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대피소, 집앞으로 배달”… ‘벙커 산업’키우는 전쟁의 시대[Global Focus]
美 캔자스주엔 ‘서바이벌 콘도’
75명 5년간 생존 지하15층 시설
이동식 대피소 ‘MFG’도 인기
4.5평 7만5000달러에 판매 중
러 ‘컨테이너 대피소’ 대량 생산
스위스선 노후시설 대대적 개선

러시아가 미국 등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미사일 러시아 본토 타격을 허용하자 핵 위협 수위를 높이면서 핵 대피소에 대한 각국 정부는 물론 민간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정부가 직접 핵 공격 대피소 건설과 현대화에 나섰고, 개인들은 민간 업체에 주문해 대피시설을 구입하거나 자택에 직접 대피소를 설치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핵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피소에 숨는 것은 물리적·시간적 한계가 있는 만큼 핵확산을 막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급격히 성장하는 서방의 핵 대피소 시장…이동식 대피소 만들어 가정집에 배달·설치 = 1일(현지시간) 뉴스위크, AP통신 등 외신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핵 도발 수위가 높아지면서 미국 내 대피소 구매와 입주 문의가 빠르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미국에서 기업 CEO 등 재벌들에게 주목받는 대피소는 캔자스주 북부에 위치한 지하 15층, 560평 규모의 대형 대피시설인 ‘서바이벌 콘도’다. 과거에 사용되던 미사일 발사 기지를 개조한 이 건물은 핵전쟁 등 비상 상황에 총 75명이 5년 넘는 시간 동안 생존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대피소다. 특히 코로나19나 우크라이나 전쟁 등 굵직한 사건이 전 세계를 강타할 때마다 입주 문의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동식 핵 대피소를 만든 후 일반 가정집 인근에 설치해주는 업체도 늘고 있다. 해당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프콘 언더그라운드 MFG’의 코리 허버드 대표는 “푸틴 대통령이 핵 관련 언급을 할 때마다 주문 전화가 쇄도한다”고 전했다. 현재 데프콘 언더그라운드 MFG는 총 7종류의 이동식 대피소를 판매하고 있으며, 약 4.5평 규모의 가장 작고 저렴한 시설의 경우 배달·설치비를 제외하고 7만5000달러(약 1억1070만 원)에 판매되고 있다. AP통신은 시장조사업체 블루위브 컨설팅을 인용해 미국의 핵 대피소 시장 규모가 2030년 1억7500만 달러(2576억 원)까지 성장할 것이라고 전했다.
러시아와 이란의 핵 위협을 받고 있는 폴란드와 이스라엘에서도 핵 대피시설 개발 및 건설이 늘어나는 추세다.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의 디자인회사 ‘BXB스튜디오’는 최근 핵무기 공격에도 버틸 수 있는 지하 벙커 ‘스콜피오 하우스’의 디자인을 발표했다. 스콜피오 하우스는 독일 디자인 위원회가 주관하는 2024 아이코닉 어워즈에서 혁신 건축 부문 수상을 하는 등 각국 건설·디자인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BXB스튜디오는 일반 가정집과 지하 벙커를 합쳐 놓은 스콜피오 하우스가 핵무기와 생화학 무기 공격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올해 수차례 이란과 미사일 공격을 주고받은 이스라엘 최대도시 텔아비브에서도 부촌을 중심으로 핵 공격을 버틸 수 있는 대피소가 마련된 아파트 빌딩이 건축 및 판매되고 있는 상황이다.

◇유럽 각국, 핵 대피소 짓고 낡은 핵 시설 현대화 = 일부 유럽 국가들에서는 정부가 직접 나서 핵 대피소 건설과 현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스위스 정부는 2억2000만 스위스 프랑(약 3580억 원)을 들여 오래된 대피소에 대한 업그레이드 작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스위스 서부 보주(州)의 시민보호사령관인 루이-앙리 델라라게아즈는 “우리가 충돌에 대비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라면서도 “우리는 대피소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고, 이를 유지하고 기능이 살아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위스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정부의 대피소 준비 여부와 자세한 위치를 알려달라는 민원이 쇄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피소 담당자는 대피소를 부실하게 관리한 건물주에게는 1년의 보수 시간을 주고, 보수가 어려우면 공공대피소 개인 자리 확보를 위해 거주자 1인당 800스위스프랑(130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 등 유럽에 대해 핵 위협 수위를 높이고 있는 러시아 정부는 서방 국가들의 핵 반격에 대비해 핵 대피소 시설을 늘리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비상사태부는 지난달부터 핵무기로 인한 충격파나 방사능으로부터 약 48시간 동안 버틸 수 있는 대피시설 ‘KUB-M’에 대한 대량 생산에 나섰다. 화물용 컨테이너 모양을 한 KUB-M 한 개에는 총 54명이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는 해당 대피소의 대량 생산이 러시아와 서방 간의 갈등에 기인한 것은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러나 로이터통신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미국산 미사일로 러시아 본토를 타격할 수 있도록 허가한 조치 직후에 이 시설의 생산이 늘어난 만큼 관련성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핵 대피시설, 실효성은 글쎄…“차라리 핵확산 막는 데 집중해야”= 하지만 핵 대피시설의 실효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핵 대피시설도 핵 공격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으며, 오히려 ‘핵전쟁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구매자들에게 주입한다는 것이다. 또 핵 대피시설을 건설·판매하는 것이 ‘핵 확산 억제’라는 근본적 해결책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멀어지게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핵무기 폐기를 위한 국제 운동(아이캔·ICAN)’의 앨리시아 샌더스-자크리 정책조정관은 “핵 대피소는 사실 핵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국민들로 하여금 핵전쟁의 두려움을 심리적으로 떨쳐낼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핵무기가 진짜 무서운 이유는 방사능이다. 아무리 대피시설에 숨는다고 해도 방사능의 지속적인 효과를 피하기는 어렵다”며 “핵전쟁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핵무기를 철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상훈 기자 andrew@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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