다. 펜션들을 거쳐 숲길에 들어서자 이제 화생방에서 나온 훈련병마냥 제대로 숨통이 트인다.

동서트레일은 원효봉(605m) 정상을 지나지 않는데 시간을 내 올라볼 요량으로 걸음을 서두른다. 내포문화숲길 등산리본을 따라 울창한 낙엽송과 리기다소나무, 신갈나무와 굴참나무 사이를 지난다. 사람이 거의 지나가지 않은 듯 떨어진 낙엽들은 다 빳빳해 겨울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난다.

"길이 끊겼는데요?"

황금빛 길에 현혹된 탓인지 길을 잘못 들었다. 원효봉 1.2km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계곡을 버리고 왼쪽 길을 따라 능선을 탔어야 했는데 오른쪽으로 간 것이 화근이었다. 내포문화숲길 등산리본이 끊긴 길 위에 희롱하듯 나풀거린다. 국가지점번호 12-2지점이라는데 길은 주변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억지로 사면을 뚫고 남서쪽 능선으로 옮겨 붙었다. 없는 길을 억지로 간 탓에 모두 숨을 헐떡거리고 시간을 지체했다. 원효봉 정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동서트레일 길을 정직하게 걷기로 한다.

곧 뜬금없는 돌담이 나타난다. 의상암 터다. 원효봉은 '원효'란 이름이 붙은 이유가 있다. 이 산 곳곳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기틀을 세운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전설이 전해진다. 화엄의 교리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암자도 곳곳에 100여 개 건립한 바 있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그 터. 바로 옆에는 수량이 풍부할 땐 황금빛을 띤다는 금술샘도 있다.

원효대사 해골물의 현장

의상암 터를 지나 내포문화숲길을 우직하게 따르면 원효암 터로 향한다. 두 개의 커다란 돌탑이 있는 곳에서 코스 최고의 조망이 나온다. 예산군 일대 평원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가까이로는 수암산과 용봉산 사이 안부 너머로 충남도청 소재지 고층 빌딩들이 뾰족하게 솟아 있다. 저 멀리 지평선에 희미한 마루금들이 보인다. 동서트레일을 따라 저 마루금을 넘고 넘어 동해바다까지 달음박질할 나날을 상상해 본다.

원효암 터는 가깝다. 우람한 바위를 등진 너른 공터다. 그 유명한 '원효대사 해골물'의 현장이다.

"교과서에서 봤던 그림하고는 전혀 다른데요?"

해영씨가 웃음을 터뜨린다. 원효대사는 밤이 늦어 토굴에서 하룻밤을 자며 해골에 든 물을 마시며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곳에 그렇게 깊은 굴은 없다. 절벽 밑에 몸을 웅크려 들어갈 작은 공간만 있을 뿐이다. 바로 옆 은술샘에는 해골물 대신 바가지물만 가득이다. 의아해 안내판을 자세히 읽어보니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굴은 위쪽 암자 터에 따로 있다고 한다.

이제 찾는 이가 거의 없는 듯 짙게 깔린 낙엽이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 훤칠한 소나무 숲터널을 따라 옥계저수지로 떨어진다. 차분한 내리막이라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옥계저수지에는 오리떼 한 무리가 한가롭게 떠다니고 있다. 겨울이면 철새로 뒤덮이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다.

이제 농로를 따라 상가리미륵불을 향해 간다. 길은 도중에 한 번 숲으로 내던져져 지루함을 덜어준다. 계곡을 끼고 숲길을 따라 걷다 보니 가야구곡 중 제4곡이라는 석문담이 나온다. 우암 송시열이 풍류에 젖어 음각했다는 '취석醉石'이란 글자가 발밑에 새겨져 있다. 마을 뒷길에서 이런 문화유산을 만나니 길 가다 돈을 주운 것 같은 뜬금없는 행운처럼 여겨진다.

아직 겨울이 깊진 않았으나 산이 충분히 깊은 탓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렸다.

이제 용현계곡으로 향한다. 내포문화숲길은 남연군묘 방면을 따라 오르는데 동서트레일은 상가리미륵불을 살짝 구경하고 갈 수 있는 '백제의 미소길'을 따른다. 길은 완만한 오르막 임도로 다소 지루한 편이지만 서두르지 않고 운동 삼아 걷는다고 생각하면 못 견딜 건 아니다. 대문동 쉼터, 으름재 쉼터, 퉁퉁고개 쉼터 등 쉴 곳도 많다.

스님처럼, 혹은 보부상처럼 걷기

"원래 이 길을 포장해서 2차선 도로를 만들려고 했다고 하네요."

길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2007년 당시 이 길을 따라 가야산 관통도로를 내겠다는 사업이 발표됐다. 그러자 시민단체와 불교단체들이 막아섰다. 이 길은 옛 스님들이 보원사와 가야사를 오갈 때, 중국과 교역하던 보부상들이 항구에 도착한 후 내륙으로 향할 때 사용한 의미가 있다는 것. 그래서 도로 대신에 걷기길이 만들어지게 됐다.

스님들처럼 명상하듯, 보부상처럼 서두르듯 길을 주파한다. 완전 개방된다면 백패킹 짐을 메고 걷게 될 터니 1,500년 전의 걸음과 더욱 비슷해질 것이다.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며 완만한 오르막과 완만한 내리막을 끝내자 용현휴양림의 갈색 지붕이 드문드문 보인다.

