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 이토에 총 쏜 현장에 “윤석열 탄핵”…하얼빈 가보니
30살 안중근, 5m 거리 이토에 ‘탕, 탕, 탕’
“안중근의 후예로 윤석열 탄핵”(김○○)
“피로 물들여 되찾은 우리의 자유를 윤석열이 되돌리는 것을 반대합니다”(한○)
한국 국회가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지난 14일, 서울에서 북쪽으로 1100㎞ 떨어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의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방문했다. 기념관 입구에 놓인 방명록에는 윤 대통령의 탄핵을 간절히 바라는 한글 문구가 여럿 적혀 있었다.
‘국가안위 노심초사’.
안 의사 기념관 초입의 안 의사 전신 동상 바로 옆에는 안 의사가 1910년 3월 사형 집행 전 쓴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라는 여덟 글자 편액이 걸려 있었다. ‘국가의 안위가 걱정돼 애를 태운다’는 뜻이다. 구한말 망국의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서른살 목숨을 바쳤던 조선 청년은 100여년 뒤 멀쩡한 나라를 위험에 몰아넣은 한국 최고지도자의 행동을 예상이나 했을까. 안 의사의 글씨는 매우 거칠었고 흔들렸다.
한겨레는 안 의사 의거 115주년을 맞아 지난 13~17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과 지린성 차이자거우, 랴오닝성 다롄(뤼순)을 방문했다. 24일 현빈·박정민 등이 출연한 안 의사 관련 영화 ‘하얼빈’ 개봉을 앞두고 안 의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안 의사는 그의 동지 우덕순, 조도선 등과 함께 1909년 10월26일 오전 하얼빈에서 일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뒤 뤼순에서 수사·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일본 근대화를 이끈 이토는 일본 초대 총리에 이어 초대 조선 통감을 맡는 등 한국 식민지화에 앞장섰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에 이어 러일전쟁(1904~1905)까지 승리하며 제국주의 국가 대열에 합류했고, 조선은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정미7조약 등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군대가 해산되는 등 치욕을 겪었다. 안 의사는 사형 직전 집필한 ‘동양평화론’에서 하얼빈을 “동양평화를 위한 개전”의 장소로, 뤼순을 “담판의 자리”로 명했다.
안 의사의 의거가 이뤄진 하얼빈역사는 14개의 플랫폼을 가진 거대한 현대식 역사로 변해 있었다. 안 의사 기념관은 하얼빈역 정문 왼편에 자리했다. 2014년 개관했다가, 2017년 역 리모델링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고, 2019년 새 단장을 해 문을 열었다. 기념관 관리인은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온다”며 “1년에 5만명 정도 오고, 중국 사람도 비슷하게 온다”고 했다. 한국인과 중국인을 합쳐 한해 10만명, 하루 약 300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는다는 얘기였다. 실제 기념관엔 중국인 관람객 대여섯명이 구경하는 등 중국인이 적지 않아 보였다. 하얼빈에 산다는 한 중국 관람객은 “사실 안중근 의사를 잘 몰랐지만 최근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됐다”며 “정말 위대한 일을 한 것 같다”고 했다.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장소인 기차역 플랫폼 현장을 기념관 안에서 유리창 너머로 볼 수 있었다. 안 의사가 총을 쐈던 자리에는 삼각형이, 이토가 섰던 자리에는 마름모가 표시돼 있었다. 관리인은 “거리가 5m 정도 된다”고 했다.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나기 위해 일본에서 중국 다롄을 거쳐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는 러시아와 일본 주민의 환영을 받다가 인파 속에 있던 안 의사의 총격 3발을 맞고 30분 뒤 사망했다. 안 의사는 자신의 직업을 “포수”라고 할 정도로 사격에 능했다. 기념관 내 안 의사 전신상 위의 시계는 시침과 분침이 이토를 저격한 때(오전 9시30분)로 고정돼 있었다.
