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때 피고 진 서출 거목” 홍계남 장군은 ‘홍길동’이었다
- 신출귀몰 유격전 이름날린 장군
- 정작 승전 기록·공적부서 누락
- 집안서도 호형호부 못 하며 차별
- 나림, 역사소설 ‘천명’ 집필하며
- 억울한 장군의 통분 삭혀주려 해
- 사실 기반 적나라한 묘사가 압권
서른셋의 삽상한 청년 장수 홍계남은 임진왜란 전투에서 전사한다. 효성 지극하고 무공 절륜한 유격대장 ‘홍나비’는 죽어 신화가 된다. ‘홍길동전’의 한 모델이다.

나림 이병주는 홍계남 장군의 사적을 찾아 안성에 두 번 갔다. 안성(安城)은 안이란 글자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지명이다. 하지만 홍계남에게 안성은 통분의 땅이다. 나림은 ‘천명’을 지어 그 통분을 삭혀주려 했다. ‘유성(流星)의 부(賦)’란 원 제목에서 보듯 빛나는 유성처럼 스러진 영웅을 기리는 만사(輓詞)다. 행장(行狀)이 애틋하면서도 활달하다. 나는 ‘천명’을 ‘홍길동전’보다 더 공들여 읽었다. 재미와 의미를 고루 주는 나림 역사소설의 백미다.
역사소설은 쓰는 작가도 읽는 독자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나림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비롯하여 이긍익의 ‘연려실기술’과 유성룡의 ‘징비록’ 등 숱한 자료를 섭렵했다. 전해지는 야사를 포함하여 온갖 전거(典據)를 수집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반대하는 일본 다성(茶聖) 센리큐(千利休)를 할복하게 한 사건 등 일본 자료도 넓게 섭렵했다. 나림의 표현은 리얼리티가 강렬하다. “그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무이(無二)의 충신이었던 센리큐는 70세에 주름 잡힌 배를 갈라 죽었다. 이것이 곧 히데요시에게는 망조였지만 망할 인간이 망조를 알 수는 없다.” 나림은 당시 일본에 와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가 본국에 보낸 서신까지 확인하여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역사소설의 한 전범인 ‘삼국지연의’는 칠실삼허(七實三虛)다. 70% 사실에 30% 상상력을 더했다는 뜻이다. 30% 상상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단단히 고증된 70%의 사실이 바탕이 돼야 한다. 역사소설 작가의 공력이 절실한 대목이다. 독자도 그걸 읽어내려니 고되다. 독자의 고됨을 만회해 주는 것이 바로 재미다. 사실에다 상상력을 더해 감동시키고 격분케 하고 먹먹하게 만들며 긴 여운에 잠 못 이루게 한다. ‘삼국지연의’는 적벽대전 대목에서 나관중의 상상력이 최대로 발휘됐고, ‘천명’은 임진왜란 전투 대목에서 나림의 상상력이 최대로 발휘되었다.
▮임진왜란 생각하면 먹먹하고 답답

임진왜란을 되새기면 참으로 먹먹하다. 400여 년 전의 고통과 수모가 지금도 아프다. 그 아픔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허황한 야심 때문도 있지만, 기실 조선 자체의 문제 때문이다. 그 난리 통에 어찌 그리 조급하고 각박하며 어리석었을까. 어찌 그리도 인재를 몰라보고 사람 귀한 줄 몰랐을까. 아니 그 난리를 당하도록 아무런 준비 대책이 없었다니. 부산에서 서울까지 그 대군이 단 20일 만에 당도했다니. 세상에 그럴 수도 있나 싶으니 슬픔을 넘어 이가 벅벅 갈릴 지경이다. 열벙거지가 터진다.
나림은 그런 사연을 위로 임금 선조부터 당쟁으로 다투던 대신들 그리고 아래로 전장의 장수와 관군 의병 상황까지 사실(史實)을 기반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당시 기록을 읽으면 속이 터지고 애가 녹는다. 정작 원병을 보냈던 명나라는 망했는데 고스란히 난리를 겪었던 조선은 왜 망하지 않았나 싶으니 절로 한숨이 난다. 오죽하면 왜군 장수들끼리 이런 대화를 나누었겠는가 싶다. “이 나라에 와 보고 느낀 것은 백성들은 대체로 훌륭한 것 같은데 조정이 썩어 있다는 사실이오.” “문약한 인간들이 조정을 차지하고, 서로 당파싸움만 한다면서요?” “그런데도 백성이 의병을 일으키고 있으니 실로 놀랄 만한 민족성이오.”
▮위대함과 슬픔, 모두 간직했네

