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라면, 한 그릇의 위로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라면은 한국인에게는 비상식량이며 고향의 풍미다. 라면은 천재지변이나 전쟁 등 어떤 위기 속에서도 희망의 온기를 품은 생존의 동반자다. 또한 타향에서 잊힐 뻔한 고향의 정서를 되살리는 추억의 조각이다.
배고픔을 달래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 잃어버린 익숙함을 되찾아주는 '위로의 한 그릇'이다.
필자가 어릴 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라면을 사 오셨다. 한 봉지에 10원이며 거기에 껌까지 서비스로 들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라면을 처음 먹었을 때 느끼해서 입에 맞지 않았다. 어머니가 된장과 고추장을 넣고 육수를 만든 후 일반 국수와 라면을 함께 넣고 끓이니 꼬불꼬불한 라면 면발이 어울려서 한결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머니의 지혜가 놀라웠다. 당시 삼양라면에서 출시했던 제품은 맛이 한국인의 입맛에 그다지 잘 맞지 않아 별 인기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양이 출시한 라면은 일본의 묘조(明星-명성)식품의 제조법을 그대로 가져온 일본식 치킨 라면이었다. 이 때문에 닭고기 국물을 재현한 수프라서 느끼한 맛이 났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던 삼양식품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청와대까지 가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라면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때 라면을 처음 먹은 박 대통령은 "우리 한국인들은 맵고 짭짤한 맛을 좋아하니 고춧가루가 좀 더 들어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삼양식품에서는 라면에 기본적으로 약간 매운맛을 가미하게 됐다. 그런 다음 라면은 당시 정부의 혼분식 장려와 함께 승승장구하게 된다. 한국에서 '라면'이라고 하면 대부분 인스턴트 라면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봉지 라면을 지칭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컵 형태로 포장되어 물을 부어 조리할 수 있게 만든 라면은 '컵라면'이라고 한다.
필자도 2008년부터 2013년까지 5년 동안 라면회사 기술고문을 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라면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30% 증가한 11억3천840만달러(약 1조5천967억원)를 기록했다. 이는 역대 최대치라 한다. 물론 수출 실적이 잡히지 않는 해외 공장은 제외다.
다양한 '호칭'의 라면
라면은 국수를 증기로 익힌 뒤 기름에 튀겨 말린 것에 분말 스프를 별도로 첨부한 즉석식품이다. 라면 특성상 대다수는 면이 꼬불꼬불하고 비타민B2가 첨가돼 노란빛을 띤다. '라면'이라는 단어는 본래 중국의 '납면'(拉麵)에서 왔으나 일본어에서 용어가 재수입된 관계로 한국에서는 '라면'이라고 한다.
해외에서는 라면을 지칭하는 용어도 다양하다. 중국은 방편면(方便面), 포면(泡麵). 대만은 속식면(速食麵), 홍콩은 즉식면(卽食麵),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쾌숙면(快熟面)이라고 한다. 단, 중국에서 라면(拉麵)은 수타면을 뜻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instant noodle', 약칭으로는 'noodle'이 가장 일반적이다. 마카로니나 스파게티는 'pasta'라고 하므로 'noodle'이라고만 해도 별로 혼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탕면만 별도로 지칭할 땐 'noodle soup'이라고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라면을 뭉뚱그려 'ramen'이라고 한다.
라면 먹는 '전략'
손자병법 '모공(謨攻)의 장' 내용을 라면으로 연결해 봤다.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달성하는 전략적 사고다.
손자는 최상의 승리는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면 끓이기에 비유하면 불필요한 노력 없이 간단하고 효율적으로 최상의 맛을 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실패 없는 라면 끓이기는 복잡한 요리 과정(물의 양을 조절하거나 면을 다시 삶는 과정 등)을 줄인다. 라면 레시피를 정확히 따라 효율적으로 끓이는 것이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에 해당한다.
또한 손자는 전쟁에서 성(城)을 직접 공격하는 것을 최후의 수단으로 삼으라고 강조한다. 복잡한 방법보다는 간단하면서도 효과적 전략을 우선해야 한다. 라면 끓이기에서도 이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이상적인 순서는 물을 적절한 양으로 준비한다.
너무 많거나 적으면 나중에 불필요한 작업이 생긴다. 물이 끓은 뒤 면과 스프를 넣는다. 물이 끓기 전에 면이나 스프를 넣으면 맛이 불균형해질 가능성이 있다. 추가 재료는 미리 준비한다. 예를 들어 계란이나 파를 첨가할 계획이 있다면 미리 준비해 끓이는 과정에서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전쟁에서 준비와 실행의 흐름이 중요하듯 라면 끓이기도 마찬가지다.
라면을 끓일 때 추가 재료는 핵심 맛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용해야 한다. 손자가 성을 맨 마지막에 공격해야 한다는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부잣집 특식에서 서민 대표 음식으로
라면이 처음 출시됐을 때만 해도 귀한 음식, 특별식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러나 1970∼1880년대부터 경제가 발전하고 생산량이 폭증하면서 오히려 상당히 저렴한 음식이 됐다.
결과적으로 20년도 되지 않아 부잣집의 특식에서 서민의 대표 음식으로 변했다. 그러므로 라면은 물가 지수 산정에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품목의 하나다. 맵다는 것만 빼면 한국산 라면은 적당한 양념 맛에 면발 품질도 최고다.
한국 라면은 서민 먹거리 최종 저지선이기 때문에 정부의 강력한 가격 통제와 품질 관리를 받는다. 또한 시장의 강력한 자유경쟁으로 한국의 모든 라면회사는 극한의 가성비로 라면을 만든다.
그러다 보니 다른 나라의 라면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평균 60% 이상의 원가율이 포함된다. 아울러 식품사고를 방지하는 높은 위생시설로 생산하는 한국 라면의 품질 역시 비할 바가 못 된다.
또한 한국은 1봉지 120g이 표준으로 거의 한 끼 식사 분량이다. 반면 해외 라면들은 한국에선 소형 컵라면 크기인 65g 규격이 매우 흔하다. 최근 한국 라면을 색다른 조합으로 즐기는 외국인이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야시장의 한 점포에서 현지식과 적절히 조합해 처음 팔기 시작했다는 '불닭볶음면 오믈렛'(Buldak omelet)이 그렇다.
주인장 남매가 조리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은 조회 수 4천만회를 넘었다. 퓨전 한식이야 과거에도 있었지만, 일반인이 따라 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대중적으로 퍼지기엔 한계가 있었다.
반면 얇게 편 반죽에 달걀, 양파, 다진 고기 등을 넣은 현지 음식 '므따박'(Murtabak)으로 불닭볶음면을 돌돌 감싼 이 음식은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다고 한다.
라면의 소비가 많은 한국, 일본, 중국 등에서는 인스턴트 라면이 긴급 시의 비상식량으로 주목받고 있다. 전염병. 자연재해나 전쟁 위기 등 무언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벌어지면 라면을 박스 단위로 사재기하는 사태가 자주 벌어진다.
라면은 비상 상황의 종류에 따라 비상식량으로서의 효용성이 달라진다. 따뜻하면서 매콤한 국물은 추운 시기에 보온 효과와 큰 위안을 줄뿐더러 열량을 충분히 보충시켜 준다. 극한 상황에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구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런 점에서 한국 라면은 식품공학의 정수다. 가성비와 맛, 영양 모두를 잡기 위해 모든 심혈을 기울이는 우수한 식품이자 필수재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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