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한 범죄자? 그저 웃음 모르는 ‘노잼’ 인간일 뿐[인스피아]
인도 출신 소설가 살만 루슈디, 강연서 피습 뒤 범행 동기 탐구
범인은 20대 아랍계 미국인…증오·신념 희박하고 ‘유머’ 결핍
‘모든 인간은 바보니까 불완전해도 괜찮다’ 유머 통해 알게 돼
타인에게 관대해지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연민의 기초’
독자님은 증오범죄라는 단어를 뉴스에서 접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최근 수년간 ‘증오범죄Hate Crime’는 전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증오범죄는 특정 인물이나 집단에 대한 위협이 되기도, 혹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꽤 옛날부터 신문, SNS 등에서 ‘증오범죄’라는 단어를 볼 때 줄곧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증오범죄자의 범죄에서 ‘엄청 싫어하는 감정’이 ‘진짜로’ 중심 원료가 되는지에 대해선데요.
‘무지 싫어하니까 해쳤다’라는 말은 관습적 동어반복에 가까울 뿐 구체적인 이유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싫어하니까 해친다’라는 말을 마치 ‘밥이 있으니까 먹는다’처럼 생각하곤 하는데, 싫어하면 당연히 해치고 싶은 걸까요? 대충 싫어하면서도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어느 정도로 싫어야, 자신의 삶을 망치면서까지 누군가를 해치고 싶어지는 걸까요? 그건 정도의 문제일까요? 무엇보다도 특정 타깃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무차별 증오범죄’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게다가 애초에 어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삶을 뒤바꿀 만한 선택을 할 호오(好惡·좋고 싫음)를 갖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평생 좋아하는 것이 명확한 사람도 드문데, 누군가를 ‘무차별로’ 해칠 만큼 싫어하는, 자신의 그런 행동을 정당화하고 위험을 감내할 정도의 신념이 생기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증오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은 그만큼 강력하고 확고한 증오의 신념을 마음속에 품고 있을까요? … 차라리 무엇이 있음보다도 없음의 측면에 주목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이 때문에 저는 차라리, ‘증오범죄’를 ‘증오가 있음(+)’의 측면이 아니라, ‘무언가가 빠져 있음(-)’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조금 더 사태의 본질에 맞는 게 아닐까 생각해왔던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유머의 부재입니다. 이에 이번 레터에서 저는 ‘증오’와 ‘유머’에 대해 해찰해볼까 합니다.
증오범죄를 과대평가 말라
2022년 8월12일, 한 70대 소설가가 단상에 올랐습니다. 곧이어 한 젊은 남자가 칼을 쥔 채 재빠르게 단상으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리고 단상 위에 있던 이를 무참하게 수십번 찔렀습니다. 그는 얼굴, 가슴 등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그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쪽 눈을 잃고 한때 죽음의 문턱까지 갔어도, 가까스로 ‘기적’처럼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악마의 시>(1988)를 쓴 이후 이란 최고지도자의 사형 칙령(파트와)을 받고 극단주의자들에 반평생 목숨을 위협당해온 인도 출신 소설가 살만 루슈디(사진)의 실제 이야깁니다.
<나이프Knife>는 살만 루슈디가 2022년 뉴욕의 한 강연 행사에서 습격을 당한 경험을 직접 쓴 충격적인 책인데요.
저자는 자신이 칼에 찔리기 전의 일상부터, 피습의 순간, 그리고 그 이후의 신체적·정신적 회복 과정을 한 권의 책에 담았습니다. 책 집필은 그에게 있어 상처의 극복, 일상을 되찾는 분투의 과정이기도 했죠. 제가 이 책을 오늘 레터에서 가져와 본 이유는, 살만 루슈디가 우리가 간과하곤 하는 ‘증오범죄’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이프>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루슈디가 습격을 당한 이후 자신을 찌른 ‘범죄자’의 동기를 탐구해가는 대목입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는 데 성공할 뻔한 청년의 마음속 깜깜한 우물을 들여다봅니다. 하지만 저자는 청년의 마음속에서 ‘어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죽일 만한 맹렬하고 올곧은 증오, 논리, 거창한 신념’을 찾지 못합니다.
단지 그가 발견한 건 ‘텅 빈 우물’, 그뿐이었죠. 범죄자에겐 범죄 동기도, 신념도 희박했습니다. 심지어 루슈디가 자신을 찔렀던 범죄자를 향해 상상 속으로 “그보다는 더 나은 이유를 생각했어야지!”라고 다그칠 정도로요.
사건 이후 언론 보도들에 따르면 그를 죽이려고 했던 범죄자는 아랍계 미국인 20대 청년으로, 루슈디의 책은 ‘두 쪽’만 읽어봤을 뿐이었습니다. 한때 복싱을 하다가 실력 부족으로 좌절하고, 친구나 가족과의 교류도 전혀 없이 4년간 집의 지하실에 틀어박혀 극단주의자 유튜브를 보며 망상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느 날 유튜브에서 루슈디가 강연하는 영상을 봤는데, 그걸 보고 “부정직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냥 죽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거죠. 평생 루슈디와 직접 대화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를 직접 대면한 것은 단상 위에서 그를 찌르는 순간인 20초 정도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범죄자의 악마 같은 잔인무도함에 분개했는데요. 루슈디에 연대하기 위해 “나는 샤를리다je suis charlie”처럼 “나는 살만이다!”를 분연히 외치기도 했죠.
