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천재와 생활의 달인
남 말 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는 흔히 천재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개화기 조선의 3대 천재는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그리고 벽초 홍명희다. 이들은 시와 소설을 쓰고 사회적 파급력도 컸지만, 막상 천재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세계적으로는 지능지수를 기준으로 괴테와 아인슈타인 그리고 다빈치를 꼽기도 한다. 과연 그렇구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서양 위주의 평가라는 생각도 없지는 않다. 확실한 것은 이들의 부모나 자식은 천재 당사자보다 유명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고 식물학과 해부학에도 관심이 컸지만 그의 아들이 뭘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이광수의 아버지가 무엇을 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식을 낳는 과정에서 부모의 염색체를 골고루 뒤섞는다. 천재는 고스톱 화투판에서 나타날 수 있는 최고의 패다. 하지만 다음 판에서 그 패는 흐트러져 뒤섞인다. 생식 과정에 남성과 여성, 두 성이 참여하기 때문에 생물학자들은 이런 방식을 양성생식이라고 부른다. 새도 사마귀도 암수가 힘을 합쳐 알을 낳는다. 그렇다면 한 성을 통해 단성생식을 치르는 동물도 있을까? 있다. 동물원에 갇혀 사는 몇몇 파충류와 조류 암컷이 수컷 도움 없이 알을 낳은 사례가 알려졌다. 곤충에서는 단성생식이 더 흔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식물을 살펴보자.
인류 문화권에 들어온 몇 종류의 재배식물은 순전히 단성생식으로 살아간다. 쌀과 밀, 옥수수에 이어 네 번째로 생산량이 많은 감자와 바나나가 그런 식물이다. 그러나 감자와 사촌인 몇 종류의 가짓과(Solanaceae) 재배식물은 양성생식의 산물인 씨로 세대를 이어간다. 잘 알다시피 고추와 토마토에는 씨가 있다. 단성생식을 한다고 해서 감자에 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보기 어려울 뿐이다. 작고 푸른 풋토마토처럼 생긴 감자 열매 안에 오롱조롱 든 씨앗을 심으면 감자 싹이 돋아난다고 한다. 그렇지만 너나없이 사람들은 씨눈을 땅에 심어 감자를 키운다. 척박한 땅에서 씨 없이도 잘 자라고 생산량도 무척 높기 때문이다. 씨눈에서 나온 싹은 유전적 섞임 없이 이전 세대의 염색체를 그대로 물려받은 클론(clone) 감자이다. 우리는 한 마지기 밭을 유전적으로 동일한 감자로만 채울 수 있게 되었다.
감자는 푸르게 우거져 탈 없이 자란다. 별일이 없다면 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1845년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닥친 사실을 기억한다. 감자마름병으로 감자밭이 초토화된 탓이다. 감자 집단이 곰팡이 감염에 취약한 상태였던 것이 근본적인 이유였다. 많은 사람이 굶어 죽고 미국으로 삶의 터를 옮겼다. 이 상황은 안데스에서 다른 품종의 감자를 수입한 뒤에야 간신히 수습되었다. 곰팡이에 저항성이 큰 새로운 유전형의 감자를 들여온 것이다.
드문 예외가 없진 않지만 인간을 포함한 동물 생식에는 암수가 참여한다. 생물학자들은 동물이 병원성 세균과 기생충에 취약하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기원전 로마를 노렸던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장수 한니발은 코끼리를 몰고 눈 덮인 알프스를 넘었지만 끝내 말라리아를 이겨내지 못했다. 고대와 중세에 여러 차례 유럽인들을 덮쳤던 흑사병은 마침내 인간이 거주하는 모든 대륙에 퍼져 19세기 말에는 인도와 중국에서만 1200만명이 사망했다. 흑사병을 일으켰던 페스트균은 잠시 숨을 죽이고 있지만 말라리아는 지금도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과 동남아에서 활동 중이다. 말라리아는 기생 생명체인 열원충이 매개하는 발열 질환이다. 이들은 인간의 간(肝)과 적혈구에서 몸집을 불리지만 유성생식을 하려면 모기의 혈액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인간도 그저 당하지는 않는다. 겉모습을 바꾸어 기생충이 적혈구에 침입하지 못하게 막아버린다. 부모 한쪽에서 헤모글로빈 돌연변이 유전자를 물려받으면 이런 일이 가능하다. 멀쩡한 글로빈을 두 벌 가지면 말라리아에 취약하고 돌연변이 유전자를 두 벌 가지면 악성빈혈로 이어지기에 한쪽 돌연변이는 아주 바람직한 선택이다. 이는 인간이 두 가지 성을 지녔기에 생기는 진화적 이득이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유성생식은 천재와 면역계가 뛰어난 사람, 그리고 요리 실력이 빼어난 생활의 달인을 한마을에 모은다. 이러면 코로나19가 준동해도 마을은 끄떡없다. 약자를 보호하는 자원봉사자들, 새벽 거리를 청소하는 비질, 응원봉을 든 간절한 눈빛, 모두 생활 천재고 능숙한 달인이다. 바람은 불어도 새해는 온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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