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다시 만난 세계'…집회에 울려 퍼진 '어린 친구들' 목소리 [스프]

김민표 D콘텐츠 제작위원 2024. 12. 2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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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저격] (글 : 임희윤 음악평론가)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소녀시대 멤버들을 데뷔 초기에 만났던 기억이 가끔 떠오릅니다. 그땐 저도 사회초년생이자 새내기 기자였지요. 당시 '소녀시대'란 곡으로 돌아온 소녀시대라는 신인 걸그룹을 만나 인터뷰했어요. 멤버가 9명이나 된다고 듣고 겁이 나서 데뷔곡이라는 '다시 만난 세계'의 뮤직비디오를 몇 번이고 돌려봤죠. 멤버들의 이름과 얼굴을 되뇌고 익혔습니다. 마침내 대면한 자리에서 멤버들이 직접 자기소개를 한다기에 "잠시만요!"로 멈춘 뒤 제가 일일이 멤버 하나하나의 이름을 불러줬어요. 해맑은 웃음, 진짜 기뻐 보이는 얼굴들로 제게 일동 박수를 쳐주던 장면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Girls' Generation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Into The New World)' MV
[ https://youtu.be/0k2Zzkw_-0I ]


얼굴을 알아봐 줬다는 이유만으로 진심 어린 기쁨을 보여주던, 아직은 관심과 인기에 목말라 있던 앳된 소녀들. 그들은 어느덧 인기 가수를 지나 대선배 아이돌이 됐습니다. '다시 만난 세계'는 데뷔곡이었지만 듣는 순간 명곡이라는 느낌이 올 정도의 수작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얼마 전 거리에서 무려 17년 만에 다시 만난 세계를 다시 만났습니다. 또 다른 뭉클함으로요.


탄핵 가결 순간 '다시 만난 세계' 여의도 곳곳 떼창 (현장영상) / SBS
[ https://youtu.be/a5jJYZQvl_g ]


거리는 10대, 20대, 30대 여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손에는 저마다 아이돌 응원봉이 들려 있었고, 무대 쪽 대형 스피커에서는 방탄소년단, 데이식스, 뉴진스, 투어스 같은 아이돌 그룹의 노래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습니다. 집회를 추동한 이 '응원봉 물결'은 어디서 온 걸까요.

일단은 이번 집회의 성격이 2016년 탄핵 시국을 비롯해 다른 현장들과 달랐다는 데 주목할 만합니다. (이번에도 물론 시민 발언대 순서가 일부 이어졌습니다만) 이번엔 사안 자체가, 사람들의 추가적인 주장, 사례 발표, 설명 따위가 거의 필요 없을 정도의 상식 대 비상식, 이성 대 비이성의 문제에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사안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발언보다는 여러 사람이 모이고 모인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는 일, 그 자체가 중요한 집회였을 겁니다. 그 정도로 명약관화한 이슈였고요. 정치적 맥락과 상관없이 템포가 빠르고 비트를 일정하게 쿵쿵 때려주며 적당히 따라 부를 신나는 선율이 있는 아이돌 노래야말로 '모여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는, 그것 자체가 큰 의미인' 이 집회의 동력 공급원으로 제격이었을 거예요.


BTS (방탄소년단) '불타오르네 (FIRE)' Official MV
[ https://youtu.be/4ujQOR2DMFM ]


사실 '집회 음악' 혁신의 움직임은 이미 2016년 한 차례 감지됐습니다. 당시 이화여대에서 학교 본관 점거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이 경찰과 대치하게 되자 스크럼을 짜며 '다시 만난 세계'를 목이 터져라 제창하는 광경이 SNS를 타고 화제를 모았죠. 기성세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광야에서'도, '아침이슬'도, '임을 위한 행진곡'도 아닌 아이돌 노래를 저항 가요로...?

시대가 바뀌면 세계가 바뀌고 노래가 바뀝니다. 돌아보면, 1996년 연세대 한총련 사태를 기점으로 주요 대학에서 총학생회의 탈운동권화가 급속히 진행됐습니다. 마침, 앞서 1990년대 초중반부터 대학 축제에 주류 댄스 가요가 진출하며 찬반 양론을 부르던 시기였습니다. '민중가요 전승'의 맥은 이때부터 서서히 끊기기 시작합니다. 이 전까지만 해도 대학에 들어가면 으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과 각종 환영회에서는 선배들로부터 학교 응원가와 함께 민중가요의 선율과 율동도 배우는 것이 통과의례였는데 말이죠.