휴양림 뒷문 입구에 다다르자 고민이 생긴다. GPS 상으로는 휴양림 내부를 관통하는 것 같은데 내포문화숲길은 휴양림 바깥을 돌도록 돼 있다. 왠지 휴양림으로 바로 가면 지름길로 가려는 꼼수를 부리는 듯한 느낌이라 내포문화숲길로 걷고 다시 GPS를 봤다. 그런데 휴양림으로 바로 가는 것이 맞았다. 동서트레일은 백패킹하면서 걸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박지가 있는 휴양림을 구태여 우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옥계저수지 둘레길. 저수지에 오리떼가 머물고 있다.

휴양림을 끝내면 이제 동서트레일 상에서 경사로는 없다. 용현계곡 도로를 따라 고풍저수지로 가면 된다. 도로 양옆으로 다음 여름을 기다리며 겨울잠에 빠진 듯한 펜션과 음식점들이 조용히 줄지어 섰다. 수많은 새끼고양이와 강아지들만이 한가롭게 정문을 지킨다.

보원사지 5층 석탑. 
용현자연휴양림. 

막판에는 불교문화재들이 수두룩하다. 보원사지와 서산 마애삼존불상이다. 백제 때 만들어져 조선 때까지 있었던 보원사 터다. 당시 사찰 규모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4m 높이의 당간지주와 천년의 위용이 함축된 5층 석탑이 운동장처럼 넓은 잔디밭 위에 우두커니 서 있다. 출사를 나온 몇 사람들은 절터 한가운데 솟은 감나무를 배경으로 연신 셔터를 누른다.

서산 마애삼존불상. 

마애삼존불상은 도로에서 200m 정도 돌계단을 따라 올라야 만나볼 수 있다. 20km를 달려온 다리는 이미 천근처럼 무거워진 뒤라 이조차 버겁다. 폐장시간인 오후 6시가 다가오자 헐레벌떡 올라 퇴근을 앞둔 관리인에게 양해를 얻어 백제의 미소를 마주한다. 백제 시대 만들어졌으며 중용의 아름다움이 특징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눈에는 그것이 어떤 아름다움인지 잘 헤아려지지 않는다. 그저 먼 길을 걸어 찾아와 준 것이 고맙다는 듯한 따뜻한 미소의 온기가 전해질 따름이다.

동서트레일 8구간 등산지도 ©동아지도 제공

산행길잡이

교통편 때문에 서울에서 출발해 하루 일정으로 완주할 요량이라면 예산에서 서산으로 역방향 진행하는 것이 훨씬 좋다. 고속버스를 타고 덕산스파정류소에 내리자마자 식당가가 있어 운행 전 식사하기 용이하며, 20분 정도 걸으면 바로 기점인 윤봉길의사기념관이 나온다.

내포문화숲길로 이미 한 번 정비된 탓에 등산리본이나 이정표가 어느 정도 돼 있는 상태라 길을 헷갈릴 곳은 없다. 다만 딱 하나 아람파크빌아파트에서 원효봉으로 올라가다가 원효암 터 1.08km와 원효봉 1.20km라고 나란히 서 있는 이정표에서 주의해야 한다. 원효암 터 1.08km 이정표가 가리키는 왼쪽 방향으로 가야 내포문화숲길을 무난히 따를 수 있다. 원효봉 1.20km가 가리키는 오른쪽으로 가면 계곡부 중간에서 길이 끊긴다.

교통

취재진의 경우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덕산스파정류소로 수시 운행(첫차 07시 10분, 하루 7회)하는 버스를 탔다. 도보 여행 후에는 고풍저수지에 접한 용현계곡 입구에서 티머니고 앱의 온다택시 기능을 사용, 택시를 호출해 당진터미널로 이동했다. 택시비 약 4만 원.

당진터미널에선 20분 간격으로서울행 버스가 수시 운행했다.

한편 고풍저수지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하면서산터미널로 간다. 480번대 버스가 하루 7회 운행한다.

고란사(입구) 승강장에서 하루 3회(06:40, 10:30, 15:20), 서산터미널에서 하루 4회(09:15, 13:50, 16:00, 19:10) 출발한다.

숙식(지역번호 041)

시간 여유만 충분하다면 한껏 식도락 여행을 펼 수 있는 구간이다. 시종점이 덕산스파와 용현계곡이라 음식점이나 숙소가 많다. 덕산스파 방면에는 남원가마솥 추어탕보리밥(337-7113)이 있다. 오전 9시부터 영업을 시작해 일찍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있다. 추어탕과 보리밥(각 1만 원)이 대표 메뉴며 돼지두부찌개, 돼지김치전골(각 1만3,000원)도 깔끔하고 깊은 맛이 훌륭하다. 밥은 솥밥으로 제공된다.

용현계곡에선 용현집(663-4090)이 줄서서 먹는 맛집으로 유명하다. 9,000원의 가성비 좋은 어죽이 대표메뉴. 칼칼하고 걸쭉하면서 시원해 든든한 한 끼로 적격이다. 수제돈까스(1만 원)와 빠가사리매운탕(中 4만5,000원), 도토리묵과 김치전(1만 원)도 인기 있다. 영업시간 사전확인 필수.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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