하지만 저자는 반발합니다. 이건 거창한 심판 같은 게 아니고, 가해자는 무시무시한 악당 같은 게 결코 아니라고요. 저자는 범죄자를 규탄하는 시위 행렬을 보며 씁쓸히 생각하죠. “그놈에게 그렇게 큰 힘을 부여하지 말아요, 수잔. 우리는 그렇게 쉽게 박살 나지 않습니다.”
루슈디는 그 청년에게서 결여된 수많은 가치들(진취성, 신념, 균형, 성찰하는 습관, 현실감각 등)을 발견합니다만, 마지막으로 루슈디가 결정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유머의 결핍’입니다. 그는 장장 6회차에 걸친 청년과의 ‘가상 대화’ 속에서 결국 청년의 ‘유머 없음’을 지적하면서 그와의 대화를 끝맺습니다. 범죄자는 “웃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살인을 시도할 수 있었”다는 거죠.
유머와 불완전함: 우리 모두 원래 바보다
궁금해집니다. 왜 살만 루슈디는 마지막으로 가해자에게 ‘유머’가 부족하다고 지적했을까요? 다른 수많은 것들도 아니고 굳이, 콕 집어 유머를요.
우리는 평소 유머의 중요성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만, 고대 그리스 시기부터 많은 철학자들은 ‘웃음’과 ‘유머’를 진지한 철학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아왔습니다. 이는 유머가 단순한 사치품이나 쓸모없는 장난감, 잉여 같은 게 아니라 - ‘인간성의 핵심’과도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국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은 <유머란 무엇인가>에서 유머의 역사와 맥락을 입체적으로 사려 깊게 살펴보는데요. 물론 유머에도 수많은 종류가 존재하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통틀어 좋은 유머가 갖는 공통분모라고 할 만한 것은 꼽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 “유머는 인간은 모두 원래 좀 바보다!”라는 걸 새삼스럽게 알려준다는 겁니다. 횡격막을 격렬하게 떨게 하며, 꽤 유쾌한 방식으로요.
당연히 누군가에게 ‘바보’라고 하는 건, 상대방에게 있어선 깜짝 놀라고 낙담하게 되는 일이긴 합니다.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죠.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네가 바보니까 넌 쫓겨나야 해!’가 아니라, ‘우리 모두 원래부터 바보니까 좀 불완전해도 괜찮아. 우리 피차 바보끼리 너무 진지해지지 말자고’라며 으쓱대는 장난기에 가깝다는 거죠. 조지 오웰은 “농담의 목적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원래부터 이미 우스꽝스러웠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옛날부터, 수많은 유머들의 핵심은 주로 사람들의 어리석은 부분을 놀리고 풍자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평소 진지하고 젠체하는 권력자일수록 놀리는 재미가 있었죠. 그들도 결국 ‘사회적 자아’라는 껍데기를 벗으면 바보 같은 건 매한가지니까요.
실제로 ‘고대 그리스의 깔깔농담집’ <필로겔로스>(서기 약 3~4세기경 채록)의 주된 농담들은 가장 젠체하는 엘리트들, 당시의 그리스 철학자들을 소재로 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농담입니다. “잠을 자는 동안 자신의 모습이 봐줄 만한지 어떤지 궁금했던 한 스콜라 철학자는 눈을 감고 거울을 들여다봤다.”
풍자는 꼭 특정 계급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습니다. 유머는 우리가 평소 두려워하는 상황에 대한 것(죽음, 실패, 소외, 좌절, 실수 등)을 소재로 웃게 함으로써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삶의 진리를 파악하고, 또 약간의 긴장을 풀 수 있도록 하기도 했죠. 우리가 평소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강제로 웃음을 터뜨리게 함으로써 ‘별것 아니네…’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거죠.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도 있듯이요.
다만, ‘우리는 쫌 바보다’라는 말에서 반드시 간과해선 안 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너’만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불완전합니다.
만약 ‘나’만 완벽한 정의의 사도이고, ‘너’만 불완전하다고 하면 우리는 상대의 결점에 대해 유쾌하게 놀리고 웃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보다는 화가 나겠죠. ”왜 너만 이 모양이야!“하면서요. 그런데 오늘날엔, 이런 식으로 ‘나’ 역시 바보라는 인식을 빼놓고 ‘너’만 바보라는 식으로 조롱하고 공격하는 유머가 많습니다. 이글턴에 따르면 이런 유머는 장난할 수 없는 실패한 유머이고, 단지 상대를 향한 공격의 수단이 될 뿐입니다.