광야에서-안치환
[ https://youtu.be/drQ5zGZ86XQ ]


'운동권'과 민중가요는 희미해져도 집회는 필요합니다. 고대로부터 노동요가 있고, 관혼상제에 음악이 빠지지 않듯 집회에서 음악은 필수입니다. 구호 외에도 실시간의 흐름에 함께 올라타 한목소리로 외칠 수 있는 무언가가 말입니다. 어떤 노래가 민중가요를 대체할 수 있을까요.

대안을 찾으려면 일단 민중가요의 특성부터 살펴봐야겠습니다. 일단은 반주가 불가능한 현장에서 목소리만으로, 아카펠라로 제창이 가능해야 하겠죠. 그러려면 첫째, 참석자들이 다 아는 노래여야 합니다. 둘째, 반주 없이 제창만으로도 분위기가 고양돼야 합니다. 선율이 쉬우면서도 가사 역시 의미심장하면 금상첨화입니다.

세기말 세기초를 지나며 '학습된 민중가요'를 대체하게 된 것이 '체득한 히트곡'이 됩니다. 그 흐름은 꽤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케이팝은 고양감을 유지할 빠른 템포와 드라마틱한 악곡 전개에 함께 외칠 만한 후크(hook) 구간도 겸비했습니다.


DAY6(데이식스)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M/V
[ https://youtu.be/vnS_jn2uibs ]


'연대의 경험'이란 측면에서도 케이팝은 탄탄한 배경입니다. 대규모 민주화 운동은 물론이고 중소 규모의 시위 경험이 이전 세대에 비해 현저히 적은 새로운 MZ세대. 이들에게도 집회란 영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명사. 여러 사람이 어떤 목적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모임. 또는 그런 모임.'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집회(集會)'의 정의입니다.

젊은 세대 중 상당수가 '최애 아이돌'의 콘서트나 팬미팅에 참석한 경험을 공유합니다. 수천, 수만의 인파가 모여 한목소리로 뭔가를 애타게 외치거나 불러본 기억 말입니다. 근년에 불고 있는 프로야구나 축구 관람 붐도 일맥상통합니다.

X의 특성도 한몫했습니다. 이번 집회에서 '소리통'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 바로 X(옛 트위터)죠. X는 아이돌 팬들의 대표적 소통 창구입니다. X는 단도직입, 간단명료가 특징입니다. 한두 장의 사진이나 짧은 문구를 게시하거나 쉽게 공유하기 좋습니다. 아이돌의 셀카나 출근길 사진, 인상적인 안부 문구 같은 것이 수많은 리트윗을 기록하며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대개 X의 실시간 트렌드 키워드는 아이돌의 생일이나 축하 문구가 차지합니다. 그러나 이번 계엄 사태 직후부터 대한민국 X 트렌드 키워드 최상위권에는 '계엄', '탄핵' 관련 해시태그가 올라왔습니다. 그것들이 아이돌 관련 키워드와 혼재되는 양상도 보여줬습니다.


"울컥했다" SNS 할 줄 모른다며 글 부탁, 지도까지 등장…'선결제'에 진심인 사람들의 이야기 (현장영상) / SBS
[ https://youtu.be/iJg-hoUMZmg ]


계엄 발령 이틀 뒤쯤 올라온 트렌드 키워드 가운데 '#좋은_세상'이 기억납니다. 처음엔 자신의 최애 아이돌을 언급하며 'OO야, 좋은 세상 만들어줄게!'라며 집회에 나가겠다는 다짐의 글들이 다수였습니다. 그러나 하루 동안 '좋은 세상은 누구를 위해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해 만들어가야 한다'고 독려하는 글들이 새로 쏟아지기 시작했죠. '#좋은_세상'을 둘러싼 문장들은 그렇게 조금씩 바뀌어 갔습니다.

그리고 하루 이틀 사이에 X에는 여의도 가는 우회 교통편 정보가 쏟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예의 화제가 된 커피나 먹거리 선결제 정보의 물결이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소식은 주류 미디어에도 타전됩니다. 집회 참석자 중 10~30대 여성의 비율이 높다면서 젊은 세대가 바꿔 가는 집회 문화를 다루는 기사를 보며, 야속한 댓글도 보게 됩니다. '정치도 모르면서 감정에 휩쓸려 나서는 어린 친구들'이라며 폄훼하는 글들 말입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김민표 D콘텐츠 제작위원 minpyo@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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