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올해의 인물] 한강의 기적, 대한민국을 치유하다
혼란스러운 정치·경제·사회 속 ‘한국인 자긍심’ 지킨 문화에 주목
아시아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가장 한국적인 서사로 세계인 울려
(시사저널=조문희 기자)
역사는 선이 아닌 점으로 기억된다. 굵직한 사건들이 알알이 점으로 찍혀 한 해를 기록한다. 2024년에 찍힌 점들은 어느 때보다 크다. 대한민국 역사상 44년 만에 비상계엄이 다시 선포된 해이자, 세계인의 자랑거리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온 해이기도 하다.
역사에 길이 남을 대형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흘러간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지는 후세대에 달려 있다. 시사저널이 2024년 올해의 인물로 작가 한강을 선정한 배경이다. 분열하는 정치, 위기의 경제,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문화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지켰다. 시사저널은 1989년 창간 이후 매년 12월 송년호에 올해의 인물을 선정해 발표해 오고 있다. 시사저널 편집국 기자들의 투표와 정기독자들에 대한 설문조사 등을 토대로,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력이 가장 컸던 인물을 선정하는 작업이다.
시사저널이 선정한 '2024년 올해의 인물'은 또 하나의 페이지를 장식하며 역사에 남을 것이다.
2024년의 대한민국에는 2개의 계엄이 있었다. 성격은 정반대다. 하나는 '치유'였고, 다른 하나는 '상처'였다.
순서는 치유가 먼저다. 지난 10월 전해진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다. 한강의 여러 작품 중 노벨문학상에 이르게 한 결정적 작품으로는 《소년이 온다》가 꼽힌다. 1980년 군사 정권의 비상계엄 선포와 5월 광주 학살로 이어지는 타임라인을 정면으로 마주한 작품이다. 군부의 잔혹함과 살아남은 이들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작가는 소설을 관통하는 "죽지 말아요"란 문장을 통해 '5월의 광주'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면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2024년 12월3일 비상계엄 선포는 '다시' 이뤄졌다. 계엄의 실상을 다룬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나라에서 두 달 만에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된 것이다. 44년 전 총칼을 들고 광주 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군대는, 다시 한번 총칼을 메고 국회에 난입했다. 한강이 《소년이 온다》로 봉합하고자 했던 역사적 상처는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로 다시 벌어졌다.
이번에도 한강은 피하지 않고 나아갔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위해 찾은 스웨덴에서 한국의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한 질문이 쏟아지자, "무력이나 강압으로 언로(言路)를 통제하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렇듯 한강은 역사적 트라우마, 정치적 부조리함, 사회적 불평등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문학계 '혁신가'로 통한다. 혁신가 한강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문학은 질적으로 한 단계 진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 문화는 또 어떻게 발전할까.

"K컬처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전후로 나뉜다"
문학계에서는 한국 문학이 2024년을 기점으로 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을 빛낸 위인' 반열에 오를 인물이 탄생한 해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노벨문학상 수상만으로도 이례적인데, 한강은 아시아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역사도 새로 썼다. 한강 작가는 1970년생, 53세다. 121명에 달하는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여성은 한강을 포함해 18명밖에 되지 않고, 아시아계는 5명에 불과하다. 한강보다 젊은 나이에 수상한 작가도 6명뿐이다. 시사저널이 독자들과 함께 2024년을 빛낸 올해의 인물로 한강을 선정한 이유다.
한강은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2월10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에서 한강은 '주인공'급 대우를 받았다. 시상식에서 한강의 이름이 호명될 때는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뒤이어 이어진 연회에서 그녀는 스웨덴 왕족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스웨덴 왕실이 왕가 일원에게 파트너 역할을 맡긴 것은 최고 수준의 예우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소개하게 돼 영광입니다"라는 사회자의 '깜짝' 한국어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문학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
한강이 연회에서 수상 소감을 밝힐 때 세계인들은 숨을 죽였다. 검은 드레스 차림에 군데군데 하얗게 센 머리 그대로 연단에 선 한강은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단호히 말했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왜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졌고 지금도 던지고 있는 질문들이다." 3분30초간 이어진 수상 소감에는 인간을 탐구하고자 하는 '한강 문학'의 가치관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문학계뿐만이 아니다. 문화계 전반의 찬사도 이어졌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 문화의 질적 진화를 의미한다는 이유에서다. 한강의 소설은 '순수문학'이다. 순수문학에는 텍스트만 쓰인다. 'K컬처'라는 이름으로 지금껏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린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나 영화 《기생충》, 아이돌 블랙핑크와 BTS의 음악에는 이미지·선율 등 부가 요소가 있지만, 한강의 작품엔 오로지 '한국어'만 등장한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국 문화계에 더 큰 의미로 받아들여진 배경이다.
