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가의 세계⑭] 미슐랭 타이어와 떠난 미식여행…숨은 지역음식에 왕관 씌우다

강경록 2024. 12. 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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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음식의 동맹 주창한 '미식 황태자' 퀴르농스키
퀴르농스키 (사진=Jpbrigand)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 겸 음식문화평론가] 인류의 역사는 음식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우리의 밥상은 이미 과거의 밥상이 아니다. 조선 후기의 기록에 성인 남자는 7홉(약 420g)의 쌀로 한 끼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요즘 공깃밥의 두 배 규모다.

예부터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지만 이젠 달라졌다. 최근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집계가 시작된 196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요즘 사람들은 한 끼에 평균 밥 반 공기 정도로 버티고 있다. 반면 돼지, 소, 닭고기 등 3대 육류 소비량은 지난해 기준 1인당 60.6㎏으로 쌀 소비량을 넘어섰다.

우리 경제의 산업화는 외식 산업의 발달과 함께 식생활의 서구화를 가져왔다. 20년 전만 해도 식탁에서 볼 수 없었던 브로콜리, 셀러리, 파프리카가 등장하고 식당에선 부대찌개, LA갈비와 같은 정체가 모호한 음식들이 팔리고 있다. 인스턴트 식품과 배달 음식의 소비도 날로 늘어가고 있다.

한 시대의 음식문화 발전에는 항상 그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이 존재한다. 그들은 새로운 식재료와 요리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즐기며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식기와 식탁예절을 도입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오늘날의 음식문화를 만든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고 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때다.

미식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퀴르농스키(Curnonsky, 1872~1956년)는 미식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미식가이자 문필가, 저널리스트였고 프랑스를 미식국가로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루아르강 하류 지역 앙제 출신으로 본명은 모리스 에드몽 사이양(Maurice Edmond Sailland)이다. 19세기 말 파리로 진출해 유령 작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문인들을 사귀고 신문에 칼럼도 쓰게 된다. 퀴르농스키라는 필명도 그 시절 그를 아끼던 유머 작가 알퐁스 알레의 제안으로 갖게 됐다. 바야흐로 자동차 시대의 막이 올랐다. 미슐랭 타이어는 자동차의 활발한 보급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 무렵의 어느 날 단골 바에서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던 퀴르농스키가 “프랑스 한림원에는 불멸의 인간이 40명 있는데, 펑크가 나지 않는 것은 미슐랭뿐”이라는 재담을 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미슐랭 사장이 엄청난 만족감을 표했다고 한다. 그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무렵 미슐랭은 회사의 마스코트 캐릭터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 이름 ‘비벤덤’을 퀴르농스키가 작명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루머의 진위는 알 길이 없으나 그즈음 퀴르농스키가 미슐랭이 광고를 게재하던 ‘쇼패르’지에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사실이다. 그는 타이어에 관련된 광고성 기사를 재미있게 썼는데 글 말미에는 꼭 비벤덤이라고 서명했다. 그때부터 그는 자동차 예찬론자가 됐는데 어느 사진집에 기고한 글에는 “자동차를 낳음으로써 인간은 신을 뛰어넘었다”라는 찬사까지 나온다.

1902년 퀴르농스키는 인도차이나 하노이에서 열린 박람회에 방문단 일원으로 참가한다. 그는 아시아에 1년 넘게 체류하면서 캄보디아, 인도, 필리핀, 중국 운남성 등을 여행했다. 그곳을 유람하면서 퀴르농스키는 아시아 음식에 대한 식견을 넓혔고 관광산업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912년에는 언론인 루이 포레가 설립한 미식가모임 ‘100인 클럽’에 참여한다. 클럽은 자동차여행을 한다는 전제 아래 지방의 맛있는 식당 발굴을 목적으로 결성됐다. 입회조건은 클럽의 공인미식가 한 명을 대동하고 자동차로 4만 ㎞ 이상을 달리며 지역의 식당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안내서는 주류신문 ‘르 마탱’에 실렸다. 언론을 통한 음식비평의 효시였다.

지방의 요리사를 찾아내는 임무는 주로 퀴르농스키에게 맡겨졌다. 그 무렵 퀴르농스키는 ‘위대한 지역요리의 부활’과 ‘관광과 미식의 신성동맹’을 주창했다. 그는 또 가스트로노미(미식)와 유목민이라는 뜻의 노마드를 합쳐 ‘가스트로노마드’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요즘 감각으로는 ‘방랑식객’이라고나 할까. 퀴르농스키는 자신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단호한 가스트로노마드라고 했는데, 그는 매년 3~4개월씩 파리를 떠나 지방의 음식을 찾아다녔다.

