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유족들이 만든 현장 취재 윤리
유족들이 먼저 요청한 '재난보도 준칙'…"취재 더 조심하게 됐다"
도착 전 재난보도준칙 숙지, '무리한 인터뷰 하지말자' 사전 논의도
무리한 촬영 등 반복되는 취재 문제…유튜버들 불쾌한 발언 나와
개별 사연보다 현장에서 유가족 겪는 어려움에 대한 취재 필요
[미디어오늘 윤유경 기자]
“(유가족을) 부추기지 말아달라.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데 몇 시에 탔느냐 어떻게 알고왔느냐 질문하지 말아달라. 어느 정도 시간이 되면 다 말씀을 드리겠다. (…) 정중하게 부탁드린다. 우리가 지금 임계점에 와있다. 폭발하기 일보 직전까지 와있는데 유가족분들이 감정을 억누르고 참고 있는 거다.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옆에서 계속 자극하지 말아달라.”
지난 29일 유가족과 기자들이 모여있는 전남 무안국제공항 현장에서 박한신씨(유가족협의회 대표)가 말했다.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기자들의 취재 윤리는 늘 지적된다. 무리한 유가족 인터뷰와 경쟁적 취재로 인한 오보와 왜곡보도 등은 반복되는 문제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현장에서도 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별 언론 취재나 촬영에 대한 유족들의 항의가 나오기도 했다. 임시영안실이 설치되고 브리핑이 이뤄지는 무안공항에는 200여 명의 기자들이 모였고, 사건 초반 협소한 공간에 기자들과 유가족은 구분되지 않은 채 뒤섞여 있었다. 유가족들은 유가족협의회를 구성했고, 이들과 소통하기 위한 기자 풀단도 지난 30일 꾸려졌다.
미디어오늘이 지난 30일부터 31일 접촉한 현장의 기자들은 제주항공 참사에서 유가족들의 행동이 기자들의 취재 행태를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공항 벽면에는 유가족 측에서 먼저 마련한 '재난보도 준칙 준수 요청' A4 용지가 붙었다.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인터뷰를 강요해선 안 되고 인터뷰에 응하더라도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현장 기자들에 따르면 유가족협의회는 브리핑마다 기자들에게 유가족 개별 접촉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하고, 소통 창구를 일원화하고 있다.
참사 당일부터 현장에 있는 장일호 시사인 기자는 30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시민들과 유족들이 '재난보도 준칙'의 존재를 알고 기자들에게 준칙을 지키라고 요구하게 됐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라고 느꼈다”며 “준칙이 있다는 걸 알고있는 사람들이 요구하니까 기자들도 더 조심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역시 참사 당일부터 현장에서 취재 중인 정인선 한겨레 기자는 31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유가족들도 10년 동안 여러 가지 참사들을 간접 경험한 거다. 유가족대표단도 계속해 '세월호 참사 때 보지 않았냐. 우리가 흩어지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며 “우리가 이렇게까지 질서정연해졌구나 놀랍기도 했고 동시에 워낙 크고 작은 참사들이 많아 다들 이런 상황에선 흩어지면 안 된다는 걸 몸으로 알고 계신 거라는 생각에 무섭고 안타깝기도 했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계속 그런 말을 하시는게, 사회가 10년 동안 성숙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불필요한 성숙인데…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취재가 더 조심스러운 이유에는 이번 참사의 성격도 있다. 이전 대형 참사들과 달리 충돌과 폭발로 발생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는 사고 초기부터 대부분 탑승객의 사망이 예측됐다. 정 기자는 “초반부터 기자들 모두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며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의 경우 최소한의 생존 가능성에 희망을 걸어볼 수 있었는데, 이번 사고의 경우 초반부터 사망이 거의 확실시돼 유족들의 분위기도 훨씬 안 좋고 인터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동료 기자들과 나눴다”고 말했다.
때문에 기자들은 유족들 인터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장일호 기자는 유가족협의회 측의 취재 당부에 대해 “기자들을 위해 브리핑을 정례화해주시고 한편으로 감사한 일”이라면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 번에 목숨을 잃은 사건에 있어서 하나의 목소리만 나올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어서 아쉽기도 하다. 명함에 '말씀하고 싶으실 때 연락달라'고 간단하게 메모를 써서 먼저 드리고 싶었는데 전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워낙 큰 참사이다보니 기자들은 조심스럽고 유족분들도 뭔가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취재에 오기 전 보도 윤리를 다시금 논의한 경우도 있다. 장일호 기자는 “회사에서 유가족들을 무리해서 인터뷰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는 이야기하고 왔다”며 “무리하게 따라다니거나 우는 모습을 담는 건 하지 말자고 했다”고 전했다. 무안으로 오면서 동료와 재난보도 준칙을 읽으면서 왔다는 정인선 기자는 “회사에서 평상시 (취재 윤리를) 중요하게 여겨 교육을 받았다”면서도 “그래도 한 번이라도 지침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자들이) 알아서 다들 조심하고 있지만, 오보도 없는 게 아니고 유족들의 항의처럼 과장해서 사연을 부풀려서 쓰는 일이 없는 게 아니니까 내부에서 먼저 우리 다 같이 (취재 윤리를) 지키자는 게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무리한 촬영 등 반복되는 취재 문제도…유튜버들 불쾌한 발언도 나와
여전히 현장에선 문제도 보인다. 광주전남 지역일간지 A기자는 30일 미디어오늘에 “사고 초반 실종자 가족이었던 할머니 한 분이 바닥에 주저앉다시피 눈물을 흘리시면서 호소하는데 방송사에서 소위 그림을 따기 위해 경쟁적으로 플래시를 터뜨리는 모습이 기이했다”며 “당일 저녁엔 유족분들이 '우리가 원숭이냐, 구경난 것도 아닌데 카메라 들이밀며 인터뷰 따는 건 부적절하다'며 소리 질렀다. 나도 뒤로 빠져서 현장을 파악해야겠단 판단이 들어 멀찍이 떨어져 취재했다”고 말했다.
