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름다운 책” 번역하며 [2024 행복한 책꽂이]
2024년을 대표하는 기록은 단연 12월 정치사다. 문화계에서 가장 큰 사건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다. 〈시사IN〉은 2024년 송년호에 그 외의 다른 기록도 남기기로 했다. 올해 출간된 주요 도서, 주목할 만한 출판사, 출판계 이슈 등을 ‘2024 행복한 책꽂이’ 설문을 통해 물었다. 출판인 43명이 참여했다. 문화산업 최전선에서 버티는 이들의, 쉽게 요약될 수 없는 견해가 한데 모였다.

‘올해의 번역가’로 서제인 번역가를 꼽은 출판인이 많았다. 한 편집자는 그가 옮긴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을 두고 “의미뿐 아니라 뉘앙스와 호흡까지 살린다는 인상을 받는다”라고 응답했다. 오래전부터 아르바이트로 번역을 해온 서제인씨는 2021년 1월에 출간된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이후 본격적으로 출판번역가의 길에 들어섰다. 서면 인터뷰에서 서제인씨는, 좋은 번역은 “작가와 독자가 서로를 최대한 정확하게 만나게 해주는 번역”이라고 했다.
약력에 기자·편집자·작가 등 글을 다루는 다양한 일을 했다고 되어 있다. 본인에게 번역은 어떤 일인가?
번역이, 지금껏 해온 어떤 작업보다 재미있고 매력적이라고 느낀다. 소유욕 없이 산뜻하게 텍스트를 만나고 몰두했다가 헤어질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 좀 더 개인적으로는, 번역은 내게 세상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재활치료와도 같은 작업이다. 사실 지금 이 세상이나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고 이질감이 든다. 솔직히 이해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싫을 때도 많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세상이든 인간이든, 그것이 외국어로 된 텍스트이고 나는 그 텍스트를 번역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조금 더 견딜 만해진다. 직업으로서 번역을 하는 동안에는 이해를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가 없다. 억지로라도 집 밖으로 나가 운동을 하는 사람처럼, 무언가를 알기 위해 계속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만 한다. 증거를 찾고, 검색을 하고, 가능한 한 모든 경우의 수로 가설을 세우고, 다시 논리를 검증한다. 영국의 기록보관소에 있는 18세기 문서들에 가닿을 때까지 검색을 하고, 국내외 거의 모든 사전을 뒤지고, 골동품 숍과 구글맵스와 욕설이 가득한 인터넷의 시궁창도 뒤지면서 ‘내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 때까지 아주 많은 작업을 한다. 이성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동물적 감각의 힘을 빌린다. 문장을 소리 내 읽어보고, 따로 흰 종이에 옮겨놓고 쳐다보기도 한다. 한 단어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며칠이고 노려볼 때도 많다. 그런 몰두의 패턴이 좋다. 그걸 되풀이하는 일이 나에게는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강렬한 감각을 전해준다.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일이 이해하지 않으려 애쓰는 일보다 훨씬 흥미로운 일이라는 감각도.
전업 번역가로서의 일상은?
정확히 말하면 번역가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엄마로 ‘투잡’을 하는 셈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오전에 4시간, 다시 밤에 모두가 잠들면 새벽까지 4시간, 그렇게 하루 작업 시간은 8시간 정도로 일정한 편이다.
번역 작업의 원칙이 있다면?
번역이라는 작업이 ‘대화’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결코 혼자서 무언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의견에 최대한 생각을 열어두고 편집자나 교정교열자들과 충분히 대화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생각하는 번역가의 역할은 작가가 받을 수 있는 오해가 최소가 되도록 애쓰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가 펼칠 수 있는 이해의 폭이 최대가 되도록 애쓰는 것이 편집자의 역할인 것 같다. 작가, 번역가, 편집자, 독자. 이렇게 크게 네 주체가 함께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끊임없이 대화하며 하는 공동 작업이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번역가와 편집자의 대화가 몹시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 부분은 마치 이인삼각 경주 같은데, 각자가 텍스트에 갖는 애정의 리듬이 잘 맞으면서도 시선의 방향은 서로 오류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달라야 한다. 가끔은 날카로운 논쟁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 과정에서의 대화가 대체로 아주 즐겁다. 종종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확실한 건 어떤 번역이 잘되었다면 거기에는 틀림없이 편집자의 노고가 아주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거다.
번역 일을 하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은?
내가 작업한 작품 중에서는 마리아 투마킨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작가가 옛 소련의 하르키우(현재의 우크라이나)에 살다가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해온 사람인데, 그 이주의 경험을 통과해 만들어진 언어가 몹시 고유하고 독특했고, 일반적인 영어와는 많이 달랐다. 자신만의 맥박과 흉터와 시간과 자부심이 꼭꼭 새겨져 있는 글이다.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기억으로 빚어진, 선형적인 이해를 거부하며 암호문처럼 난해하게 흩어진, 그럼으로써 독자를 힘껏 이해 (불)가능성으로 끌어당겨 연루시키는 텍스트였고, 원문을 읽는 데만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걸 어떻게 옮길까 하는 고민에는 그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본인이 옮긴 책 중에 추천하고픈 책은?
작업한 모든 책에 애착이 있지만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첫 번역서인 핍 윌리엄스의 소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을 추천하고 싶다. 싸우는 여성들의 이야기이고, 싸움에는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이고, 무엇보다 부서지고 삭제되고 누락된 역사를 복원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싸움이 많은 지금 여러 독자들에게 힘이 될 것 같다.
현재 번역하고 있는 책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 폴 윤의 단편소설집을 번역하고 있다.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한 단아한 문장 속에 결코 단순하지 않은 여러 겹의 섬세한 정서가 담겨 있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름다운 책이다. 기대하셔도 좋다.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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