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령에서 온 무지개떡과 더 많은 민주주의 [아침햇발]
안선희 | 논설위원
“‘우리’의 힘으로 함께 만든 ‘남태령 대첩’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전봉준투쟁단”
일일이 감사 인사 스티커를 붙인 손바닥만한 무지개떡은 따뜻하고 폭신했다. 지난 21~22일 트랙터 행진 중 경찰에 가로막힌 농민들을 도우려 시민들이 서울 남태령으로 달려가 결국 경찰의 차벽을 열게 만들었던 이른바 ‘남태령 대첩’에 보답하기 위해 농민들이 준비해온 떡이었다.
아껴 먹을 심산으로 가방에 떡을 넣고 줄지어 서 있는 부스들을 따라 걸었다. ‘윤석열을 파면하라’ ‘내란주범 윤석열 퇴진 내란세력 청산’ ‘퇴진 받고 공공성 더’ 같은 손팻말을 나눠 주는 부스들, 따뜻한 차와 어묵, 컵라면, 귤 같은 먹거리를 권하는 부스들, 핫팩과 돗자리를 무료나눔하는 부스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노란 리본을,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보라색 리본을 건넸다. ‘고양이 발바닥 연구회’ ‘윤석열 파면으로 환율 좀 내려보자’ ‘새해에는 새 나라로’ ‘워라밸 비상대책위원회’ ‘MZ는 민주다’…. 이제는 집회의 상징이 된, 시민들이 직접 만든 각양각색 깃발들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난 28일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4차 범시민대행진’ 집회가 열릴 예정인 광화문 근처의 풍경은 찬 바람 속에서도 온기와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자연스럽게 박근혜 탄핵 촉구 촛불집회 당시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랬다. 제도권 정치에 대한 절망이 직접민주주의의 열기로 폭발했었다. 정치는 너무 중요해서 정치인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는 결기가 시민들을 함께 모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비록 대통령은 끌어내렸지만, 당시 분출했던 ‘새로운 체제’를 향한 열망이 온전히 실현되지는 못했다.
여전히 불평등과 차별, 혐오와 배제에 짓눌리는 이들이 존재한다. 노동자, 농민, 장애인, 여성, 이주민, 성소수자 등은 아직 제 몫의 권리를 고스란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은 우리 사회의 불안정을 상징한다. 정치의 실패는 윤석열 같은 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철 지난 신자유주의가 되살아났고, 복지국가는 지체됐다.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요즘 강남 부자들 사이에서는 ‘진보 정부가 들어서면 집값이 또 오를 테니 부동산을 사야 한다’는 말이 떠돈다고 한다. 어처구니없지만 뼈아프다.
이번에는 달라야 한다. 단지 ‘윤석열만 없는 정치’를 위해 수십만명의 시민이 이 혹한에 거리로 나서는 것이 아니다. 집회마다 ‘다른 세상’을 염원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이날도 학교 밖 청소년,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등의 발언이 집회를 이끌었다. “성소수자이자 오타쿠이자 간호사”로 자신을 소개한 김수경 간호사는 “이 모든 수식어를 한번에 말할 수 있는 곳이 있음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가 어디서나 자유롭게 이 모든 수식어를 말할 수 있기 전에는 민주주의가 뿌리내렸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11일 부산 집회에서 쿠팡 노동자, 성매매 여성, 동덕여대 학생, 장애인, 이주민 아동 등의 고통을 열거하며, 한 여성이 말한 것처럼 “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완벽하지 못한 것”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8년 전보다 강해졌다.
‘연대’의 힘도 두드러진다. 남태령 대첩에 이어 지난 24일에는 서울 지하철 안국역 승강장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다이인(죽은 듯 누워 있는 시위 방식) 행동에 시민 300여명이 동참했다. 농민단체, 노동자단체, 사회단체 계좌에는 후원금이 쇄도하고 있다. 노동자 전문 병원을 추진하고 있는 전태일의료센터건립위원회에는 지난 22일부터 25일까지 나흘 동안 10억원이 넘는 후원금이 들어왔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구미공장 옥상에서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1년 가까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박정혜·소현숙 두 여성 노동자에게는 성탄절에 전국 각지에서 생수 수천통이 배달됐다. 옥상에서 지내는 두 노동자에게 꼭 필요한 물이었다. 광화문에서 남태령으로, 남태령에서 안국역으로, 안국역에서 구미로, 그렇게 연대는 이어지고 있다. 마치 여러색이 어울려 하나가 된 무지개떡처럼.
집회를 마친 뒤 시민들은 헌법재판소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족히 수천개가 넘는 깃발이 형형색색의 응원봉과 어울려 저녁 하늘에 나부꼈다. 저 깃발만큼의, 저 응원봉만큼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더 많은 민주주의가. 우리 각자의, 우리 모두의 정치가.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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