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진] 영국서 싸운 로마 검투사의 고향은 북유럽
고대 유럽인 DNA 1556개 분석
서기 1~1000년 유럽 이주 현황 밝혀
10배 정교한 고해상도 유전자 가계도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로마제국의 황금 시기 콜로세움에서 싸운 검투사의 이야기를 그렸다. 검투사들은 로마제국이 점령한 각지에서 발탁됐는데 2~4세기 지금의 영국 요크에서도 노예 검투사들이 경기를 벌였다. 당시 싸웠던 검투사들과 로마군 4명 중 1명은 스칸디나비아반도 출신들이었다. 앵글로색슨족과 바이킹이 지금의 영국에 정착하기 전 이미 이 지역에 스칸디나비아 이주자가 살았다는 뜻이다. 수백 년 뒤 바이킹 시대가 되자 스칸디나비아 이주민들은 유럽 전역을 약탈하며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일부는 서유럽과 남유럽을 넘어 훨씬 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까지 진출했다.
과학자와 역사가들이 짧은 기간에 나타난 유전적 변화를 분석해 인류사의 첫 밀레니엄(서기 1~1000년) 시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역사적 이주의 기원을 추적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프랜시스크릭연구소와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스웨덴 웁살라대와 스톡홀름대 연구진은 1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고대 유럽인의 무덤에서 확보한 유전체 샘플을 분석해 기원전 500년부터 서기 1000년까지 유럽에서 나타난 인류 이동의 역사적 사건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증거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수백 년간 발생한 유전자 변화 역사 디테일 재구성
인류사의 첫 밀레니엄 시기 유럽은 혹독한 격변기를 겪었다. 이베리아반도부터 중부 유럽, 동쪽으론 메소포타미아와 북아프리카까지 광범위한 영토를 지배한 로마제국이 몰락하고 야만족과 이슬람의 침략이 이어지며 크고 작은 봉건왕국들이 들어섰다. 동유럽에선 비잔틴제국, 서유럽에는 신성로마제국이 들어섰다. 이 시기 유럽 전역에선 거대한 이주의 물결이 일어났다.
인간은 공유하는 유전적 돌연변이가 많을수록 더 가까운 경향이 있다. 같은 조상을 가진 집단은 동일한 돌연변이 DNA를 물려받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이 점을 이용해 수천 년 또는 수백만 년에 걸쳐 발생하는 DNA의 큰 변화를 추적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원숭이와 다르게 어떻게 진화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과학자들은 DNA를 따라가다 보면 인류가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도 그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보다 짧은 기간에 일어난 유전적 변화를 식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집단이 공유한 단일한 유전자형(Haplotype)과 희귀변이로 추적하는 방법으론 수백 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한계가 있다. 유럽처럼 조상이 유전적으로 가까운 경우 이주 경로를 추적하기는 매우 어렵다.
인간의 유전자 데이터는 엄청나게 방대하다. 인간 유전체는 오랜 기간을 거쳐 완성된 30억쌍의 염기서열로 구성된다.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한 이주민이 원주민과 어울려 살며 고작 몇 세대를 거치면서 발생한 작은 유전적 변화를 찾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와 같다.
연구진은 이전에 나타난 유전적 변화를 무시하고 가장 최근의 변화만 살펴보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트위그스태츠(Twigstats)라는 이 방법은 모래를 치우고 바늘만 그대로 두는 식이다.
연구진은 데이터베이스에서 수천 개의 유전체 자료를 뒤진 뒤 서로 유전적으로 얼마나 가까운 관계가 있는지 살폈다. 어떤 유전자가 언제, 어떤 집단에서 내려온 것인지 확인했다. 연구진은 이런 식으로 첫 밀레니엄 시기에 새로운 유전적 변화를 보인 집단의 가계도를 만들었다. 연구진은 이 방식으로 유전적으로 매우 가까운 그룹 간에도 차이를 10배 명확하게 구별한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이 방법을 이용해 기원전 500년부터 서기 1000년까지 살았던 고대 유럽인의 무덤에서 확보한 유전체 1556개를 살펴봤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는 철기시대(서기 300~800년), 로마제국의 멸망, 중세 초기의 ‘대이동’과 바이킹 시대로 나뉜다. 밀레니엄의 전반기 로마제국의 북쪽 국경에선 게르만족이 끊임없이 소란을 일으켰다. 연구진은 이 기간 중 북부의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서 남쪽으로 이주한 집단의 유전적 흔적을 발견했다. 게르만인 조상들을 가진 유전자는 남부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슬로바키아, 영국 남부에서 발견됐다.