홍계남은 외로운 운명 고독한 팔자를 타고난 인물이다. 양반집 서자는 답답했다. 아무리 잘 나도 애초 뜻을 펼칠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집안에서나 사회에서나 서얼은 심한 차별을 받았다. 나림은 홍계남이 남양 홍씨 집안에서 당한 호형호부(呼兄呼父)조차 하지 못하는 사연과 출사해서도 군문(軍門)에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상황을 실감 나게 묘사한다. ‘천명’엔 신출귀몰 유격전으로 왜군을 떨게 했던 홍계남의 전과(戰果)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정황이 생생하다.
통신사 일행으로 교토에서 마술(馬術)과 궁술을 시연하고 당대 대표 검객을 단숨에 제압하는 신기를 보였으나, 희한하게 품계도 낮고 사신단 내에서 예우도 받지 못하는 모습에 일본 측은 홍계남을 포섭하려 한다. 일당만(一當萬)의 인걸이니 성 하나를 얻는 것과 같다며 적극 공작한다. ‘국조보감’에 당시 홍계남이 보여준 기사술(騎射術) 기록이 있고, 히데요시가 아꼈던 양자 히데쓰구가 주목한 사연도 있다. 물론 홍계남은 미인계를 포함한 여러 회유를 단호히 거절하고 한 조각 선물도 받지 않았다.
예부터 세 가지 불후(不朽)가 있다. 첫째, 말과 글로 큰 성취를 이뤄낸 입언(立言)이다. 역대 문사와 외교관이 세운 업적이다. 둘째, 전공(戰功)을 세우는 입공(立功)이다. 역대 장수들의 공적이다. 셋째, 덕으로 세상을 훈도하는 입덕(立德)이다. 역대 큰 스승과 성군이 쌓은 덕이다. 이 세 가지 성취는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않는다. 홍계남은 입공했다. 다만 공에 상(賞)이 마땅하지 않았다.
서얼을 차별하는 법을 고치려 율곡 이이가 애썼다. 율곡은 “인성에 적서(嫡庶)의 차가 있을 까닭이 없고, 인품에 귀천의 별(別)이 있을 리 없는데 한갓 구차한 법을 조작하여 사람을 얽어매는 것은 인생의 도리가 아니다”는 이치를 먼저 내세웠다. 그리고 병조판서로서 “자원하여 6진 수비에 나가 만 3년 복무하는 자는 서얼이라도 과거에 오르는 것을 허(許)하고 천민들을 양민으로 올려주도록 하자”는 구체안까지 제시했다. 공(功)으로 서얼 대우를 개선하고 면천 기회를 주자는 주장이 강력했다. 그렇게라도 양병(養兵) 않으면 북적(北狄)과 남만(南蠻)을 대적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중신들은 강상(綱常)을 함부로 변개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선조 또한 시종 의견을 내지 않았다. 율곡의 양병 계획은 무산되고, 율곡 사후 8년 남만의 침공 즉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율곡의 통찰과 지혜도 놓치지 말자

나림은 이 대목에서 여섯 살 홍계남이 같은 서자 출신 스승 김달손과 함께 대관령을 넘어 율곡 사저를 찾는 장면을 연출한다. 율곡은 500리 길을 걸어 온 영특한 소년을 위해 4가지 길을 제시한다. 산(産) 문(文) 무(武) 그리고 반(反)이다.
식산에서 큰 성취를 이루면 반상귀천(班常貴賤)에도 불구하고 장부의 면목을 세울 수 있고, 사관(仕官)에 뜻 두지 않고 호학만으로 문을 이룰 수도 있다. 반(反)은 당위의 길은 아니나 결과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일도 있다. 바로 임꺽정 경우다. 율곡은 임꺽정에게 등용 길을 열어주어 장군으로 대우했더라면 변방에서 큰 공을 세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드러내고, 무과(武科)에서만은 반상 귀천 적서 구별 없이 등용하도록 제도와 관례를 고쳐보겠다고 말한다.
율곡 자신 적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양자 들이지 않고 서자에게 후사를 잇게 했다. 과연 열린 인물이다.
홍계남의 무용(武勇)은 유격전에서 빛났다. 모든 장수가 공성과 수성에 중점을 두고 진지전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공적부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유격전은 전과(戰果) 확인이 쉽지 않아 공적 인정받기가 어렵다. 홍계남은 수십의 전투에 연전연승했음에도 공성과 진지전 이외 승전은 송두리째 공적부에서 빠졌을 뿐만 아니라 기록에조차도 누락되었다. 그래도 홍계남 사후 140년, 안성 군민이 합심해서 고루비(故壘碑)도 세우고 비명(碑銘)도 새겼다. 나림은 “임진왜란에서 피고 진 서출 거목”이란 타이틀로 장군을 진혼(鎭魂)했다.

임진년에 시작된 전란은 7년 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끝났다. 숨을 거두며 그는 “나의 병정들을 조선의 궁귀(窮鬼)로 만들 수 없으니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빨리 데리고 오도록 하라”고 했다. 나림은 “죽음의 자리에서 겨우 광기가 정기(正氣)로 돌아온 셈인데, 광기는 죽음으로써만 고쳐진다는 허망한 교훈을 새삼스레 확인한다”고 결론짓는다. 인간의 광기, 어이없지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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