그렇다면 한강의 작품은 무엇이 다를까. 한강의 대표작은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로 요약된다. 각각의 소재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사건, 가부장제의 폭력성이다. 민감한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기관인 스웨덴 한림원을 대표해 시상 연설을 맡은 엘렌 맛손은 "한강의 목소리는 매혹적이게 부드럽지만 형언할 수 없는 잔인함과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이야기한다"며 "한강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상처받고 연약하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거나 다른 질문을 하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강은 과거의 역사를 넘어,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직면하기도 한다. 한강은 노벨문학상 시상에 앞서 12월6일(현지시간) 현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12·3 계엄 사태와 관련해 "2024년 다시 계엄 상황이 전개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맨몸으로 장갑차 앞에서 멈추려고 애를 쓰셨던 분들을 봤고, 맨손으로 무장한 군인들을 껴안으면서 제지하려는 모습도 봤고, 총 들고 다가오는 군인들 앞에서 버텨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도 봤다"며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자신의 작품 《채식주의자》가 일부 시도에서 유해도서로 분류됐던 것과 관련해서는 "우려된다"고 직접 말했다. 한강은 "이 소설에 유해도서라는 낙인을 찍고 도서관에서 폐기하는 것은 이 책을 쓴 사람으로서 가슴 아픈 일"이라며 "지난 몇 년간 몇천 권의 도서가 폐기되거나 연령 제한됐는데, 자꾸 이런 상황이 생기면 도서관 사서들이 스스로 검열을 하게 될 것 같다. 사서 선생님들의 권한을 잘 지키는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면 좋겠다"고 밝혔다.

문화 트렌드까지 바꾸다…"K컬처 질적 성장"
그러면서 한강은 '희망'을 이야기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인 12월11일(현지시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강은 "우리가 이렇게 말을 건네고, 글을 쓰고, 읽고, 귀 기울여 듣는 과정 자체가 우리가 가진 희망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강은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믿음을 근거로 하는 것"이라며 "그게 아주 미약한 믿음이라고 해도, 꼭 어떤 사회적인 것을 다루지 않는 글이라고 해도, 아주 개인적으로 보이는 글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언어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쓰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화두는 이제 '넥스트 한강'이다.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10월10일부터 3개월간 한강의 작품은 전국 서점 베스트셀러를 독차지했다. 교보문고 집계에 따르면, 《소년이 온다》는 10~11월 2개월 판매량만으로 2024년 전체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이례적 인기를 누렸다. 한강 작품뿐만이 아니다. 예스24 집계에 따르면, 지난 3개월 동안 한강 작가의 작품을 제외한 문학작품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3% 늘어났다. 내년에는 한강의 신작 출간도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한강 신드롬은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문화 트렌드 자체를 바꿔놓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짧고 화려한 동영상 중심의 '숏폼(short form)' 문화가 조명받던 것에서 벗어나, 텍스트 기반의 문화활동을 멋있다고 여기는 이른바 '텍스트 힙(text hip)'이 유행하고 있어서다. 지난 6월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는 15만 명이 참여하면서 역대 최다 방문객 기록을 세웠다. 독서 플랫폼 밀리의서재는 이 같은 '텍스트 힙' 트렌드가 2030의 독서 문화 유입을 견인했다고 평가했다.
이제 한강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겠다는 입장이다. 한강은 지방자치단체나 기관 등에서 추진하는 각종 기념사업에 대해 "제 책을 읽어주시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게 전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내가 어디쯤 있고 어디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왔는지 '좌표'를 스스로 파악하게 됐다"며 "앞으로 더 쓰겠다. 계속 쓰던 대로 쓰겠다"고 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전문
여덟 살 때의 어느 날을 기억합니다. 주산학원의 오후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맹렬한 기세여서, 이십여 명의 아이들이 현관 처마 아래 모여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습니다. 도로 맞은편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마치 거울을 보는 듯 그 처마 아래에서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쏟아지는 빗발을 보며,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습기를 느끼며 기다리던 찰나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나와 어깨를 맞대고 선 사람들과 건너편의 저 모든 사람들이 '나'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저 비를 보듯 저 사람들 하나하나가 비를 보고 있다. 내가 얼굴에 느끼는 습기를 저들도 감각하고 있다. 그건 수많은 일인칭들을 경험한 경이의 순간이었습니다.돌아보면 제가 문학을 읽고 써온 모든 시간 동안 이 경이의 순간을 되풀이해 경험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어라는 실을 통해 타인들의 폐부까지 흘러들어가 내면을 만나는 경험. 내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을 꺼내 그 실에 실어, 타인들을 향해 전류처럼 흘려 내보내는 경험.어렸을 때부터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왜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지. 그것들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졌고, 지금도 던지고 있는 질문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잠시 머무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세계에서 우리가 끝끝내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에 우리의 본성에 대해 질문하는, 이 행성에 깃들인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일인칭을 끈질기게 상상하는,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폭력의 반대편인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문학을 위한 이 상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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