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주항공 명단 공개 논란… 유럽에선 섣부른 공표 금지

윤수현 기자 2024. 12. 3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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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반나절도 안 지나 명단 공개… 공개 타당성 찾기 힘들어
참사 성격, 명단 공개된 과거와 달라… 유럽연합, 명단 선제 공표 금지

[미디어오늘 윤수현 기자]

제주항공 참사 발생 3시간도 지나지 않은 지난 29일 오전 11시47분, 조선일보가 속보를 내고 탑승객 영문 이름·생년·성별·국적이 적힌 명단을 공개했다. 확인된 사망자는 47명에 달하는 등 유가족 혼란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탑승객 명단을 공개했다는 점에서 언론윤리 측면의 문제가 크다. 탑승자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이번 참사 특성상 언론이 앞서서 명단을 공개할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해외에선 언론의 무분별한 희생자 신상정보 공개를 지양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조선일보 보도는 당국이 탑승객 명단을 공개하기 전 선제적으로 공개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며, 유가족 동의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는 탑승자 대다수가 희생자가 됐다는 발표 후 기사를 삭제했지만, 이미 명단은 확산됐다. 조선일보 관계자는 지난 29일 미디어오늘에 “(기사) 게재 당시 (명단에 있던) 이들은 희생자가 아닌 탑승자였다. 희생자 명단이면 안 썼을 것”이라고 했다.

대형 참사 사건에서 희생자 이름 등 명단이 공개된 사례가 처음은 아니다. 희생자 정보 공개에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불특정 다수가 희생된 사건의 경우 명단 공개가 필요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때 공개 여부를 판단하는 주체는 언론이 아닌 정부 당국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난 29일 여객기 승객 명단 사진을 공개한 조선일보 속보 기사. 현재 삭제된 상태다. 승객 리스트는 미디어오늘이 모자이크처리했다.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대표적이다. 대구시청은 희생자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기에 홈페이지에 실시간으로 사상자 명단을 공개했으며, 희생자대책위원회가 명단 공개를 요구하기도 했다.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당시에도 당국이 희생자가 누구인지 공개해 언론이 이를 전했다.

특히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희생자 명단을 무분별하게 공개하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언론 내부에 형성됐다. 세월호 참사 초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사망자 실명을 공개했으나 유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명단을 비공개하기로 했다. 2017년 제천 스포츠센터 참사 때 희생자 명단이 언론에 공개된 적 있지만, 당시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시설에서 사고가 난 만큼 명단 공개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언론윤리 기준에도 어긋난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마련된 재난보도준칙에 따르면 언론은 피해자 명단 등 중요한 정보는 재난관리당국 공식 발표에 따라야 한다. 2022년 10·29 참사 이후 발표된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보도 가이드라인>에는 “재난 당사자 취재 시 동의하지 않거나 신상정보 및 사생활 노출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한다”는 내용이 있다.

인터넷 언론 민들레는 2022년 11월13일 10·29 참사 희생자 명단을 유가족 동의 없이 공개해 언론윤리 위반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언론중재위원회는 같은 달 30일 민들레 기사에 시정권고를 결정하면서 “당사자(망인의 경우에는 유족)의 동의 없는 공표는 공중의 정당한 관심과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닌 한 기본권 침해”라고 밝혔다. 당시 조선일보도 사설을 내고 “희생자 신상은 개인정보다. 동의 없이 공개하면 불법”이라고 했다.

해외에선 항공사고와 관련해 유가족 동의를 받지 않거나, 유가족에게 사실관계를 알리기 전 탑승객 명단을 선제적으로 공개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기도 한다. 유럽연합의 '민간항공 사고 및 사건 조사 및 예방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유럽연합 회원국은 항공사고 발생 시 탑승객 정보를 유가족에게 알리기 전 대외 공표할 수 없다. 유가족이 동의하지 않을 시 정부 발표에서도 실명 공표가 금지된다. 이를 위반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

▲지난 29일 오전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착륙 중이던 항공기가 활주로를 이탈해 울타리 외벽을 충돌했다. 사진은 사고 현장에서 소방 당국이 인명 구조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2014년 7월 말레이시아항공 17편 격추사건 당시 주네덜란드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근무한 최경호 전 선임연구원은 지난 29일 페이스북에서 “(당시 한국 대사관에서 피해자 중 한국인이 있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탑승자 및 사망자 명부도 배포나 확인해주지 못하겠다고 했다. '결코 유가족이 언론사나 다른 경로를 통해서 가족의 부음을 먼저 접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네덜란드 정부의 공식입장이었다”고 했다. 실제 네덜란드 정부는 규정에 따라 탑승자 정보를 한국 대사관에 고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레이시아항공이 사건 발생 이틀 뒤 네덜란드 당국과의 협의 없이 홈페이지에 탑승객 명단을 공개했고, 관련 언론 보도가 나갔다.

지난 25일 아제르바이잔 항공 8243편 추락 사건, 지난 8월 브라질 보이패스 항공 2283편 추락 사고의 탑승객 명단도 언론에 보도됐지만, 이는 각각 아제르바이잔 정부와 브라질 항공사가 선제적으로 탑승객 명단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언론 규제기구 임프레스(Impress)는 사고 발생 시 피해자 가족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임프레스는 표준 강령에서 “언론인은 테러·기상 이변 등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정보를 신속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수 있다. 언론인은 피해자 가족들이 피해자들의 부상·사망 소식을 공식 창구가 아닌 기사를 통해 접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체코 내무부는 2008년 발표한 '언론인과 범죄 피해자' 보고서에서 “유가족 동의를 받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자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공개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실명 보도를 원칙으로 해온 일본에서도 변화의 기류가 보인다. 2021년 오사카 빌딩 방화 사건 당시 언론이 피해자 실명을 무분별하게 보도하자 요미우리신문·아사히신문·닛케이 등 유력 신문사가 회원사로 있는 일본신문협회가 유가족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낸 것이다. 일본신문협회는 2022년 3월 <실명보도에 대한 생각> 입장문에서 “프라이버시는 사망한 이에게는 적용되지 않지만 이는 법적 정의일 뿐이다. 법적 문제가 없다고 실명 보도가 무조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일본신문협회는 “최근 희생자 이름을 익명으로 해달라는 유가족들의 요청이 늘어나고 있는데, 인터넷에서 희생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가 늘어났기 때문”이라며 “실명 보도에 대한 판단은 언론사가 책임지고 내려야 하며, 유가족이 의문을 제기할 경우 이에 응대할 책임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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