남부 유럽에서도 100%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이주자가 발견됐다. 후반기가 되자 유럽으로 옮겨간 스칸디나비아반도 이주자들은 대부분 소멸했다. 이주자들 다수가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과 섞였다는 점을 뜻한다. 이와는 별도로 서기 800년경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는 중부 유럽인을 조상으로 가진 주민이 살았다는 사실도 새롭게 나타났다.
◇로마제국 통치한 영국에 바이킹 조상 이미 활약
로마제국의 변방에서 활동하던 검투사의 출신도 밝혀졌다. 로마제국은 1세기경 지금의 영국 본토인 브리튼섬을 정복하고 4세기까지 지배했다. 연구진은 이 시기 요크에서 활동한 로마 군인과 노예 검투사의 25%가 스칸디나비아에서 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바이킹 시대 직전 스칸디나비아로 이주한 유럽인의 흔적도 발견했다. 연구진은 발트해 연안의 욀란드섬에 묻힌 무덤의 주인들이 중부 유럽의 조상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바이킹이 유럽을 침탈하기 전 스칸디나비아에 이미 중부 유럽 출신의 이주자가 살았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연구진은 분석했다.
연구자들은 스칸디나비아의 불안정한 환경이 사람들의 이동을 촉진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유럽인의 조상들이 스칸디나비아로 이주한 이유를 밝히려면 더 많은 고고학적, 유전적, 환경적 자료가 필요하다고 본다.
연구진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도 현재 스웨덴인과 공통 조상을 가진 바이킹 시대의 DNA를 발견했다. 영국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해들에서는 폭력으로 숨진 흔적과 함께 스칸디나비아와 유전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증거가 나왔다. 역사가들은 무덤의 주인들이 바이킹 약탈자였고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역사적 기록에 유전적 증거 추가
유럽은 본격적인 중세가 시작된 1000년경이 되자 침략과 전쟁이 끝나고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과학자들은 이번 연구는 철기시대부터 후기 바이킹 시대까지 북부와 중부 유럽의 유전적 역사에 대해 매우 정교한 통찰력을 제공했다고 평가한다.
이번 연구의 1번 저자인 레오 스페이델 프랜시스크릭 연구소연구원은 “시간에 따른 인류의 이주와 인구 변화에 대한 분석은 대체로 모호했다”며 “새 분석법이 그간 역사의 퍼즐에서 빠져있던 더 많은 조각을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교신 저자인 폰투스 스코글런드 프랜시스크릭연구소 고대 유전체학 연구실 그룹 리더는 “새 분석 방법이 작은 규모의 역사에 대한 더 날카로운 렌즈를 제공한다”며 “고대 전체 유전체 시퀀스의 기록을 늘려 이전에는 답하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계는 새로운 분석 방법이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역사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서기 500년경 전후로 영국을 지배하던 주도 세력이 로마에서 앵글로색슨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록은 불분명하다. 역사가들도 이 시기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같은 시기 중부와 동부 유럽의 주도권이 슬라브족으로 바뀐 이유도 미스터리로 남았다.
역사학자들은 새 분석법이 역사적 기록이 사실과 정확히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데 유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역사에 기록된 내용과 발견된 결과가 일치하지 않았을 때 새 역사 이론을 수립하는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과학자들은 역사학자들이 자신이 연구하는 세부적 사건을 정교하게 뒷받침할 혁신적인 무기를 갖게 됐다고 평가한다.
공동 저자인 피터 헤더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의 중세사 교수는 “기원후 1000년간 이뤄진 유럽에서의 이동이 서유라시아 인구 구성을 재구조화하고 유럽의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했다는 역사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이동의 규모, 궤적 같은 세부적 부분에 대해 항상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며 “새 분석법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열어줬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Nature(2025),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4-08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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