이글턴은 남을 비웃는 공격적인 유머는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자신의 불안을 부인하는 방식”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자신의 약점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자기통찰과 극기”를 달성한 사람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 대목을 읽으면서, 큰 느낌표가 떠올랐는데요. 어쩌면 ‘자기비하’란 유머의 한 장르나 특성이라기보다는, 좋은 유머의 필수 조건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직접 자기비하를 내용이나 소재로 하지 않더라도, 옛날부터 제가 편하게 웃으며 볼 수 있었던 유머들의 공통점을 곰곰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청중을 죄다 놀리려고 하는 ‘자신’ 역시 바보라는 것을 인정하는 코미디였거든요. 그런 코미디언이 저를 심하게 놀려도 저는 함께 배를 잡고 깔깔 웃을 수 있었습니다.
좋은 유머에서라면, 이처럼 ‘우리는 모두’ 바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비관주의가 아닌데, 왜냐면 애초에 사람은 불완전한 게 당연하니까요.
장난칠 수 있다면 증오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유머를 통해 우리가 ‘모두 제각기 개성 있는 바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서로에게 훨씬 더 관대해지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겁니다!
‘연민’의 기초인데요. 만약 어떤 사람의 불완전한 점, 단점을 ‘제각기 불완전한 모습의 한 단면’으로 바라보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증오하기 어렵게 되죠. 우리가 서로의 불완전함을 바탕으로 ‘연민’한다면, 우리는 훨씬 깊이 서로의 불완전함을 이해해보고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단순한 이유로 상대방을 혐오하고 배척하지 않고서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좀 짜증이 날 수는 있습니다. 상대방도 불완전하니까요. 그럴 때 자신도 불완전하고 웃기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을 증오하는 대신 조금 짓궂게 놀려주고 괴롭혀주고 싶을 뿐입니다.
독일 작가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는 ‘웃는 철학자’라 불리던 압데라 출신 견유주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그가 살았던 마을을 소재로 <압데라 사람들에 대하여>라는 소설을 썼는데요. 생전 데모크리토스는 기행으로 유명했던 만큼, 압데라에 살던 시절 주민들과 마찰이 많았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막대기를 휘두르고, 꾸짖고, 길바닥에 누워 있거나 했던 것이죠.
압데라 사람들은 이런 데모크리토스를 증오하고 죽이려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압데라 사람들은 데모크리토스를 좀 ‘기이한 바보’라고 생각했고, 그 뻔뻔한 철학자가 만약 자신들을 향해 훈계를 늘어놓고 꾸중을 한다면 오히려 말을 안 듣고 더 나쁜 짓을 함으로써 데모크리토스를 약 올리고 복수했죠.
하지만 이렇게 약을 올리고 일부러 놀리고 복수를 하려고 해봤자 데모크리토스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증오’한 게 아니라, 그냥 바보짓에 웃기만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서로 잔뜩 놀리기만 한 거죠.
데모크리토스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증오의 대상이 되고 독배를 마시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압데라 사람들은 데모크리토스를 그냥 ‘바보’라고 여기고 놀렸을 뿐입니다. 빌란트는 소설에서 만약 소크라테스가 압데라에 살았다면, 사람들은 그를 그냥 “기이한 바보”로 여겼고 오래 살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데모크리토스 쪽 역시 어리석은 압데라 사람들을 향해 ‘진심으로 혐오, 증오’하기보다는 웃고 넘겼을 뿐입니다. 증오는 ‘독’ 같은 것이라, 당하는 사람뿐 아니라 그것을 담고 있는 사람을 망치기 때문이죠. 그는 때때로 외쳤다고 합니다 “압데라인들이여, 압데라인들이여! 그대들은 <나에게> 고통을 주리라는 희망으로 스스로의 뺨을 때렸노라!”
이상이 바로 빌란트가 <압데라 사람들에 대하여>에서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자, 제가 오늘 레터에서 생각해보고 싶었던 핵심입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압데라 사람들에 가까울까요? 아니면 소크라테스를 죽인 그리스인들에 가까울까요?
맺음말
오늘 레터에서는 이상, 웃음과 증오범죄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두 단어에 대해 해찰해보았습니다.
사실 이 편지를 처음 준비할 때 저는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마치 증오범죄라는 중대한 사건을 ‘유머’나 ‘웃음’과 함께 다룸으로써 별것 아닌 것 취급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레터를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 저는 오히려 처음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유머가 없는 삶’이 가져오는 문제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지 ‘노잼’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서로의 불완전함과 단점을 어떻게든 결코 웃어넘기지 못합니다. 그렇게 모든 사소한 것들은 모두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되고, 거의 모든 일에 대하여 우리는 서로를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회에서는 본인의 단점 역시 웃어넘기게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유머의 부재란, 어떤 종류의 불완전함도 자신과 타인에게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 의외로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인간의 내면에는 비참함보다 허영이, 비열함보다 무지가 더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악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기보다는 공허함으로 채워졌다. 우리는 가련하기도 하고 아무런 가치가 없기도 하다. (…) 인간의 특수함은 그가 웃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는 데 있다.” - 몽테뉴, <수상록>
이 글은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에 실린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더 많은 글을 보고 싶으시다면 오른쪽 QR코드를 촬영하거나, 포털에 ‘인스피아’를 검색해서 구독해주세요.
김지원 기자 deepdeep@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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