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군서 한국광복군까지, 무장투쟁 삶 바친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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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⑫ 몽호 황학수
몽호(夢乎) 황학수 선생은 1879년 서울 화동에서 재력가였던 황두연의 4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개화기의 혼란 속에서 어머니와 충북 단양으로 내려가 한학을 수학하면서 결혼했고 후에 부친과 가족들도 내려왔다. 1895년 부모님을 여의고 서울 계동으로 이사해, 1898년 제1회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시험에 합격한 후 1900년 128명이 제1기생인 육군참위로 임관했다.
7년 남짓 대한제국군인으로 활동한 선생은 소신 있고 강직한 군인이었다. 경북지방 치안을 담당하는 안동진위대 대장시절에는 의적-의병의 성격이 있는 토비(土匪)를 진압하면서 자진해산을 종용하거나 생포해 재량으로 석방하기도 했다. 1907년 정미7조약으로 일제가 대한제국군대를 해산시키자 당시 부위였던 선생은 일본유학 등의 제의를 거절하고 낙향했다. 충북 제천으로 내려간 선생은 1908년 지방 유지들과 함께 부명학교(현 동명초등학교)를 설립한다.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하던 육군무관학교 동기생 김학소로부터 동기생들이 만주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선생은 만주행을 결심하고 독립운동 자금마련을 위해 금광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한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후 만주로 망명했으나 동기생들의 소재를 찾지 못하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상해로 향했다. 임정에서는 곧바로 군무부 참사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임정에 육군무관학교가 설립되자 교관으로 활동했지만 재정난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모든 직책을 사퇴하고 만주로 향했다.
![대한제국군에서 한국독립군, 한국광복군까지 무장독립투쟁 최전선에서 군인의 길을 걸은 몽호(夢乎) 황학수 선생. [사진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아카이브]](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3/10/joongangsunday/20250310155334060pokb.jpg)
북만주로 향한 선생은 북만주·동만주 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단체 ‘신민부’를 조직해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던 옛 동료 김학소를 만나게 된다. 신민부는 압록강 서간도 일대의 참의부, 남만주 일대의 정의부와 함께 만주지역 3부를 이룬 조직이다. 선생은 신민부에서 참모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군구를 개척하는 등 독립군 활동에 진력했다. 1927년 하얼빈 일본영사관 경찰과 중국경찰이 신민부 본부를 습격해 김학소 등 12명의 간부들을 체포했지만 선생은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어 무사했다. 이후 김좌진이 후임 집행위원장에 선출되고 선생은 참모부 위원장에 선임된다. 선생은 군구를 계속 확대하는 한편 지리 및 작전지도, 일본군 주둔지도 작성 등 국내 진공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1928년 만주지역단체들의 통합 움직임이 전개되어 신민부 군정파와 참의부, 정의부 일부 세력이 연합해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선생은 군사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러나 혁신의회가 해체되자 선생은 북만주지역으로 가서 홍진, 김좌진 등과 함께 비밀독립운동결사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해 북만주 일대의 독립운동 근거지를 개척한다. 한편, 이 시기에 만주지역 한인사회에 공산주의운동이 확산되면서 민족주의 진영과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고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만주지역 ‘생육사’와 ‘한국총연합회’ 등 민족주의 세력이 결집해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게 되는데 집행위원장에 홍진, 부위원장에 선생과 김규식 등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북만주에서는 한국독립당, 남만주에서는 조선혁명당이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한국광복군 총사령 대리였던 황학수 선생은 일본군 점령지대에서 모병활동을 전개했다. 사진은 1940년 중국 산시성 시안시에서 촬영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판사처 단체 사진. 첫 번째줄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이 황 선생이다. [사진 독립기념관]](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3/10/joongangsunday/20250310155335729vcyo.jpg)
1934년경 선생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면서 북경을 거쳐 사막과 초원이 이어지는 내몽골지역을 지나 임정과 연계된 한인촌이 있는 포두(바오터우)로 간다. 이동 중인 임정 소식을 듣고 대동, 오원, 부곡을 지나 약 4년간의 고난의 행군 끝에 1938년 임정이 있는 장사에 도착했다. 당시 임정 주석 이동녕을 비롯한 요인들과 동지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바로 임정에 합류했다.
17년 만에 임정에 돌아온 선생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군사계획수립과 장교양성, 군대편성을 추진했다. 그러나 일제의 계속된 공격으로 임정은 기강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을 추진한다. 최우선 과제인 병력 확보를 위해 선생을 비롯한 군사특파단은 서안으로 가서 모병활동을 전개했다. 임정은 중국정부와 교섭을 추진해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출범하게 되며 선생은 총사령부의 부관처장을 맡게 된다.
![서울현충원 황학수 선생의 묘. [사진 공훈전자사료관]](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3/10/joongangsunday/20250310155337143pfzl.jpg)
선생은 서안에서 광복군을 지휘하면서 중국군과 연합해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큰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1941년 중국 측이 광복군을 중국군에 예속시키려 총사령부를 중경으로 옮기도록 하면서 3년 만에 다시 중경으로 향했다.
선생은 적지에서까지 병력을 모집하고 훈련시켜 독립군을 조직하고 항일전쟁을 치르는 등 평생을 야전군인으로 살아오다 중경 귀환 후 군복을 벗고 임정 내에서 국무위원과 생계부장 등 요직을 맡아 활동한다. 이즈음 독립운동가들의 통합 노력과 태평양전쟁 발발 등의 영향으로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진영이 임정과 임시의정원에 참여하게 되고 조선의용대도 광복군에 편입되어 임정은 명실상부한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1944년 개헌 후 구성된 좌우연합정부에서 김구가 주석으로, 선생은 무임소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일제 항복 후 임정 인사들은 25년 만에 중경에서 상해로 이동했고 미군정 요구에 따라 개인자격으로 귀국한다. 선생은 귀국 후 국무위원으로,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장으로 활동했으나 미군정 하에서 임정의 활동공간이 제한되고 정치적 입지도 좁아졌다. 결국 선생은 고향인 충북 제천으로 내려갔고 6·25전쟁 중인 1953년 3월 12일 향년 75세로 서거했다. 국립현충원 임정묘역에 묘소가 있고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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