임석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는 30일 미디어오늘에 “첫 번째 사망자 발표가 있었던 때 가족들이 같이 우는데 카메라 렌즈를 계속 밀착해 촬영하니까 '제발 좀 찍지마라 초상난 거 구경났냐'고 화내시기도 했다”며 “(아직 참사 현장 취재 경험이 없는) 저연차 기자들이 주로 가니까 그런 상황이 더 일어날 수밖에 없기도 하고, 유족들은 언론에 대해 더 실망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임 기자는 셀카봉에 스마트폰을 매단 유튜버들이 곳곳에 몰려와 유족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발언을 했다고도 전했다.
독립저널리스트 미디어몽구(김정환)도 31일 미디어오늘에 “참사 현장 경험이 없는 수습 기자들도 현장에 온 것 같았는데, (유족들을) 휴대폰으로 촬영하기도 했다. 현장에 없는 데스크들의 지시에 맞춰 취재를 하기 때문에 유족들이 흩어지거나 화장실에 갈 때 기자들이 달라붙기도 했다”며 “유족들이 브리핑할때 항상 기자들에게 기사를 언급하는데, 본인의 말이 기사에서 완전히 왜곡됐다고 말한 유족분도 있었다. 웃고 떠들면서 카메라를 세팅하는 스텝들도 있어서 너무 아닌 것 같았다”고 말했다.
사건 초기 조선일보는 탑승객 명단을 공개했다가 삭제했고, MBC 등 지상파는 사고 장면을 그대로 노출해 반복 재생했다. A기자는 “해당 영상은 편집했어야 한다. 충돌 순간을 내보낸 건 어떻게 보면 고인들께서 숨지는 순간을 여과없이 방송한 것”이라며 “개인정보인 탑승객 명단을 공개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될 짓”이라고 말했다.
사연보다 현장 유가족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취재 필요해
참사 현장에서 만난 유가족들에 대한 취재는 어때야 할까. 박한신 대표는 30일 “이제부터는 기자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유족들 개별적으로 만나서 말씀하지 말아달라”며 “(기사의) 80 정도는 허구고 20 정도가 실제라며 광분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어제 오늘 기자분들 명함 많이 받았지만 그 누구한테도 연락드린 적 없다”며 공동취재 방식으로 대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유족을 취재할 땐 그들의 개별적인 사연을 담은 기사보다 현재 유가족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취재와 보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디어몽구는 “유가족분들이 원하는 게 뭔지 곁에서 찍고 알리기만 해도 보도의 가치가 충분하다. 정부 등 책임자가 소홀히 하는 부분들을 보도해야 한다”며 “굳이 유가족에게 달려들어 그간의 참사 취재 관행에 따라 보도하지 말고, 유가족들 곁에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역할을 언론이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실제 현장에선 사건 초반 언론보도 외에 유족들에게 전달되는 정보가 없는 상황에 대한 항의가 쏟아졌다. 특히 기자들은 브리핑을 위한 스피커와 마이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내용이 들리지 않았고, 이를 고쳐달라는 유족들의 항의가 계속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미디어몽구는 “정부 등 관계자 측에서 순간의 위기만 넘기려고 하게 되면 불신이 깊어진다”며 “지금까지 참사가 많이 일어났고 대처에 대한 교훈을 얻었음에도 대응이 어설퍼 답답하고 속상하다”고 말했다. 장일호 기자는 “이전 참사와 비교했을 때 정말 나아진 게 없냐고 하면 그렇진 않다고 느낀다”면서도 “마이크 문제라든지 조금만 신경썼으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유족들이 계속 요청해야만 바뀌는 것을 보며 왜 이런 것까지 유족들이 신경써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건 관계자나 정치인이 현장에 나타나면 유족들과 기자들의 경계가 무너지기 쉽다. 미디어몽구는 “사건 관계자들이 오면 유족들이 궁금한 게 많을텐데, 기자들이 앞으로 먼저 달려들어 질문을 던져서 유족들은 뒤에서 분통 터지는 일도 반복됐다”며 “정치인들이 도착하면 좁은 공간에 기자들이 에워싸서 유가족분들이 화를 내는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참사 현장을 찾은 정치인들에 대한 과도한 의전도 지적됐다. 참사 직후부터 현장에 있던 프랑스 뉴스통신사 AFP(Agence France-Presse)의 강진규 특파원은 같은 날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정치인들의 의전을 중시하는 한국적 문화가 있다. 좋은 일에는 그렇게 해도 되지만, 유가족들이 많은 현장에서까지 똑같이 의전 수준을 유지하는 모습에 실망스러웠다”며 “주요 정치인이 오면 아랫사람들이 일렬로 기다리고 있는 모습, 공항 내에서 정치인들이 기자들에 둘러싸여 위로 메시지를 말하는 모습이 기괴해보였다. 결국 의전을 받는 사람이 의전을 아예 없애야 하고 기자회견 형식도 필요없다. 상황을 고려한 톤앤매너에 대해 정치권이 이번 일을 계기로 고민해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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