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영 “15세 美유학, 소아과 인턴 힘들어 포기→단추 디자인 대박” (4인용식탁)[어제TV]

유경상 2024. 12. 31.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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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영이 15세 미국유학을 떠나 소아과 인턴을 거쳐 단추 디자인 대박을 내고 브랜딩계 전설이 된 역사를 밝혔다.

노희영은 그렇게 단추 디자인으로 돈을 벌어서 호텔보다 먼저 오픈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대박이 났고 이후 다양한 브랜딩에 성공하며 브랜딩계 전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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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식탁’ 캡처
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식탁’ 캡처
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식탁’ 캡처

노희영이 15세 미국유학을 떠나 소아과 인턴을 거쳐 단추 디자인 대박을 내고 브랜딩계 전설이 된 역사를 밝혔다.

12월 30일 방송된 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식탁’에서는 브랜딩계 전설 노희영(61세)이 출연했다.

노희영은 “도전을 내가 한 것도 있지만 부모가 시킨 것도 있다. 난 유학가기 싫었다. 외국에서 구박받고 살고 싶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이북 출신이다. 자기는 한다면 한다. 내가 남한에서 이렇게 살았는데 딸은 글로벌하게 키우겠다. 1978년 11월 13일에 미국을 갔다. 그 당시에 누가 글로벌을 생각하냐”며 15세에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 과정을 말했다.

그 유학에서 인생의 전략을 배웠다고. 노희영은 “미국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교실을 옮긴다. 나를 봐주던 가디언이 영어를 못하니 영어가 필요 없는 과목부터 선택해라. 그래야 버틸 수 있다. 수학, 과학을 택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과 학생이 됐다. 전략이 생겼다. 컴퓨터공학과를 할까 의대를 할까. 의대가 암기로 낫겠다. 의대를 했다”며 의대 진학 과정도 말했다.

노희영은 “소아과 인턴을 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애들이 다 울어. 병원을 오면. 의사의 삶은 이런 건가?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이 없어졌다. 평생 하라면 못하겠다. 그러다 미대로 갔다. 우리 집 식구들이 다 옷에 미친 사람들이다. 나는 옷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 가족을 통해 돈을 벌 수 있겠다 했다”며 의대를 거쳐 미대 진학도 밝혔다.

노희영은 “미대 갈 때는 돈벌이로 갔다. 갔더니 우리나라 유명한 선생님들 딸, 아들이 다 있었다. 유학 자유화가 풀려서 다 온 거다. 이거 하면 뼈도 못 추리겠다. 그래서 액세서리로 바꿨다. 단추 디자인을 했다”며 단추 디자인을 택한 과정도 말했다.

노희영은 “4월 부활절 연휴에 너무 급해서. 누가 할까봐. 한국에 왔다. 한국 백화점에 가보니 지춘희, 김영주, 하용수 디자이너가 제일 세련됐다. 지춘희를 누가 소개해주지 않았다. 내가 전화했다. 어시스트가 받았다. 뉴욕에서 온 디자이너라고 하니 뭐라고요? 단추 디자이너요? 파슨스 디자인 스쿨은 알았다. 친구 딸들이 다니니까. 파슨스 졸업한 디자이너가 한국 애가 있다고? 와보라고 하더라”며 직접 디자이너를 찾아갔다고 했다.

당시 노희영은 “유명한 모자, 장갑, 옷을 멋있게 입고 선생님들 옷에 맞는 단추 디자인을 그려서 갔다. 이런 디자인을 하겠다고. 너무 괜찮으니 해서 오래. 최소 주문 수량이 있다. 최소 주문 500개, 개당 5천원. 88년이다. 단추 하나에 5천원으로 3명에게 2천만 원 수주를 받았다. 옷이 한 벌에 50만원이었다. 2만원 단추에 쓸 만한 거”라고 말했다.

이어 “그 돈을 들고 미국에 가서 그동안 입고 싶었던 옷을 사서 서울로 왔다. 그때부터 비극의 시작이다. 대량생산을 한 번도 안 해봐서 실패한 거다. 아버지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돈을 빌려서 울면서 실패했으니 선금 다시 드리겠다. 세 사람이 다 다시 해오라고. 안 받았다. 우리나라 디자이너 중에 내 단추 안 쓴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백화점에 가면 100% 내 단추였다”며 26세에 고급 세단에 기사를 두고 살았다고 했다.

노희영은 그렇게 단추 디자인으로 돈을 벌어서 호텔보다 먼저 오픈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대박이 났고 이후 다양한 브랜딩에 성공하며 브랜딩계 전설이 됐다. (사진=채널A ‘절친 토큐멘터리 4인용식탁’ 캡처)

[뉴스엔 유경상 기자]뉴스엔 유경상 y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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