미슐랭 가이드 소개 삽화 (사진=미슐랭 홈페이지)
◇미식의 나라 프랑스

1921년 그는 소설가 마르셀 루프와 함께 ‘미식의 나라 프랑스’ 시리즈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3개월에 1권씩 발행됐는데 ‘프랑스의 뛰어난 요리와 쾌적한 숙소 안내’라는 부제처럼 주로 자동차를 이용하는 여행자를 위한 안내 책자였다. 책은 12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매호 한 지역의 명물 요리와 추천 레스토랑, 숙소를 그림을 곁들여 소개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퀴르농스키는 루프와 함께 프랑스 전역을 자동차로 돌며 정보를 찾아 순례했다. 둘 다 운전을 할 줄 몰라 전용 기사를 고용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미슐랭 가이드 소개 삽화 (사진=미슐랭 홈페이지)
이 시리즈는 7년에 걸쳐 28편까지 나왔는데 이 책의 발행으로 퀴르농스키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00년 타이어회사의 홍보책자로 발간되기 시작한 미슐랭 가이드가 1920년 유료판매로 전환했고, 레스토랑을 별의 숫자로 등급 매기는 관행은 1926년 시작됐다. 훗날 퀴르농스키의 전기를 쓴 시몽 아르벨로는 그가 초기의 미슐랭 가이드 편찬에 관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어쨌거나 미슐랭에 의해 유행하기 시작한 자동차 미식여행의 진정한 창시자는 퀴르농스키라 할 수 있다. 그는 수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지역요리의 매력에 빠져들게 했다.

1927년경 파리에서 여러 방면의 1인자를 뽑는 풍조에 편승해 미식계에서도 최고봉을 선발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처음에는 전문가들이 모여 호선으로 정하려 했으나 저널리스트와 문인은 물론 아마추어들까지 참여를 희망하면서 일이 커졌다. 결국 일간지 ‘파리 수아르’에 공고를 내서 투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퀴르농스키가 ‘미식계의 추기경’으로 불리던 2위 모리스 데 종비오를 곱절에 가까운 표차로 누르고 ‘미식의 황태자’로 등극한다. 다음 해에 퀴르농스키는 프랑스 한림원을 본뜬 ‘미식가 한림원’의 창설을 주도하고 초대 회장에 오른다. ‘미식가 한림원’은 가스트로노미가 다른 학문과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을 목표로 프랑스 한림원과 같은 규모인 회원 40명을 시인, 소설가 철학자, 외교관 등 각계각층 인사로 구성했다. ‘미식가 한림원’은 1981년까지 존속했다.

프랑스 가스트로노미의 보물창고

퀴르농스키는 1933년 민속학과 음식에 해박한 오스탱 드 크로즈와 지방요리를 한 권으로 묶어 소개한 책 ‘프랑스 가스트로노미의 보물창고’를 간행했다. 책의 서문에 그는 “우리는 프랑스의 풍부한 가스트로노미를 망라한 자산목록을 만들어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모든 프랑스인이 그것을 잘 알고 활용할 의무가 있다. 소중하게 지키고 널리 외국에 알릴 의무가 있다…지금이야말로 프랑스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얼마나 다채로운 관광의 즐거움이 있는지, 다른 어떤 곳보다 맛있는 요리와 술이 있는 나라인지를 알려야만 할 때이다”라고 했다. 이 얼마나 의미심장하고 애국적인 발언인가.

퀴르농스키는 프랑스 요리를 호화로운 오트 퀴진, 소박한 부르주아 요리, 현지에 가야 맛볼 수 있는 지역 요리, 단순하게 만드는 즉석요리 등 4가지로 분류했다. 그는 지역 요리를 각 지방에만 존재하는 요리라고 부연 설명했다. 그는 자동차 시대에 발맞춰 파리 미식에 대항하는 지방 음식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리옹을 ‘세계 미식의 수도’로 선포하기도 했고, 지방의 레스토랑들이 파리의 최고급 식당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며 격찬도 했다. 또한 앙드레 픽이나 유지니 브라지에 같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요리사를 당대 최고의 에스코피에와 맞먹는 요리사로 꼽기도 했다. 그는 또 부르고뉴의 대표 음식 코코뱅 블랑과, 상트르 지방의 디저트 타르트 타탱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 데에도 큰 조력을 했다.

퀴르농스키는 1947년 ‘프랑스 요리와 와인’이라는 잡지를 창간했고, 그 후에도 꾸준히 미식과 관련된 저술 작업을 계속해 무려 65권의 책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칼럼을 집필했다. 그는 파리와 지방 간의 균형발전을 위해 미식과 여행을 연결한 관광마케팅을 제창하여 음식을 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문화로 격상시켰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단순한 미식 탐구를 넘어 세계 최고의 ‘가스트로노미 국가’를 지향한다. 이는 아르준 아파두라이 같은 인류학자가 주장하는 ‘미식정치학’의 영역으로 국가에 대한 대단한 헌신이 아닐 수 없다.

1952년 그가 80세 생일을 맞이했다. 80개의 레스토랑은 그가 평소 즐겨 앉았던 자리에 “이 좌석은 미식가들의 황태자이자, 프랑스 요리의 수호자였던 명예 고객, 모리스 에드몽 사이양 퀴르농스키의 자리입니다”라고 새긴 동판을 걸어 축하했다.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


강경록 (rock@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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