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된 내시와 혼인하는 게 목표”...조선 양반가 규수들, 속셈이 따로 있었다는데
내시·궁녀의 은밀한 삶과 죽음
내시, 신분상승 위해 고자수술후 자원
사내구실 못했지만 부인에 첩까지 둬
궁궐 주변 생활, 퇴직후 은평에 집단 거주
궁녀, 궐내 살림 총괄해 숫자 내시 두배
병 걸려야 출궁, 사후 친정 선산에 매장

서울 은평구 진관동 은평뉴타운 중앙에 위치한 이말산 정상의 비목(碑木)에 쓰인 문구다. 이말(莉茉·자스민)이 많이 서식해 생긴 명칭이다. 영혼들은 어쩌다 방치됐고 또한 무슨 연유로 비목이 국왕이 사는 도성을 향하게 했다는 말인가.
![상선 노윤천 묘표 노윤천은 1546년(명종 1) 을사사화(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윤임 일파의 대윤을 숙청한 사건) 때 왕명을 전달한 공로로 위사원종공신에 봉해졌다. 노윤천의 묘는 서울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에 소재한다. [배한철 기자]](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12/22/mk/20241222195108969gmyc.jpg)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의 묘지 흔적 이말산에는 내시와 궁녀들의 묘지가 집중돼 있다. [배한철 기자]](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12/22/mk/20241222195114970bvst.jpg)
내시 부인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많은 전토와 노비, 금은보화를 소유하며 풍요롭게 생활했다. 남편 품계에 따라 1품 정경부인(貞敬夫人), 2품 정부인(貞夫人) 등 높은 봉작도 받았다. 그러나 남편이 사내구실을 못하는 것에 불만도 없지는 않았을 터. 실록에 드물지만 내시 부인 불륜 사건이 등장한다.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도 “환자는 그것(생식기)이 흉하고 누추하여 실로 인류가 아니지만 장가들고 가정을 가져 보통 사람처럼 산다. 혹여 그 아내 되는 사람이 다른 접촉이 있을 때 유부녀의 실행(失行·간통)으로 죄를 주니 어찌 천리와 인정이라 할 것인가”라고 했다.
내시는 양자로 대를 이었다. ‘명종실록’ 1566년(명종 21) 8월 3일 기사는 “환자는 반드시 어린 환자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으며 많은 경우 4~5명에 이른다”고 했다. 양자가 되더라도 친가 성을 그대로 유지해 입양된 형제간에도 성이 모두 달랐다.

내시의 묘지는 서울 은평구 진관동, 도봉구 쌍문동, 노원구 월계동, 중랑구 신내동과 고양, 양주, 남양주, 파주, 안양, 안산 등에 분포한다. 이말산과 함께 은평구 진관동 백화사 동편 북한산 자락에도 내시 묘(북한산 내시 묘역)가 존재했다. 중골마을이라고 했던 북한산 묘역에는 이사문을 파조로 하는 이사문공파 문중 분묘 45기가 자리 잡았다. 하지만 2012년 묘역이 매각되면서 모두 훼손됐다. 노원구 월계동 초안산 자락의 청백아파트 주변에도 50여 개 내시 묘가 있었지만 1990년대 택지가 개발되고 청백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화장되거나 이장됐다.
궁녀는 내명부 소속으로 내시처럼 왕과 왕비를 지근에서 모시는 집단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내명부 품계 중 궁녀의 최고 직위는 내시보다 낮은 정5품 상궁(尙宮), 상의(尙儀)다. 궁녀들은 각 처소에 배치돼 왕실 의식주를 책임져야 해 내시보다 숫자가 많았다.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은 “우리 조정에는 환관이 335명, 궁녀가 684명으로 이들이 받는 녹을 합쳐서 따지면 쌀이 1만1430석이나 된다”고 했다. 폭군 연산군 시기는 궁녀가 1000명을 넘기도 했다.

내시들은 가정이라도 있지만 궁녀들은 구중궁궐에 갇혀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불미한 일도 적지 않았다. ‘정조실록’ 1776년(정조 즉위년) 12월 9일 기사에서 정조는 “여름 사이 중관(내시)이 이른바 방자나인(房子內人·궁녀의 종)이라는 것들과 은밀히 통간한 것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며 “죄상을 밝혀 율대로 처분하라”고 명했다.
궁녀들은 나이가 많거나 병에 걸려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출궁했다. 은평구 수국사(구산동 314) 부근에 ‘궁말’이 있었고 이곳에 조선 말까지 궁궐에서 물러나온 궁녀들이 20~30가구 거주했다고 한다. 간혹 기상이변이 있을 때도 결혼하지 못한 여인의 한이 하늘에 닿았다고 인식해 궁녀를 방출했다. 숙종 11년(1685) 2월 29일 한재로 궁녀 25명을 출궁시켰고, 영조 26년(1750) 9월 5일은 비가 너무 내려 45명을 뽑아 내보냈다.

내시와 궁녀의 신분은 중인 이하 하층민이었다. 엄격한 신분제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바꿨던 그들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을까.
참고 문헌
1.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경국대전, 연려실기술(이긍익), 신증동국여지승람, 성호사실(이익)
2. 은평의 내시·궁녀, 박상진, 은평향토사료집 19, 은평문화원, 2021
3. 은평 발굴 그 특별한 이야기, 서울역사박물관, 2009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로또 1등 275억 잭팟 터졌다”…수동 당첨 4명 동일인 추정, 같은 판매점서 나와 - 매일경제
- 갑자기 ‘국가경영’하고 싶다는 이 남자...자유와 활력의 대구, 뒷전 밀리나 - 매일경제
- ‘두 번 탄핵 찬성’ 김예지, 한동훈 문자 메시지 공개 - 매일경제
- “굴릴 수 있는 돈이 10억도 안돼?”…대한민국 ‘찐부자’ 이렇게 많다니 - 매일경제
- 성기가 뼈처럼 굳는다…보행 중 넘어진 美 60대 놀란 이유 - 매일경제
- '수사 불응' 버티던 尹, 이젠 여론전 나선다 - 매일경제
- 조진웅 ‘尹 탄핵 집회’ 깜짝 등장…“비상계엄, 극악무도, 패악질” - 매일경제
- BBC ‘올해 가장 인상적 사진’에 계엄군 총구 잡은 안귀령 - 매일경제
- 안철수 “실패한 의료개혁 중단하고 의대증원 규모 논의해야…‘전공의 처단’ 사과해야” - 매
- 김하성, 오타니와 한 팀? 美 언론 “다저스, 테오스카 대체 우타 자원으로 김하성에 관심” - MK스