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없는 대통령서 존경받는 인물로…카터 100세로 별세(종합)

김윤지 2024. 12. 3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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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택에서 별세…역대 최장수 美대통령
경제·인질 문제로 지지율 뚝, 재선은 실패
이후 활발한 외교·사회 활동 '노벨 평화상'
주한미군 철수 추진·방북 3차례 등 韓인연도

[이데일리 김윤지 기자] 인기 없는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재선에 실패한 채 퇴임했지만 이후 널리 존경받는 ‘평화의 사절’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향년 10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국 대통령 가운데 최초로 100세를 넘긴 역대 최장수 미국 대통령이었다.

1980년 8월 뉴욕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당시 지미 카터 미 대통령과 로잘린 카터 여사.(사진=AFP)
카터재단에 따르면 카터 전 대통령은 이날 고향인 조지아 플레인스에 위치한 자택에서 별세했다. 카터 전 대통령의 아들인 칩 카터는 성명에서 “제 부친은 저뿐만 아니라 평화, 인권, 이타적 사랑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웅이셨다”며 이처럼 밝혔다.

직집적인 사인이 공개되지 않았으나 카터 전 대통령은 지난해 2월부터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이 간과 뇌까지 전이돼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자택에서 호스피스(수술이 어려운 질병을 앓는 사람에게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치료하는 것) 치료를 받았다.

경기 침체·인질 사태로 재선 실패

그는 조지아 주지사를 거쳐 1976년 현직인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을 제치고 제 39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재임 기간 대표적인 치적은 중동 평화 협상 중재 성공인 ‘캠프데이비드 협정’이 있다. 그는 1978년 9월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당시 이스라엘 총리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해 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수십년간 이어져 온 중동 갈등을 막고 중동 평화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당시 미국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성장 둔화와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여기에 1979년 11월 이란 이슬람 혁명 후 강경파 대학생들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장악하고 52명의 미국인들을 인질로 잡는 사태도 벌어졌다. 상황은 444일간 이어졌고, 카터 당시 대통령은 사태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지지율에 타격을 입었다.

결국 그는 재선에 도전했으나 공화당 소속 로널드 레이건에게 압도적인 표차로 패배했다.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 당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사진=AFP)

“최고의 전직 대통령 남을것”

카터 전 대통령은 백악관을 떠난 이후 민간 외교와 사회 활동으로 재임 때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카터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경멸에서 존경으로 그의 대통령 퇴임 이후 발전했다”고 평했다.

재임 시절 “인권이야말로 우리 외교 정책의 영혼”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던 그는 로잘린 여사와 함께 1982년 평화 정착 및 인도주의적 임무를 위한 카터재단을 설립했다. ‘작은 유엔’처럼 운영되는 카터재단은 교육, 농업 개발 및 보건 분야 프로그램을 후원하고 세계 각국 공정한 선거를 지원한다.

카터 부부는 평화와 인권 옹호에 앞장서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을 짓는 비영리 단체인 해비타트 사랑의 집 짓기 운동도 수십년 동안 진행했다.

이외에도 카터 전 대통령은 아이티, 보스니아 등 국제 분쟁 지역에서 그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 받아 그는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당시 노벨상 위원회는 그를 “아마도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유능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지 않겠으나 분명 역사상 최고의 전직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박정희와 충돌·방북 3차례, 韓인연

한국과 관계에선 재임 시절 주한미군 철수 추진과 신군부 용인 논란 등 논쟁적인 사안들도 있었다. 그는 1976년 민주당 대선 후보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 한국의 인권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주한미군의 단계적인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1977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단계적으로 주한미군을 철군시킨다는 세부 계획도 제시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카터 행정부를 향해 “내정간섭을 중단하라”고 불만을 표출했다. 2018년 공개된 미 외교 기밀문서에 따르면 1979년 6월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선 한미 정상이 주한 미군 문제를 두고 정면 충돌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이른바 ‘암스트롱 보고서’ 이후 달라진 여론으로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 감축 계획은 보류됐다.

2023년 11월 아내 로잘린 카터의 장례식에 참석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사진=AFP)
박정희 정부를 향해 인권개선과 민주화를 압박했던 카터 행정부였으나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 사망 이후 신군부의 집권은 사실상 ‘묵인’해 논란의 대상이 됐다.

그런가하면 그는 총 3차례 방북했다. 평화적 해결책을 위한 민간 외교 사절로 활동했던 그는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4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이후 1차 북핵 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방북해 김일성 북한 주석과 회담하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 정상회담을 주선했다. 그해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카터 전 대통령을 매개로 하는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이후에도 그는 미국인 억류 사안이 있었던 2010년 8월, 세계 평화 정착과 인권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전직 지도자들의 모임인 ‘디 엘더스’ 소속 전직 정상들과 함께 2011년 4월 북한을 방문했다.

김윤지 (jay3@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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