13일 안 의사와 인연이 깊은 관람객들이 기념관을 찾았다. 하얼빈에서 약 400㎞ 떨어진 러시아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에서 온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 학생들이었다. ‘고려인·한인 이주 160주년’을 기념해 무용극을 준비한 학생들은 지난 8일 한국 전주, 11일 서울 국회 의원회관에서 공연한 뒤 세번째 공연을 위해 하얼빈에 왔다. 고려인 4·5세인 학생 10여명은 기념관을 둘러본 뒤 방명록에 “감사하다”는 글을 남겼다. 이 학교 교장이자 고려인 3세인 김발레리야는 “안 의사와 최재형 의사의 인연이 매우 깊다. 어머니가 지어준 하얀 수의를 입은 안 의사의 사진을 보고 눈물이 났다”며 “학생들도 책과 연극 등으로만 배웠던 안 의사의 의거 장소에 직접 오게 돼 감격스러워한다”고 했다.
1900년대 초 러시아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최재형 의사는 독립을 도모하기 위해 1907년 연해주에 온 안 의사에게 숙식과 의복, 무기를 제공하는 등 도움을 줬다. 1908년 연해주에서 조직돼 국내 진공 작전을 폈던 무장 독립운동 단체 동의회의 대장 격인 총장이 최재형이었고, 안 의사는 우영장을 맡았다. 동의회 의병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폈던 안 의사는 일본군과의 두차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일본군 포로를 풀어줬고, 이로 인해 부대의 위치가 노출되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안 의사는 포기하지 않고 이토 처단에 나섰다.
하얼빈역 기념관과 뤼순 감옥 등이 비교적 잘 관리되는 것과 달리 안 의사가 의거 직후 조사를 받은 하얼빈의 옛 일본영사관과 이토 저격을 준비했던 또 다른 장소인 지린성 차이자거우(채가구)역은 별다른 관리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하얼빈역에서 2㎞ 떨어진 옛 일본영사관은 현재 하얼빈시 화위안초등학교로 바뀌어 있었다. 안 의사는 의거 직후인 10월26일부터 11월1일까지 이곳에서 일본 당국의 초동 조사를 받았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가 장악한 땅이었지만 러시아는 사건 직후 안 의사에 대한 수사권을 일본에 넘겼다. 일본은 이곳에 안 의사를 일주일 동안 가둬 조사하다가 일본의 조차지였던 중국 랴오닝성 뤼순의 감옥과 관동법원으로 옮겨 안 의사를 수사하고 재판했다.
5층 건물인 옛 영사관의 왼편 담벼락에는 가로 50㎝, 세로 30㎝의 작은 돌판에 안 의사가 갇혔던 곳이라는 짧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일본 세균부대가 이곳에서 생체실험을 진행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 학교 관계자는 “한국 사람들이 이곳에 가끔 온다”며 “안 의사와 관련한 시설이 아직 남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안 의사의 동지 우덕순이 이토를 저격하기 위해 기다렸던 지린성 푸위시 차이자거우역에서는 아무런 표지도 찾을 수 없었다. 하얼빈에서 약 90㎞ 떨어진 차이자거우역은 이토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기 직전 지나간 곳으로, 현재는 하루 두차례 기차가 오가는 간이역으로 남아 있었다. 역 관리인은 “안중근은 알지만, 이곳이 그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안 의사와 우덕순은 의거 이틀 전 차이자거우에서 하루를 묵었고, 이토에 대한 저격 확률을 높이기 위해 안 의사가 하얼빈역에, 우덕순이 차이자거우역에 나누어 대기했다. 이토는 차이자거우역에서 내리지 않고 곧바로 하얼빈역으로 갔다. 만약 이토가 차이자거우역에서 내렸다면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수 있다.
안 의사가 의거 뒤 옮겨져 수감되고 재판을 받은 랴오닝성 다롄의 옛 뤼순 감옥과 옛 일본 관동법원은 비교적 잘 보전돼 있었다. 뤼순 감옥에는 안 의사가 머물렀다는 독방과 사형장이 별도 시설로 관리되고 있었다. 평소에는 시설을 잠가뒀다가 관람객의 요청이 있을 때 열어줬다. 지난해 5월 한-중 관계가 경색됐을 때 뤼순 감옥의 안 의사 관련 시설이 공사 등을 이유로 몇달 동안 폐쇄된 적이 있지만, 현재는 개방된 상태였다.
하얼빈 푸위 뤼순/최현준 특파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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