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통일의 길에서 일순간도 벗어나지 않으셨죠

한겨레 2025. 1. 1. 18: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 ‘참어른’ 신창균 선생님 20주기
올 3월이면 20주기를 맞는 송암 신창균 선생님. 필자 제공

겨울이 오면 결코 지울 수 없는 내 마음의 그리움을 떠올려봅니다. 그해 감옥의 겨울은 천장에 매달린 희미한 형광등에서 흘러내리는 불빛을 제외하고는 온기 한 점 없어 살을 에는 듯한 강한 추위였습니다. 분단으로 인해 민족이 겪어야 하는 처참한 고통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감옥살이지만 여름과 겨울로 구분되는 특성으로 인해 바깥의 겨울보다는 훨씬 길고 창살 사이를 파고드는 강한 추위와 회색 시멘트벽의 차가움은 더욱 몸을 움츠리게 합니다.

그 감옥의 추위를 따뜻한 가슴으로 녹여주고자 신창균 선생님은 구순의 노구를 이끌고 지하철과 기차 그리고 버스를 번갈아 갈아타며 지방 교도소에 수용 중인 저를 찾아 홀로 먼 길 오셨습니다. 면회를 담당하는 교도소 직원들도 “교도소 생긴 이래 면회객으로 선생님이 가장 연장자”라며 감탄과 경의를 표했습니다. 망설임 없이 찾아온 발길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마음이자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는 순결한 동지애였습니다.

2005년 3월8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대한문 앞에서 열린 신창균 선생 범민족통일장에서 유족과 참석자들이 분양·헌화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선생님은 1908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1919년 열한살의 나이로 3·1운동 선봉대로 나섰으며 청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에는 조국의 해방을 위해 마카오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연락책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자마자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외세에 의한 강요된 분단을 종식시키고자 조국통일운동에 나섰습니다. 우리 민족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땅이건만, 오도 가도 못하게 일방적으로 갈라 놓은 분단 38선을 넘어 1948년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한국독립당 8인 대표로 선정되어 김구 선생과 함께 참석하셨습니다. 남쪽 단독정부로 들어선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한독당이 강제로 해산되자 통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며 오랜 기간에 걸쳐 교류하였던 죽산 조봉암 선생과 함께 뜻을 같이하여 1956년에 11월에 결성된 진보당에서 재정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58년 조봉암 당수와 함께 구속되는 고초를 겪고 1959년 7월 조봉암 당수는 사법살인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11살 때 3·1운동 선봉대로 나서 마카오 망명해 임정 연락책 활동
한독당 8인 대표로 연석회의 참석
조봉암과 진보당서 활동하다 구속


한독당에 이어 진보당마저 강제로 해산당하자 선생님은 출소 이후에 당명을 직접 고안한 통일사회당에서 정책의장과 민족통일촉진회의에서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결코 멈출 수 없는 통일의 길에서 일순간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1989년 1월에 결성된 전국민주민족운동연합(전민련)에서는 상임의장을 맡았고, 1990년 11월에는 남북해외동포가 망라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이 결성되자 남측본부 명예의장에 추대되어 사회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전면에 나섰으며, 1997년에는 범민련 남측본부 구성원들이 재차 구속되자 의장직을 수행하였습니다.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 요원들이 선생님을 범민련에서 탈퇴시키고자 집요한 공작을 하였으나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통일을 향한 깃발을 절대 내릴 수 없다고 오히려 호통쳤습니다. 때로는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서 선생님을 지켜본 저로서는 이 땅 어른들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자세가 무엇인가를 깨닫기도 했습니다. 곁에서 바라보면서 남길 수 있는 선생님의 인품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남아있습니다.

신창균(가운데) 선생님과 함께 전민련(고문)과 범민련(남측본부 부위원장)에 참여했던 고 박순경(오른쪽) 선생님. 필자 제공

선생님이 모두의 곁을 떠난 지도, 다가오는 3월이면 20주기입니다. 강산도 두번 변한다는 20년이 지났건만 분단이 통일의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분단을 통해 오직 자신들의 삶만 챙기려는 이해타산적 계산들은 오히려 분단을 통해 민족 전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얻고 누릴 수 있는지를 바라보지 못하는 천려함이라 하겠습니다. 선생님이 계신 그곳에는 더 이상 분단을 용납할 수 없다며 결연한 의지로 목숨까지 바치신 강희남 목사님과 참된 아름다움을 남기셨던 김선분, 박정숙, 주명순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과 함께 지혜를 모아내고 있을 것입니다. 결코 둘일 수 없는 우리 민족이기에 다시 하나를 찾기 위하여 민족의 화해와 단합으로 평화 정착을 실현해 통일조국의 그 날을 염원하는 모습을 가슴으로 그려보기도 합니다.

전민련 상임의장·범민련 명예의장 등 사회민주화·통일운동의 전면에 나서
“탈퇴 공작한 안기부 요원들 호통쳐”


분단이라는, 애써 복잡한 정세를 만들어 순간을 지체시킬 수 있을지라도 열어야 할 통일의 문. 그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다는 역사적 진리로 언젠가는 반드시 선생님의 묘소에 통일조국을 안겨드리고 싶습니다. 분단 너머에 우리 민족을 기다리고 있을 통일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분열들이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선생님의 저서 ‘가시밭길에서도 느끼는 행복’을 다시 펼쳐봅니다.

최진수/전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